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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반공/삼선교: 삼위일체적 선교와 교회

뉴비긴의 "오늘날의 선교를 위한 삼위일체 교리" 6

뉴비긴의 책 '오늘날의 선교를 위한 삼위일체 교리' 6장에 대한 반추입니다. 5장, 6장, 7장은 선교에서 제기되는 3가지의 중요한 문제들을 각각 다루면서 왜 그 중요한 질문들이 삼위일체와 관련있는지를 다룹니다. 세 가지 문제는 1) 세상의 역사 2) 세속화 3) 자생 공동체 입니다. 매우 중요한 주제라고 생각됩니다. 이번 장은 두번째 문제인 선교와 세속화의 관계를 다루고 삼위일체의 시각 안에서 그 문제를 바라보게 됩니다. 오래전에 쓴 글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맞이하고 있는 현 상황과도 매우 밀접한 주제라고 생각됩니다. 뉴비긴의 혜안이 빛나고 우리도 삼위일체라는 본질에 기대어 50년 후 혹은 그 후까지도 여전히 유효한 선교를 헤아릴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이해하는 만큼 정리해 보겠습니다. 

 

6. 선교활동과 인간의 삶의 세속화 (Missions and the Secularization of Human Life)

1) The second factor which we suggested as a ground for perplexity in the work of Christian missions is the increasing secularization of human life, the withdrawal of more and more areas of human experience from direct reference to religion.

오늘날 선교에 도전을 주고 있는 또 하나의 이슈는 사람들의 삶이 점점 세속화되는 것입니다. 세속화는 사람들이 종교와 무관하게 살아가는 영역이 점점 많아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선교는 이런 문제들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지 뉴비긴은 세속화와 관련하여 조금 더 성찰을 할 수 있도록 도와 줍니다.

2) In spite of the fact that this process of secularization was already well-established in Europe in the eighteenth century, the missionaries of that and the succeeding centuries still had a great deal of the mental attitude of a religiously centred society. . . What is still more important, they came to societies which were for the most part thoroughly 'sacral' in their structure; that is to say, in which religion held a controlling position in the affairs of the community and the family.

이런 세속화는 사실 생각보다 오래전 부터 시작되었는데 18세기와 19세기 (선교의 위대한 세기)에 사역한 선교사들은 대부분 서구 배경을 가지고 있었고 그들은 그런 세속화를 인식하기 보다는 자신들이 종교 중심 사회로 부터 생긴 사고 방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만일 이런 선교사들이 오늘날 처럼 완전히 세속화된 사회, 특별히 오늘날의 도시 문화로 와서 사역한다면 아마도 상당히 어려울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선교사들은 대개 마을 중심에 교회가 있고 교회는 지역 공동체의 교회로서 모든 일들이 교회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경험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지만 이런 배경을 가진 선교사들이 파송된 지역 역시 비록 기독교는 아니어도 선교사들의 출신 지역과 비슷하게 종교 중심의 사회 구조 안에서 살고 있었던 겁니다. 그러니까 그들의 종교를 새로운 기독교로 바꾸기만 하면 될 뿐 사회 구조에 대한 고민을 할 필요는 크게 없었다는 겁니다. 그러다보니 선교사들이 그 선교지의 지방 정부가 해야 할 일, 즉 학교, 병원 등을 기독교의 이름으로 하는 것들이 가능했고 그것이 선교의 주류를 이루기도 한 것입니다.

3) In most parts of the world this situation is changing rapidly. The educational and social services which the Church began are taken over by the state. The old forms of ecclesiastical discipline are no longer accepted. The old village community, centred in the church, gives place to the new town, dominated by the factory, in which the church appears to represent only the private and sapre-time interest of a minority. The process of secularization goes forward relentlessly in every part of the world.

물론 아직도 그런 곳이 남아 있지만 세상이 급속히 변했고 변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정신이나 기독교 교육을 하는 기관이 없지 않지만 이전처럼 교육의 주류를 담당하는 것에서 상당히 주변으로 밀려나 있습니다. 소위 미션스쿨에서 조차 예배 등을 의무로 하면 그 저항이 만만치 않습니다. 교회는 그리고 신앙은 개인적인 영역으로 밀려났고 이러한 세속화는 세상을 주도하는 정신이자 외적 형태로 확산되었습니다. 

4) This dissolution may be painful - as when an African pastor sees his village congregation eroded by forces coming from the mines and the big cities: or when the elders of an island community in the South Pacific witness the shattering impact upon their people of the tourist invasion. The Church may, and indeed must, do what it can to mitigate for the sake of the human beings involved, the immediate effect of the inrush of these new forces into old communities. But it is clear that in the long run the old kind of sacral community cannot be preserved. The challenge of man's coming of age has to be accepted.

세속화로 인해 그 동안 지켜왔던 전통이 해체되는 것을 경험하는 일은 힘든 일입니다. 뉴비긴은 재미있는 예를 이야기 합니다. 우리 선교사들도 그런 지역에서 사역하는 분들이 있지만 전통적인 지역에 광산이 들어 오면서 그 지역의 모든 삶이 변해 버립니다. 그리고 그 광산이 들어와서 변화되는 것 때문에 전통을 지키려는 사람들은 노심초사하지만 선교사들은 사실 광산으로 인해 생긴 문명의 혜택, 즉 전기, 교통 등을 받기도 합니다. 또 하나 태평양의 고립된 섬 지역에 관광객들이 오면서 지역 사회가 변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가 이런 세속화를 막기 위해 노력하는 일이 부분적으로 필요해 보일 수 있습니다. 광산 반대, 관광 반대 그런 구호를 가지고 광장으로 나갈 수 있겠죠. 하지만 길게 본다면 아무리 그렇게 한다고 해도 외부와 완전히 차단한 채 소위 '신성한 공동체'를 계속 유지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 할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도전들을 받아 들여야 한다고 뉴비긴은 지적합니다. 우리 나라에서 일부 교회들이 '무슬림 반대'라는 구호를 외치는 것도 이런 관점에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5) In fact, it is precisely the work of Christian missions which has been the great instrument of secularization in the midst of the ancient religious societies of Asia and Africa. THe preaching of Jesus Christ as the sole Redeemer, liberating men from the hitherto unbreakable grip of the old sacral order in family and tribe, has been itself the great revolutionary force. At this point the experience of Asian and African Christians, for whom secularization means first of all a kind of liberation, can be a help to the Christians of Europe for whom secularization appears as a wholly menacing reality, threatening the last remains of the sacral society of Christendom.

