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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반공/삼선교: 삼위일체적 선교와 교회

뉴비긴의 "오늘날의 선교를 위한 삼위일체 교리" 6

뉴비긴의 책 '오늘날의 선교를 위한 삼위일체 교리' 6장에 대한 반추입니다. 5장, 6장, 7장은 선교에서 제기되는 3가지의 중요한 문제들을 각각 다루면서 왜 그 중요한 질문들이 삼위일체와 관련있는지를 다룹니다. 세 가지 문제는 1) 세상의 역사 2) 세속화 3) 자생 공동체 입니다. 매우 중요한 주제라고 생각됩니다. 이번 장은 두번째 문제인 선교와 세속화의 관계를 다루고 삼위일체의 시각 안에서 그 문제를 바라보게 됩니다. 오래전에 쓴 글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맞이하고 있는 현 상황과도 매우 밀접한 주제라고 생각됩니다. 뉴비긴의 혜안이 빛나고 우리도 삼위일체라는 본질에 기대어 50년 후 혹은 그 후까지도 여전히 유효한 선교를 헤아릴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이해하는 만큼 정리해 보겠습니다. 

 

6. 선교활동과 인간의 삶의 세속화 (Missions and the Secularization of Human Life)

1) The second factor which we suggested as a ground for perplexity in the work of Christian missions is the increasing secularization of human life, the withdrawal of more and more areas of human experience from direct reference to religion.

오늘날 선교에 도전을 주고 있는 또 하나의 이슈는 사람들의 삶이 점점 세속화되는 것입니다. 세속화는 사람들이 종교와 무관하게 살아가는 영역이 점점 많아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선교는 이런 문제들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지 뉴비긴은 세속화와 관련하여 조금 더 성찰을 할 수 있도록 도와 줍니다.

2) In spite of the fact that this process of secularization was already well-established in Europe in the eighteenth century, the missionaries of that and the succeeding centuries still had a great deal of the mental attitude of a religiously centred society. . . What is still more important, they came to societies which were for the most part thoroughly 'sacral' in their structure; that is to say, in which religion held a controlling position in the affairs of the community and the family.

이런 세속화는 사실 생각보다 오래전 부터 시작되었는데 18세기와 19세기 (선교의 위대한 세기)에 사역한 선교사들은 대부분 서구 배경을 가지고 있었고 그들은 그런 세속화를 인식하기 보다는 자신들이 종교 중심 사회로 부터 생긴 사고 방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만일 이런 선교사들이 오늘날 처럼 완전히 세속화된 사회, 특별히 오늘날의 도시 문화로 와서 사역한다면 아마도 상당히 어려울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선교사들은 대개 마을 중심에 교회가 있고 교회는 지역 공동체의 교회로서 모든 일들이 교회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경험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지만 이런 배경을 가진 선교사들이 파송된 지역 역시 비록 기독교는 아니어도 선교사들의 출신 지역과 비슷하게 종교 중심의 사회 구조 안에서 살고 있었던 겁니다. 그러니까 그들의 종교를 새로운 기독교로 바꾸기만 하면 될 뿐 사회 구조에 대한 고민을 할 필요는 크게 없었다는 겁니다. 그러다보니 선교사들이 그 선교지의 지방 정부가 해야 할 일, 즉 학교, 병원 등을 기독교의 이름으로 하는 것들이 가능했고 그것이 선교의 주류를 이루기도 한 것입니다.

3) In most parts of the world this situation is changing rapidly. The educational and social services which the Church began are taken over by the state. The old forms of ecclesiastical discipline are no longer accepted. The old village community, centred in the church, gives place to the new town, dominated by the factory, in which the church appears to represent only the private and sapre-time interest of a minority. The process of secularization goes forward relentlessly in every part of the world.

물론 아직도 그런 곳이 남아 있지만 세상이 급속히 변했고 변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정신이나 기독교 교육을 하는 기관이 없지 않지만 이전처럼 교육의 주류를 담당하는 것에서 상당히 주변으로 밀려나 있습니다. 소위 미션스쿨에서 조차 예배 등을 의무로 하면 그 저항이 만만치 않습니다. 교회는 그리고 신앙은 개인적인 영역으로 밀려났고 이러한 세속화는 세상을 주도하는 정신이자 외적 형태로 확산되었습니다. 