종교 중심 공동체를 가지고 있던 아시아와 아프리카 지역들이 세속화가 되는 과정에 사용된 도구가 바로 선교였음을 뉴비긴은 상기 시킵니다. 물론 서구 교회나 선교사는 '복음'을 전했다고만 생각할지 몰라도 그 복음과 함께 서구의 문화와 사고 등이 전통적인 종교 중심의 사회에서 살고 있던 그들을 그곳에서 끄집어 내는 역할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지금 세속화가 여전히 기독교 종교 중심 사회 패러다임 안에서 살고 있는 서구 사람들이 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꼭 부정적인 역할만 있는 것이 아닐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합니다. 조심스럽게 코로나 19로 인해 변화된 우리 상황으로 이 문제를 본다면 교회 건물에 모여서 예배드리는 것을 자제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예배를 드리게 된 지금의 상황이 꼭 부정적인 것만 있는 것은 아님을 알게 됩니다. 잘 반추하고 본질적인 것을 묵상하는 기회로 삼는다면 본질의 회복이라는 기회를 제공해 줄 수도 있고 이전에 생각하지 못했던 방식을 준비하고 그로 인해 우리가 고려하지 않았던 사람들이나 영역으로 진출하는 계기도 될 수 있을 것입니다. 

6) But, if we have to be on our guard against the typical religious illusion that the forms of Christian 'sacral' society can be indefinitely preserved, we have also to keep ourselves free from the typically secularist illusion that liberation from the 'given' means that human freedom is secured. There is no such security. The liberation contains indeed the possibility of freedom, but it is only in Christ that the possibility can be actualized.

뉴비긴은 두 가지 방향 모두를 경계합니다. 하나는 무엇인가 형식을 계속 잘 지키는 기독교의 신성함을 계속 유지해 나갈 수 있을 것이라는 환상과 다른 하나는 그런 것을 모두 허무는 세속화가 우리에게 진정한 자유를 줄 것이라는 환상 말입니다. 해방이라는 것이 자유의 가능성을 포함하고 있지만 참 자유는 오직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분명히 합니다. 세속화로 인해 사람들이 모든 면에서 자유를 누리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 자유라고 생각하면서 각자가 무엇을 구매하고 소비하는 모든 일들도 가만히 생각해 보면 어떤 거대한 구조 안에서 단지 자유를 누리는 착각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물론 시류를 거스르는 예외적인 사람들도 있지요. 제가 시류를 거스르고 입고 싶은대로 입고 나가면 사람들이 '이건 뭐지? 청학동에서 왔어?'라고 쳐다 볼 것입니다. 뉴비긴은 우리가 'hidden persuaders', 즉 익명의 설득자들의 힘에 구속당하고 있음을 지적합니다.

7) The fact that Christian faith and disciplship become more and more a matter of personal decision is fully in line with what we have understood of God's work in Christ. But is can also be misunderstood. The withdrawal of more and more areas of human life from the direct control of religion can be taken to mean that the Christian has nothing to say sabout them - that politics, economics, culture are not his concern. 

이러한 세속화의 영향으로 전통적인 종교 중심 사회가 무너지고 기독교 제국 안에 있음으로 개인의 생각이 마비되던 것에서 믿음과 제자도가 개인의 결정으로 점점 이동하는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하신 일과 맥락을 같이 합니다. 다만 이것이 이제 기독교인은 정치, 경제, 문화 등에는 관심을 끊고 소위 개인적인 믿음 생활 잘 하면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제야 말로 기독교인들이 종교의 이름으로 갇혀 있던 것에서 해방되어 모든 영역에서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본래의 자리로 나올 수 있어야 한다고 뉴비긴은 역설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과 이 장에서 다루려고 하는 삼위일체와의 관련은 무엇일까요. 이제 부터는 그 부분을 좀 다루어 보겠습니다.

8) Christians have erred in two directions in seeking a right relation to these 'authorities' and 'institutions'. On the one hand they have sometimes forgotten that these things were created through Christ and for Christ and that they are therefore subject to his will. . . One the other hand Christians have sometimes forgotten that Jesus was subject to these institutions and that the Church is call to be, for his sake, subject to them also and not to seek to rule them.

위 문장에 앞서 뉴비긴은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은 인간이 만들어 놓은 제도를 인정하는 삶이었다고 말합니다. 제도를 인정한다는 말이 모든 것에 동의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바울이 권세에 복종하라고 하면서도 동시에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인이나 종이나 남자나 여자가 차별이 없다고 말한 것은 차별을 보이는 제도를 무조건 동의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는 한 쪽 견해만 취하는 경향이 있으니 두 가지 방향의 오류가 있을 수 있는데 바로 그 부분을 뉴비긴은 지적합니다. 하나는 이러한 권위와 제도가 그리스도를 통해 그리고 그리스도를 위해 창조되었으며 그의 뜻에 따라야 한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그 제도를 무조건 따르는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역사하셔서 노예 제도 등 차별적인 것을 개선하려는 뜻을 민감하게 알아채지 못하고 기독교인 마저 그 제도를 누리는 것은 오류라는 것입니다. 반대로 그러한 권위와 제도를 지배하고자 교황권을 강화하여 아예 기독교가 모든 것을 다스리면 된다는 오류입니다. 우리는 그 제도 속에, 세상 속에 들어가 그것을 주님의 발 아래 복종시키고자 모든 영역을 그리스도의 가치관으로 변화시키도록 부름을 받았지 그것을 그대로 따르거나 그것을 지배하도록 부름을 받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뉴비긴은 설사 최근에 교회가 지배하던 영역을 포기하게 되는 일들이 발생한다고 해서 선교가 실패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선교의 전환을 가져와야 하는 문제로 인식합니다. 

9) If we believe that all these spheres of human life, and all the 'principalities, dominions and authorities' which hold sway in them, were created through Christ and for Christ, then we shall expect that the Spirit who takes of the things of Christ and shows them to us, who is the foretaste of our share in his victory, will in his sovereign freedom lead men and women engaged in these secular tasks, singly or groups, to specific acts which challenge the existing structures and witness to the true purpose for which God created them.

그렇게 세상의 모든 영역이, 그 모든 주권과 통치와 권세들이 바로 주님을 통해 주님을 위해 창조되었고 그 아래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이제 성부와 성자로부터 보냄을 받아 우리와 함께 계시면서 그리스도의 진리를 그리스도의 모든 것을 우리에게 보여 주시며 영원한 승리를 미리 맛보게 하시는 성령께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우리 모두 - 단지 성직자만이 아니라 -를 개인으로든 그룹으로든 그 모든 것들이 창조된 진정한 목적을 알도록 모든 영역에 참여케 하시고 역사하실 것입니다. 이런 큰 그림 안에서 개인이 가진 이분법 (주중의 삶과 주말의 삶)이나 직분의 이분법 (평신도와 전임 사역자) 등의 담이 무너지고 모든 성도가 성령의 역사 안에서 모든 영역에 참여하면서 그리스도를 증거하게 될 것입니다.  

10) The call of this hour is to understand in depth the relation of the mission of the Church to the structures of social existence, such as state, industry, economic life and culture, and to draw the necessary consequences for practical action.

이제 기독교 별도의 이름을 가지고 진행하는 영역들이 줄어들고 그렇다고 세상의 일들은 무시한 채 우리가 전통적으로 이해하는 기독교 선교만을 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이 시대에 중요한 것은 사회, 경제, 문화 등 세상에 존재하는 있는 구조와 우리 선교의 관계가 무엇인가를 깊이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며 이러한 시각에 기초를 제공해 주는 중요한 요소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a) These structures are part of God's creation as the framework for human life. (b) Like all things created, they have been created through Christ and for Christ. (c) Christ who, as the Son, humbled himself and became utterly subject to all the 'powers' for man's sake, has become victorious over all the demonic powers and has been exalted by the Father to his right hand until 'all things are put under his feet'. (d) But the Christ who sits at God's right hand til his enemies submit has not left us without a Comforter. The gift of the Spirit is the sign of Christ's victory.

뉴비긴이 설명하는 이 요소들이 바로 삼위일체적 관점에서 설명하는 요소들입니다. 먼저, 사회, 경제, 문화 등 사회 안에 존재하는 구조들 역시 인간의 삶의 틀을 제공하는 하나님의 창조 일부라는 관점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관계없는 악한 것이라고만 인식한다면 우리는 아주 다른 접근을 하게 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창조 일부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기본적인 요소입니다. 두번째로 이러한 것들은 다른 피조물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를 통해서 창조되었으며 그리스도를 위해 창조되었음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세번째는 자신을 낮추신 그리스도 그래서 모든 것을 발 아래 두실 그 그리스도는 이미 그리고 마침내 승리하실 것임을 믿는 일입니다. 여전히 그리스도의 통치가 임하지 않는 영역들이 그리스도의 발 아래에 복종하도록 해야 할 역할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주님은 우리에게만 맡겨 놓으신 것이 아니라 보혜사 성령을 보내셔서 각 성도와 공동체를 인도하시며 최후의 승리가 있기까지 모든 영역에서 그 승리를 미리 맛보도록 하시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11) It requires a firm faith that the secular world of industry and technology is part of God's creation, ruled by him, and destined to minister to the fullness of the new creation in Christ. It requires equally a willingness to trust the Holy Spirit to lead us in new paths and to create new forms of fellowship for new adventures in obedience. A truly biblical understanding of the mission of the triune God must surely furnish these things.

결국 이렇게 삼위일체적 선교와 세속화가 연결됩니다. 산업과 기술 등도 모두 하나님의 창조의 일부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질 새로운 창조의 충만함에 기여하는 것이 그 목표입니다. 그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창조의 완성을 위해 성령께서 우리를 인도하셔서 이전에 전통적인 종교적 구조 안에서만 선교를 하려던 것에서 벗어나 새로운 곳으로 인도하신다는 것을 인식하고 순종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 글이 오래 전에 나왔기 때문에 우리는 실제로 그러한 모습을 오늘날 목도하고 있습니다. 모든 영역에서 그리스도의 순종을 이끌어 내기 위해 헌신하는 많은 신실한 하나님의 백성들을 봅니다. 하지만  동시에 여전히 종교 중심의 패러다임을 가지고 참 변하지 않는 모습도 동시에 보고 있습니다. 모든 상황에서, 심지어 세속화의 과정에서 조차 성령의 인도에 민감하며 익숙하지 않은 것을 받아들이는 자세가 필요해 보입니다. 샬롬.