4) This dissolution may be painful - as when an African pastor sees his village congregation eroded by forces coming from the mines and the big cities: or when the elders of an island community in the South Pacific witness the shattering impact upon their people of the tourist invasion. The Church may, and indeed must, do what it can to mitigate for the sake of the human beings involved, the immediate effect of the inrush of these new forces into old communities. But it is clear that in the long run the old kind of sacral community cannot be preserved. The challenge of man's coming of age has to be accepted.

세속화로 인해 그 동안 지켜왔던 전통이 해체되는 것을 경험하는 일은 힘든 일입니다. 뉴비긴은 재미있는 예를 이야기 합니다. 우리 선교사들도 그런 지역에서 사역하는 분들이 있지만 전통적인 지역에 광산이 들어 오면서 그 지역의 모든 삶이 변해 버립니다. 그리고 그 광산이 들어와서 변화되는 것 때문에 전통을 지키려는 사람들은 노심초사하지만 선교사들은 사실 광산으로 인해 생긴 문명의 혜택, 즉 전기, 교통 등을 받기도 합니다. 또 하나 태평양의 고립된 섬 지역에 관광객들이 오면서 지역 사회가 변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가 이런 세속화를 막기 위해 노력하는 일이 부분적으로 필요해 보일 수 있습니다. 광산 반대, 관광 반대 그런 구호를 가지고 광장으로 나갈 수 있겠죠. 하지만 길게 본다면 아무리 그렇게 한다고 해도 외부와 완전히 차단한 채 소위 '신성한 공동체'를 계속 유지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 할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도전들을 받아 들여야 한다고 뉴비긴은 지적합니다. 우리 나라에서 일부 교회들이 '무슬림 반대'라는 구호를 외치는 것도 이런 관점에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5) In fact, it is precisely the work of Christian missions which has been the great instrument of secularization in the midst of the ancient religious societies of Asia and Africa. THe preaching of Jesus Christ as the sole Redeemer, liberating men from the hitherto unbreakable grip of the old sacral order in family and tribe, has been itself the great revolutionary force. At this point the experience of Asian and African Christians, for whom secularization means first of all a kind of liberation, can be a help to the Christians of Europe for whom secularization appears as a wholly menacing reality, threatening the last remains of the sacral society of Christendom.

종교 중심 공동체를 가지고 있던 아시아와 아프리카 지역들이 세속화가 되는 과정에 사용된 도구가 바로 선교였음을 뉴비긴은 상기 시킵니다. 물론 서구 교회나 선교사는 '복음'을 전했다고만 생각할지 몰라도 그 복음과 함께 서구의 문화와 사고 등이 전통적인 종교 중심의 사회에서 살고 있던 그들을 그곳에서 끄집어 내는 역할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지금 세속화가 여전히 기독교 종교 중심 사회 패러다임 안에서 살고 있는 서구 사람들이 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꼭 부정적인 역할만 있는 것이 아닐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합니다. 조심스럽게 코로나 19로 인해 변화된 우리 상황으로 이 문제를 본다면 교회 건물에 모여서 예배드리는 것을 자제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예배를 드리게 된 지금의 상황이 꼭 부정적인 것만 있는 것은 아님을 알게 됩니다. 잘 반추하고 본질적인 것을 묵상하는 기회로 삼는다면 본질의 회복이라는 기회를 제공해 줄 수도 있고 이전에 생각하지 못했던 방식을 준비하고 그로 인해 우리가 고려하지 않았던 사람들이나 영역으로 진출하는 계기도 될 수 있을 것입니다. 

6) But, if we have to be on our guard against the typical religious illusion that the forms of Christian 'sacral' society can be indefinitely preserved, we have also to keep ourselves free from the typically secularist illusion that liberation from the 'given' means that human freedom is secured. There is no such security. The liberation contains indeed the possibility of freedom, but it is only in Christ that the possibility can be actualized.

뉴비긴은 두 가지 방향 모두를 경계합니다. 하나는 무엇인가 형식을 계속 잘 지키는 기독교의 신성함을 계속 유지해 나갈 수 있을 것이라는 환상과 다른 하나는 그런 것을 모두 허무는 세속화가 우리에게 진정한 자유를 줄 것이라는 환상 말입니다. 해방이라는 것이 자유의 가능성을 포함하고 있지만 참 자유는 오직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분명히 합니다. 세속화로 인해 사람들이 모든 면에서 자유를 누리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 자유라고 생각하면서 각자가 무엇을 구매하고 소비하는 모든 일들도 가만히 생각해 보면 어떤 거대한 구조 안에서 단지 자유를 누리는 착각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물론 시류를 거스르는 예외적인 사람들도 있지요. 제가 시류를 거스르고 입고 싶은대로 입고 나가면 사람들이 '이건 뭐지? 청학동에서 왔어?'라고 쳐다 볼 것입니다. 뉴비긴은 우리가 'hidden persuaders', 즉 익명의 설득자들의 힘에 구속당하고 있음을 지적합니다.

7) The fact that Christian faith and disciplship become more and more a matter of personal decision is fully in line with what we have understood of God's work in Christ. But is can also be misunderstood. The withdrawal of more and more areas of human life from the direct control of religion can be taken to mean that the Christian has nothing to say sabout them - that politics, economics, culture are not his concern. 

이러한 세속화의 영향으로 전통적인 종교 중심 사회가 무너지고 기독교 제국 안에 있음으로 개인의 생각이 마비되던 것에서 믿음과 제자도가 개인의 결정으로 점점 이동하는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하신 일과 맥락을 같이 합니다. 다만 이것이 이제 기독교인은 정치, 경제, 문화 등에는 관심을 끊고 소위 개인적인 믿음 생활 잘 하면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제야 말로 기독교인들이 종교의 이름으로 갇혀 있던 것에서 해방되어 모든 영역에서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본래의 자리로 나올 수 있어야 한다고 뉴비긴은 역설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과 이 장에서 다루려고 하는 삼위일체와의 관련은 무엇일까요. 이제 부터는 그 부분을 좀 다루어 보겠습니다.

8) Christians have erred in two directions in seeking a right relation to these 'authorities' and 'institutions'. On the one hand they have sometimes forgotten that these things were created through Christ and for Christ and that they are therefore subject to his will. . . One the other hand Christians have sometimes forgotten that Jesus was subject to these institutions and that the Church is call to be, for his sake, subject to them also and not to seek to rule them.

위 문장에 앞서 뉴비긴은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은 인간이 만들어 놓은 제도를 인정하는 삶이었다고 말합니다. 제도를 인정한다는 말이 모든 것에 동의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바울이 권세에 복종하라고 하면서도 동시에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인이나 종이나 남자나 여자가 차별이 없다고 말한 것은 차별을 보이는 제도를 무조건 동의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는 한 쪽 견해만 취하는 경향이 있으니 두 가지 방향의 오류가 있을 수 있는데 바로 그 부분을 뉴비긴은 지적합니다. 하나는 이러한 권위와 제도가 그리스도를 통해 그리고 그리스도를 위해 창조되었으며 그의 뜻에 따라야 한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그 제도를 무조건 따르는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역사하셔서 노예 제도 등 차별적인 것을 개선하려는 뜻을 민감하게 알아채지 못하고 기독교인 마저 그 제도를 누리는 것은 오류라는 것입니다. 반대로 그러한 권위와 제도를 지배하고자 교황권을 강화하여 아예 기독교가 모든 것을 다스리면 된다는 오류입니다. 우리는 그 제도 속에, 세상 속에 들어가 그것을 주님의 발 아래 복종시키고자 모든 영역을 그리스도의 가치관으로 변화시키도록 부름을 받았지 그것을 그대로 따르거나 그것을 지배하도록 부름을 받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뉴비긴은 설사 최근에 교회가 지배하던 영역을 포기하게 되는 일들이 발생한다고 해서 선교가 실패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선교의 전환을 가져와야 하는 문제로 인식합니다. 

9) If we believe that all these spheres of human life, and all the 'principalities, dominions and authorities' which hold sway in them, were created through Christ and for Christ, then we shall expect that the Spirit who takes of the things of Christ and shows them to us, who is the foretaste of our share in his victory, will in his sovereign freedom lead men and women engaged in these secular tasks, singly or groups, to specific acts which challenge the existing structures and witness to the true purpose for which God created them.