5장, 6장, 7장은 중심 주제여서 좀 길어질 수 밖에 없음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아래 한종석 선생님이 수고해 주신 전문을 올립니다. 천천히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6장 선교활동과 인간의 삶의 세속화

 

기독교 선교활동의 사역 안에서 주저함의 근거로 우리가 제시한 두번째 요인은 인간의 삶의 지속적인 세속화인데 인간이 경험하는 더 많은 영역들이 종교와의 직접적인 관련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세속화의 과정이 유럽에서는 이미 18세기에 많이 자리잡았음에도 불구하고 18세기와 그 다음 세기의 선교사들은 종교 중심적 사회의 정신자세를 대부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교회가 가장 눈에 띄는 건물인 마을과 읍, 그리고 교회가 일반 대중의 삶 예를 들면 가르침, 치료, 자선활동 그리고 영혼의 치료의 일들 대부분의 중심을 차지했던 나라들 출신이었다. 더 중요한 것은 선교사들이 사회구조가 전적으로신성한사회 즉 종교가 공동체와 가족의 일들을 좌우하는 위치에 있는 사회로 왔다는 것이다. 따라서 선교사 개인을 중심으로 자란 새로운 기독교 공동체들이 비슷한신성한특징을 가지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태평양의 섬들에서 볼 수 있듯이 지역 공동체 전체가 기독교를 받아들인 곳에서는 공동체 전체의 신성한 특징이 단절없이 지속되었다. 새로운 종교가 오래된 공동체를 효과적으로 묶는 끈이 되었다. 인도와 같이 소수만 기독교를 받아들인 곳에서도 기독교 공동체와 교회 기관들이신성한사회의 양식에 대부분 순응한 것도 사실이다. 교회는 학교, 병원, 사회봉사 기관을 운영했고 산업체의 운영, 농업의 개선, 그리고 일반적 사회 기관에 직접적으로 관여했다. 기독교 공동체가 형성되는 최전방에서 선교사와 목사는 행정관이 담당하는 기능 중 많은 부분을 담당했다.  교회는 선교사들의 출신 국가에서 더 이상 지배종교로서의 지위를 누리지 못한 지가 오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20세기에도 공동체의 삶의 중심적 위치에 있었다. 

 

세계의 대부분의 지역에서 이 상황은 급속히 변화되고 있다. 교회가 시작한 교육 및 사회활동들은 국가로 넘어갔다. 교회내에서의 오래된 형태의 훈육은 더 이상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교회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오래된 마을 공동체는 공장으로 가득 찬 새로운 도시에게 자리를 내주었고 교회는 소수의 개인적 여가생활을 대표하는 것으로 비춰진다. 이러한 세속화의 과정은 세계 구석구석으로 끈질기게 퍼져나간다.

 

한편으로 이 과정은 가족과 지역으로 이루어진 국가적 공동체의 간섭으로부터 개인의 자유가 증가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전통적인 형태의 마을 공동체에서 사람은 교제권이 이웃으로 제한되어 있었고 친구를 선택하는데 자유가 없었다. 현대도시에서는 자동차나 전화의 도움으로 자신의 이웃을 무시하고 친구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 따라서 그 사람은 자신이 어떤 기준으로 삶을 살아가야 할지에 대해 많은 부분에서 자유롭다. 오랫동안 결정되어져 주어졌던 것들이 이제는 그렇지 않게 되었다. 동일한 자유가 삶의 다른 영역으로도 확장된다. 어떤 형태의 정부 아래서 살 것인가도 단순히 주어지는 것이 아닌 선택할 수 있는 것이 되었다. 현대사회에서는 어떤 직업을 가지고 돈을 벌 지에 대한 것도 전통적인 사회에서는 꿈을 꿀 수 없었을 정도로 개인의 선택의 문제가 되었다. 돈은 더 이상 금이나 은의 가치와 비교되는 상대적 가치로 물건의 값을 매기는 고정된 척도가 아니다. 돈은 정부가 경제발전을 관리하기 위해서 조종하는 유동적인 도구이다.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삶의 현실들이 사람들에게 결정되어져서 강요되지 않으면 않을 수록 사람들은 자신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결정에 더욱 더 신경을 쓰게 된다. 이러한 사실은 개인과 가족의 삶 속에 있는 가장 친밀한 문제들로부터 사회안에서의 인간의 삶에 관한 폭 넓은 문제들로 확장된다.

 

기존 질서의 해체가 자유의 과정이라고 보는 관점에서 보면, 비록 이것이 오래된 사회적 유대의 해체를 의미한다고 할 지라고 교회가 이것을 유감스럽게 보는 것은 부질없는 것이다. 한 아프리카의 목사가 광산이나 대도시로부터 몰려오는 세력들에 의해서 자신의 마을 회중들이 서서히 붕괴되는 것을 볼 때나 남태평양 한 섬에 있는 공동체의 원로들이 관광객들의 쇄도로 인해서 마을 사람들이 받는 어마어마한 영향을 목격할 때와 같이 이 해체의 과정은 고통스럽다. 교회는 이 새로운 세력들이 오래된 공동체로 침입하는 것으로 말미암아 발생하는 직접적인 영향을 완화할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는 대로 해야만 한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보면 오래된 신성한 공동체가 유지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인간에 대한 다가오는 시대의 도전은 받아들여져야만 한다. 기독교 신앙과 제자화는 더욱 더 개인의 결정의 문제가 될 것이고, 사회적 압력에서 오는 관습과 제재의 끈을 가지고 사람을 신앙에 잡아두는 것은 점점 불가능하게 될 것이다. 상대적으로 문명화가 덜 된 공동체에서는 지난 몇 세기 동안의 대부분의 선교이야기에서 볼 수 있는 교회로의 집단 개종의 여지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여지는 분명히 줄어들 것이다. 마찬가지로 교육, 의료, 사회봉사와 같은 분야와 같이 세속화가 빠르게 진행되는 분야에서도 교회가 영향을 주거나 활동을 할 있는 공간은 분명히 줄어들 것이다. 그리스도인 교사, 그리스도인 의사, 그리고 그리스도인 사회봉사자는 그리스도인 상인, 그리스도인 제조업자 혹은 기술자가 그런 것처럼 그들을 감싸고 있는기독교 기관의 보호 없이 일을 해야만 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거부하거나 받아들이는 결정을 하도록 인간을 압박하는 장소로서 교회에 관해 앞 장에서 이야기 한 것은 지금 고려하고 있는 사안이 어떻게 전개되는지를 우리로 하여금 알도록 도와준다. 그리스도인들이 당황하거나 준비되어 있지 못하면 안된다. 사실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고대 종교적 사회의 한복판에서 세속화의 강력한 도구로 사용되었던 것이 바로 기독교 선교활동의 일들이었다. 가족과 부족 내의 오래된 신성한 질서가 가진 그 때 까지는 깰 수 없었던 속박으로부터 인간을 자유롭게 한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그 자체로 위대한 혁명적인 힘이었다. 이 시점에서 세속화를 무엇보다도 해방의 한 종류로 이해하는 아시아와 아프리카 그리스도인들의 경험은 세속화를 기독교제국의 신성한 사회의 마지막 남은 흔적을 전면적으로 위협하는 위험한 실제로 보는 유럽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도움이 될 수가 있다.