그렇게 세상의 모든 영역이, 그 모든 주권과 통치와 권세들이 바로 주님을 통해 주님을 위해 창조되었고 그 아래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이제 성부와 성자로부터 보냄을 받아 우리와 함께 계시면서 그리스도의 진리를 그리스도의 모든 것을 우리에게 보여 주시며 영원한 승리를 미리 맛보게 하시는 성령께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우리 모두 - 단지 성직자만이 아니라 -를 개인으로든 그룹으로든 그 모든 것들이 창조된 진정한 목적을 알도록 모든 영역에 참여케 하시고 역사하실 것입니다. 이런 큰 그림 안에서 개인이 가진 이분법 (주중의 삶과 주말의 삶)이나 직분의 이분법 (평신도와 전임 사역자) 등의 담이 무너지고 모든 성도가 성령의 역사 안에서 모든 영역에 참여하면서 그리스도를 증거하게 될 것입니다.  

10) The call of this hour is to understand in depth the relation of the mission of the Church to the structures of social existence, such as state, industry, economic life and culture, and to draw the necessary consequences for practical action.

이제 기독교 별도의 이름을 가지고 진행하는 영역들이 줄어들고 그렇다고 세상의 일들은 무시한 채 우리가 전통적으로 이해하는 기독교 선교만을 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이 시대에 중요한 것은 사회, 경제, 문화 등 세상에 존재하는 있는 구조와 우리 선교의 관계가 무엇인가를 깊이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며 이러한 시각에 기초를 제공해 주는 중요한 요소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a) These structures are part of God's creation as the framework for human life. (b) Like all things created, they have been created through Christ and for Christ. (c) Christ who, as the Son, humbled himself and became utterly subject to all the 'powers' for man's sake, has become victorious over all the demonic powers and has been exalted by the Father to his right hand until 'all things are put under his feet'. (d) But the Christ who sits at God's right hand til his enemies submit has not left us without a Comforter. The gift of the Spirit is the sign of Christ's victory.

뉴비긴이 설명하는 이 요소들이 바로 삼위일체적 관점에서 설명하는 요소들입니다. 먼저, 사회, 경제, 문화 등 사회 안에 존재하는 구조들 역시 인간의 삶의 틀을 제공하는 하나님의 창조 일부라는 관점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관계없는 악한 것이라고만 인식한다면 우리는 아주 다른 접근을 하게 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창조 일부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기본적인 요소입니다. 두번째로 이러한 것들은 다른 피조물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를 통해서 창조되었으며 그리스도를 위해 창조되었음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세번째는 자신을 낮추신 그리스도 그래서 모든 것을 발 아래 두실 그 그리스도는 이미 그리고 마침내 승리하실 것임을 믿는 일입니다. 여전히 그리스도의 통치가 임하지 않는 영역들이 그리스도의 발 아래에 복종하도록 해야 할 역할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주님은 우리에게만 맡겨 놓으신 것이 아니라 보혜사 성령을 보내셔서 각 성도와 공동체를 인도하시며 최후의 승리가 있기까지 모든 영역에서 그 승리를 미리 맛보도록 하시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11) It requires a firm faith that the secular world of industry and technology is part of God's creation, ruled by him, and destined to minister to the fullness of the new creation in Christ. It requires equally a willingness to trust the Holy Spirit to lead us in new paths and to create new forms of fellowship for new adventures in obedience. A truly biblical understanding of the mission of the triune God must surely furnish these things.

결국 이렇게 삼위일체적 선교와 세속화가 연결됩니다. 산업과 기술 등도 모두 하나님의 창조의 일부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질 새로운 창조의 충만함에 기여하는 것이 그 목표입니다. 그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창조의 완성을 위해 성령께서 우리를 인도하셔서 이전에 전통적인 종교적 구조 안에서만 선교를 하려던 것에서 벗어나 새로운 곳으로 인도하신다는 것을 인식하고 순종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 글이 오래 전에 나왔기 때문에 우리는 실제로 그러한 모습을 오늘날 목도하고 있습니다. 모든 영역에서 그리스도의 순종을 이끌어 내기 위해 헌신하는 많은 신실한 하나님의 백성들을 봅니다. 하지만  동시에 여전히 종교 중심의 패러다임을 가지고 참 변하지 않는 모습도 동시에 보고 있습니다. 모든 상황에서, 심지어 세속화의 과정에서 조차 성령의 인도에 민감하며 익숙하지 않은 것을 받아들이는 자세가 필요해 보입니다. 샬롬.

5장, 6장, 7장은 중심 주제여서 좀 길어질 수 밖에 없음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