 

그러나 우리가 기독교적인 신성한 사회의 형태가 영원히 지속될 수 있다는 전형적인 종교적 환상으로부터 우리를 지켜내야 한다면 우리는 또한기존 질서로부터의 해방이 인간의 자유를 보장해준다는 전형적인 세속주의적 환상으로부터도 우리를 지켜야 한다. 그런 보장은 없다. 해방이 자유의 가능성을 담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가능성은 오직 그리스도안에서만 실현가능하다. 완전한 자유인 그 공로에 대한 의지적인 수용이 없이는 세속적인 인간은 새로운 종류의 속박으로 바로 추락하게 된다. 세속화 과정의 일부로 개인의 자유가 최대한으로 보장되는 바로 그 사회에서 동시에 경제적인 힘” “소비심리조장등과 같은 익명의 힘들에 의한 새로운 형태의 구속이 발견된다. 수 많은 사람이 열정적으로 평화를 갈망함과 동시에 전쟁으로 향한 비인간적인 운명으로 내몰리는 자신들을 발견한다는 사실만큼 이것에 대한 더 신랄한 증거를 찾을 곳은 없다. 그리스도의 도움 안에서 만이 자유를 찾을 수 있다. “기존 질서로부터의 해방은 그 도움을 받아들일 기회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한 잘못 이해되고 의미를 상실한다.

 

기독교의 신앙과 제자화가 점점 더 개인적인 결정의 문제가 된다는 사실은 우리가 그리스도안에서의 하나님의 사역에 대해 우리가 이해한 것과 맥락을 같이한다. 하지만 동시에 오해될 소지가 있다. 인간의 삶의 더 많은 영역들이 종교의 직접적인 통제로부터 멀어지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그것들에 대해서 이야기 할 것이 없고 정치, 경제, 문화는 그들의 관심사가 아니라는 것을 뜻한다고 여겨질 수 있다. 기독교 신앙이 점점 개인적 결정의 문제가 된다는 사실이 기독교가 개인적 도덕의 문제에 관한 편협한 영역에만 관심을 가지는 것을 뜻한다고 오해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선교 역사의 처음 수백 년간 복음의 대적자였던 신비주의 종교들(이런 종교들에 대한 요구는 언제나 있을 것이다)과 마찬가지로 복음이 단순히 개인적이고 사적인 구원 만을 제공하는 것으로 오해받을 심각한 위험이 있다. 복음은 세상의 구원을 포함한 더 큰 일에 관심이 있는데 우리시대에 급격히 세속화된 인간의 삶의 영역들도 분명히 그 안에 포함되어 있다. 우리는 이러한 인간의 삶의 영역의 세속화를 그들의 구원을 선포한 복음에 관련해서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이것이 오늘날 기독교 세계선교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뜨거운 실제적인 쟁점 중 하나이다. 우리가 그것을 이해하도록 삼위일체 신앙이 어떤 도움을 주는가?

 

복음서가 우리에게 말하는 대로 성육신한 성자의 삶은 당시에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인 제도들을 완전히 인정한 삶이었다. 바울이주님을 위하여 모든 권위에 순종하라고 썼을 때, 먼저 된 것을 나중 되게 하고 나중 된 것을 먼저 되게 함으로써 원칙적으로 그것들을 모두 뒤엎는 하나님의 통치를 위해서 보냄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살았던 사회구조를 전복하거나 통제하려고 하지 않았던 예수의 본보기를 충실히 반영하고 있다. 예수는 인간의 삶의 유지와 질서를 위해서 성부에 의해서 공급된 것들의 일부로 그 것들을 받아들였다. 초대교회는 노예제도나 여성의 종속과 같은 사회 경제적 제도를 분명히 인정하며 예수의 본보기를 따랐지만 동시에 그리스도안에서 남자나 여자 그리고 자유인이나 노예의 차별이 없다고 선언했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께 나지 않음이 없다고 쓴 바로 그 바울이 모든주권과 통치와 권세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리고 그리스도를 위해서 창조되었고그는 만물보다 먼저 있었고 그의 안에서 모든 것이 충만해진다라고 썼다. 권세들과제도들은 전혀기독교적인 것을 말하지 않는다. 콘스탄틴의 시대는 아직 먼 미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은 그리스도를 통한 그리고 그리스도를 위한 하나님의 창조물로 이해되었다.

 

그리스도인들은권세그리고제도와의 올바른 관계를 찾는 일에 있어서 두 방향으로 잘못을 저질러 왔다. 한편으로는 그리스도인들은 권세와 제도들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리고 그리스도를 위해서 창조되었고 따라서 그리스도의 의지에 구속된다는 것을 가끔 잊어버리곤 했다. 이는 하나님의 성령이 인간사회의 새로운 경제 정치 질서의 새로운 형태를 찾도록 그리스도인들을 움직이는 시대에도 노예제도나 왕조와 같은 특정한 형태의 제도를 대치 불가능한 창조 질서의 한 부분으로 절대화 시키는 결과를 낳았다.(제도를 절대시하는 오류) 다른 한편으로는 그리스도인들은 예수가 이러한 제도의 아래에 있었고 교회도 예수로 인해서 그 제도들 아래 있고 그 제도를 지배하려고 부름을 받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잊어버리곤 했다. 두 번째 잘못을 가장 잘 보여주는 기억할 만한 예는 그레고리 7세의 교황권 강화이지만, 최근의 선교활동의 역사를 포함해서 우리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되새길 만한 일들이 더 많이 있다. (제도 무시)

 

만약에 교회들에게 최근까지 인류의 문화와 사회생활에 끼쳤던 직접적인 영향이나 통제를 포기하도록 강요된다고 하더라도 이것은 교회의 선교의 실패를 의미하지 않는다. 이것은 우리에게 두 가지 사실을 상기시킨다. 소극적인 면에서 보면, 삶의 이 영역들은 교회의 지배하에 있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지배하에 있다는 사실과 교회의 주님의 뜻에 대한 그 부분의 순종은 인간의 삶의 질서와 보호를 위해서 성부가 제정한 제도에 대해 주님이 했던 것처럼 분명히 순종 하는지의 여부에 달려있다는 사실이다. 좀더 적극적인 면에서는 삶의 이러한 영역에 대한 그리스도의 주인 됨이 성령의 사역에 의하지 않고서는 분명히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을 상기시킨다는 것이다. 성령은 이제는 숨겨져 있는 그리스도의 주인 됨에 우리가 참여하는 것에 대한 증표이고 또한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들을 취해서 우리에게 보여주는데 모든 것을 한번에 보여주지 않고 우리가 감당할 수 있을 만큼만 보여준다. 이런 적극적인 면에 대해서는 더 자세히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인 회중들안에서의 성령이 일함에 대해 이 글의 다음 단락에서 어떠한 말이 언급될 지 기대해야 한다. 정치, 경제, 문화의 제도와 매일 근접하여 접촉하는 것은 성직자, 주교들 또는 총회장등과 같은 교회의 공식적인 기관들이 아니다. 정치, 경제, 교육, 산업, 과학연구 등과 같은 업무 안에서 자신들의 생계를 꾸려나가는 교회의 일반 성도들이 바로 그들이다. 만약에 사회생활의 제도에 변화가 일어난다면, 이 사회생활의 제도의 변화는 이 남녀들의 주중의 삶 안에서 일어나는 결정에 의해서 일어난다. 이러한 분야에서 일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완전히 그리스도가 지배하는 영역 밖에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은 실제로 가능하고 매우 자주 일어나는 일이다. 마치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농장이나 공장에서 하는 일은 주일학교나 성경교실에서 하는 일의 직함에 주어진주님의 일의 아닌 것처럼 말이다. 이는 사실상 그리스도의 우주적인 주인 됨을 부인하는 일이다. 우리가 인간의 삶의 이러한 영역들과 그 안에서 그것들을 좌지우지하는주권과 통치와 권세들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위해서 창조된 것을 믿는다면, 그 모든 것들을 그리스도로부터 취해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이이며 그리스도의 승리 안에 우리의 참여의 증표인 성령이 그리스도의 주권적인 자유 안에서 개인적으로 혹은 단체로 이러한 세상의 일들에 관계를 맺고 있는 남녀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기존의 제도들을 창조한 진정한 목적을 알리고 그것들에 도전하는 구체적인 활동으로 이끌 것을 기대해야 한다. 기독교 역사는 성령의 이러한 움직임에 대한 많은 예를 가지고 있는데 가끔은 교회의 공식적인 권위에 의해서 저항을 받기도 했지만 이 움직임에 의해서 국가, 경제, 교육 그리고 법의 제도들은 그리스도인 남녀들의 행동에 의해서 변화되어 왔다. 그러나 이러한 예들이 사회 안에 있는 이러한 제도들안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전체적인 숫자에 비해서는 아주 미미하다는 것을 탄식과 함께 인정해야 한다.

 

지난 200년 동안의 선교 기록이 그리스도의 이름 안에서 모든 종류의 사회악과 대항한 성공적인 싸움들로 인해서 빛이 난 것은 감사하는 마음으로 언급되어야 한다. 여기서 자세히 이야기 하는 것은 어렵지만 두 가지가 우리의 논의와 연관이 있다.  먼저 이 성과들은 대부분 서구 국가들이 주로 상업과 정부의 힘에 기대어 교회에게 준 힘과 특권의 장점을 이용한 교회들의 조직된 힘에 의한 결과들이었다는 것이다. 두번째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변화들과 함께 (선교활동이 이 변화에 큰 몫을 담당하였다) 조직된 교회들과 선교활동들이 사회악에 대한 직접적인 행동을 취할 수 있는 영역이 매우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세속화는 어느 곳에서나 오늘날의 질서가 되었다. 기독교 학교, 병원, 사회봉사기관이 그 분야에서 의심할 여지없이 주도적 역할을 했던 시대에 대한 향수는 더 이상 쓸모가 없다. 이 시대의 요청은 국가, 산업, 경제, 문화와 같은 사회에 존재하는 구조들과 교회의 선교와의 관계에 대해 깊은 이해를 갖는 것과 실현 가능한 활동에 대한 필요한 결과들을 도출하는 것이다. 그러한 이해의 중심에 다음과 같은 요소들이 있다는 것은 이미 분명하다.

 

(A) 이러한 구조들은 인간의 삶을 이루는 틀로 하나님의 창조의 일부이다. 그것들은 하나님에 의해서 임명되었다. 교회는 자신의 주님을 따라서 그 구조들을 인정하며 그것들의 고유한 특성들이 요구하는 구체적인 직무들을 실행하면서, 자신이 그 안에서 삶을 영위해야 하는 틀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 구조들은 교회에 종속되지 않으며 교회의 힘에 의해서 직접적으로 좌우되지 않는다. 교회가 권위들,’ 예를 들면 국가의권위들에게 바친 순종은 성자가 성부에게 바친 순종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 종들의 주인에 대한 순종 조차도모욕을 당했으나 되갚지 않았고 그들을 공평하게 심판하는 이를 신뢰한그리스도의 모범에 의해서 칭찬을 받는다.

 

(B) 만물이 창조 되었듯이, 모든 구조들도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위해서 창조되었다. 그것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판단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이 그 구조들을 이해하는 기준이다. 그러나 구조들은 죄로 인해서 창조물의 타락을 공유한다. 그것들은 그리스도로부터 분리된국가의 정당성” “경제적 필요의 권위 등과 같은 절대적인 권위를 주장하는 악의 힘 아래로 들어왔다. 이런 일이 일어나면 그것들은 인간의 종속화와 인간성 말살의 이유가 된다. 신약성경이 말하는 이것의 극단적인 예는 국가의 수장에 의한 신적 권위의 장악이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에 의해서 임명된 자짐승이 된다.

 

(C) 성자로서 자신을 낮추고 인간을 위해서 모든 권위에 완전히 순종한 그리스도는 모든 악의 세력에 승리하였고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둘 때까지성부의 우편에서 성부에 의해서 높임을 받고 있다. 여기에서 미래 시제와 과거 시제 모두를 주의 깊게 보아야 한다. 그의 승리는 완전하다. 그러나 우리는 그 승리의 완성을 기다리고 있다. 창조물은 여전히 해방을 기다리며 구속된 상태에서 신음하고 있다. 악의 세력은 인간 사회의 구조들안에서 일하고 있다. 우리는 아직 그 구조들이 자신들의 진정한 통치자인 그리스도에게 완전히 순종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있다. 교회는 그것들이 타락한 형태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창조의 일부임을 받아들여야 한다.

 

(D) 그러나 자신의 적들이 굴복하기까지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있는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보혜사를 주고 떠났다. 성령을 선물로 준 것은 그리스도의 승리의 징표이다. 성령의 삶에 참여함으로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그 승리에 참여하고 있으며 따라서 그 승리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희망과 확신을 가지고 있다. 그 확신에 의해서 그들은 사회의구조가 하는 일을 보고 심판한다. 성령의 삶에 참여함으로 그들은 예수를 이 모든 구조들의 주로 고백할 수 있으며 사회 구조 안에 있는 많은 것들이 하나님의 아버지 됨을 부인함에도 성부 하나님이 그 구조들을 인간에게 머물 곳으로 주었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고백과 인정은 내적인 정신의 상태로 머물지 않는다.  이 고백과 인정은 인간의 삶의 구조에 대한 그리스도의 주인 됨을 증거하기 위해서 성령이 자신의 자유와 주권을 가지고 사용할 수 있도록 말과 행동으로 표출된다. 이 것은 일반적으로 그리고 많은 경구 조직된 교회의 공식적인 행동의 문제는 아니다. 물론 교회의 공식적인 행동들도 성령의 통치의 일부이긴 하더라도 말이다. 그 것은 일반적으로 이 구조들 안에 관리인, 기술자 혹은 노동자, 법률가, 공무원 또는 유권자, 교사나 학생. 지주 혹은 세입자, 의사, 건축가, 기자로 참여하는 그리스도인 남녀들의 평범하고 우연한 말과 행동에 의해서 표출된다. 그리스도인 남녀가 그 구조가 부여하는 기본적인 규율들을 받아들이면서 그 구조 안에서 일할 때 일어나는, 그리고 그리스도의 주됨과 하나님의 아버지 됨에 대한 확신을 따르는 데서 생기는 문제들과 씨름하면서 생기는 말과 행동들일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고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 남녀라고 말하는 것은 성령이 선물한 공통의 삶을 나누며, 복음의 약속과 성례 그리고 친교안에서의 상호간의 도움, 조언, 책망을 통해서 지속적으로 그 삶을 새롭게 받으며, 예배 안에서 그 삶을 표현하면서 기독교 성도의 삶 안에서 서로 결합된 남녀들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우리 신자들의 삶이 성령의 권위와 자유에 대한 진지한 믿음 위에 기초하고 있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심각한 약점이다. 성령의 자유는 분별과 지도력의 선물을 교회의 나머지 일원들을 인도하고 튼튼하게 하는데 사용되도록 공동체의 어느 누구에게나 줄 수 있는 자유를 말한다. 성령의 권위는 기독교 선교의 실제적인 전략을 결정할 수 있는 권위인데 이는 우리가 기대하지 못했던 곳에서 복음의 진전을 위한 새로운 길을 열거나 우리가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들을 복음의 증인으로 사용하거나 활짝 열려있고 성공이 보장되어 있는 것 같은 문들을 가끔은 닫아버리는 권위이다. 이 점이 여기서 강조되는 이유는 우리가 정치, 산업, 문화의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어마어마한 과업 안에서 성령을 신뢰하고 따르는 것을 배우기 시작하는 것은, 신자들의 삶 안에서 성령의 이러한 권위와 자유가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배우는 것만을 통해서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강조는 먼저 지역의 신자들에게 주어져야 하는데 그 이유는 그 곳이 바로 인간이 이웃으로서 함께 사는 법을 배우는 곳이고 그 이웃이 그리스도안에서 형제가 되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단원이 다루는 특정한 질문과 관련해서, 세속의 삶 가운데 동일한 분야에서 일하는 그리스도인 남녀들의 자유로운 유대가 미래를 위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이 증명될 것이다. 예를 들면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교육이 더욱 세속화되고 교회의 손에서 벗어나게 될수록, 일상적인 업무를 위한 성령의 인도함을 함께 찾을 수 있는 직장연합이나 단체에서 함께 활동할 수 있는 기회를 그리스도인 교사들에게 제공하는 것이 더욱 필요하게 된다. 과거에 교회가 유사한 영향을 끼치지 못했던 산업이나 상업의 영역에서는 이 필요가 교사들보다는 절실하게 느껴지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덜 긴급하거나 덜 실재적이지 않은 것은 아니다.

 

교회의 세계 선교의 현재의 단계를 위해서 매우 중요한 이 필요에 관련해서 우리가 특별한 관심을 기울여야하는 특정한 예가 있다. 이는 기술적 발전을 위한 국제적인 원조의 급격한 증가의 움직임이 일어나는 가운데 이러한 분야로 선교적 진출을 하기 위해 부름을 받아들이게 될 그리스도인 남녀들의 연대에 관한 것이다. 이는 분명히 전통적 방식의 선교봉사활동을 축소시키는 세속적인 운동에 대한 교회들의 적절한 반응이 될 것이다. 이것은 1952년에 있었던 윌링겐회의에서 캐넌 워렌의 연설 중 기억할 만한 문장들 안에서 제안되었다.

 

나는 전통적인 방식과 더불어 완전히 새로운 종류의 선교활동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고 믿습니다. 예를 들면 우리는 봉급을 받는 평범한 직원으로 현지의 상황에 맞게 자신들의 일터로 전문지식을 가지고 가서 개발계획을 위해서 봉사할 준비가 되어 있는 과학교육을 받은 남녀들이 생길 것을 예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단지 오늘날 대부분의 경우처럼 자신들의 기독교적 신앙이 자신의 직무와 관련이 없다고 여기는 사람들로 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들은 기독교의 통찰에 비추어훈련되고 정제된 기술을 사용하기 위해 의식적이고 계획적으로 소명의식을 가지고 갈 것입니다. 승진이나 금전적 보상은 이러한 사람들에게는 자신들의 기독교적 소명에 비해 완전히 부차적인 것입니다. 동일한 헌신을 하는 다른 사람들은 경험이 있는 노동조합원으로서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신생 노동조합운동이 사회의 의미, 개개인의 사회에 대한 책임, 그리고 사회의 개개인에 대한 책임에 관한 기독교의 성찰 위에 확실히 세워지는 것을 돕기 위해서 현지로 갈 것입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협동조합운동의 개발에 기독교적인 진실성을 가지고 갈 것입니다. 이것들은 단지 세개의 실례일 뿐입니다

 

나는 선교적 조직이 헌신된 교제 안에서 하나로 묶인 몇 명의 사람에 의해서 개척될 가능성을 바라봅니다. 이 단체는 역사에 남을 만한 선교회들을 특징지었던 것과 같은 영적 지원과 응집력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또한 새로운 것을 감히 바라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거의 가보지 않는 지역에 있는 특정한 상황으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자주 고립되거나 아주 외로울 것입니다. 그들은 모든 교회로부터의 지지에 대한 깊은 신뢰가 필요할 것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활동은 처음 시작부터 교회 일치의 기반 위에 그리고 다양한 인종의 기반 위에 구상되어져야 합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들어가서 활동할 세계에 교단 주의가 설 자리는 완전히 없습니다. 더 나아가 그 세계는 국가의 문화나 전통의 구별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곳입니다. 여기가 아마도 우리 시대의 기독교 선교의 전체적인 과업이 새로운 발걸음을 내딛는 기회일 수도 있습니다.”[1]

 

유감스럽게도 11년이 지난 지금 이 요청에 대응하여 많은 일들이 일어나지 않았다. 이 요청은 우리가 물려받은 활동들의 틀에 쉽게 들어맞지 않는다. 이는 산업과 기술의 세속적 세상은 하나님의 창조의 일부이고 하나님에 의해서 다스려지며 그리스도안에서의 새로운 창조물의 충만함을 돕기로 예정되었다는 것에 대한 굳건한 믿음을 필요로 한다. 동시에 성령이 우리를 새로운 길로 인도하며 순종 안에서 새로운 도전을 위한 새로운 형태의 교제를 만든다는 것을 신뢰하는 의지를 필요로 한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선교에 대한 진정한 성경적 이해는 분명하게 이러한 것들을 제공한다.

 

오래된 교회 건물들이 점점 없어지거나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바뀌는 것을 지켜보는 서구의 나라들 안에서나 혹은 기독교 학교나 병원이 더 이상 국가발전에서 지도적 역할을 하지 않는 오래된선교 현장안에서나 또는 쿠바와 같이 교회에 대한 안전보장이 갑자기 그리고 극적으로 사라진 나라들 안에서나 기독교 제국에 대한 어느 정도의 향수는 매우 인간적이고 이해할만하다. 그러나 우리는 기독교 제국의 상황은 교회의 선교 안에서 임시적이고 지나가는 단계인 것과 인간의 삶의 많은 영역이비신성화되는 것이 하나님이 세상을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과 비신앙의 궁극적인 쟁점으로 이끄는 여정의 일부인 것을 깨달으면서 하나님이 우리를 이끄는 방법을 기쁘게 인정해야 한다. 성령의 삶에 참여함으로 우리는 다른 모든 것들과 마찬가지로 이 일에 대한 하나님의 아버지와 같은 다스림을 인정할 수 있게 되고, 성자의 이 땅에서의 삶을 특징짓는모든 권세에 대한 인정에 참여할 수 있게 되며, 급진적으로 세속화되는 사회 안에서 살아가면서 그 승리에 대한 증거 안에서 성령이 주는 확신을 가질 수 있게 된다.



[1] Norman Goodall (ed.), Mission under the Cross (Edinburgh House Press, 1953), pp. 3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