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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반공/삼선교: 삼위일체적 선교와 교회

뉴비긴의 "오늘날의 선교를 위한 삼위일체 교리" 7

뉴비긴의 책 '오늘날의 선교를 위한 삼위일체 교리' 7장에 대한 반추입니다. 5장, 6장, 7장은 선교에서 제기되는 3가지의 중요한 문제들을 각각 다루면서 왜 그 중요한 질문들이 삼위일체와 관련 있는지를 다룹니다. 세 가지 문제는 1) 세상의 역사 2) 세속화 3) 자생 공동체 입니다. 매우 중요한 주제라고 생각됩니다. 이번 장은 세번째 문제인 자생 공동체를 다루고 삼위일체의 시각 안에서 그 문제를 바라보게 됩니다. 오래전에 쓴 글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맞이하고 있는 현 상황과도 매우 밀접한 주제라고 생각됩니다. 뉴비긴의 혜안이 빛나고 우리도 삼위일체라는 본질에 기대어 50년 후 혹은 그 후까지도 여전히 유효한 선교를 헤아릴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이해하는 만큼 정리해 보겠습니다.

7. 선교 전진의 형태 (The Pattern of Missionary Advance)

1) the third is. . . the question of the immobilization of the missionary movement itself, the question - in other words - of the failure of missions to produce, in the measure in which the Gospel should lead us to expect, spontaneously multiplying Christian communities among the peoples of Asia and Africa. It is, to put it in yet other words, the question: 'Why are the resources of the missionary movement today so largely exhausted in the support of dependant churches and why is so little energy available for fresh advance?'

세 번째 질문은 선교 현장에서의 아주 실제적인, 그러면서도 아주 다루기 어려운 문제를 이야기 합니다. 인적, 물적 더 나아가 선교학적인 것을 포함한 자원들이 선교의 새로운 돌파를 위해 사용되기 보다 외부의 도움을 의존하는 교회를 위해 왜 더 많이 사용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저 역시 수년 전 위클리프의 아시아-태평양 지역을 섬길 때 직면했던 문제입니다. 그냥 앞에서 해 온대로 이렇게 하는 것이 올바른 선교인가? 라는 질문을 던지며 새로운 돌파를 위해 여러 시도를 했던 경험이 있습니다. 물론 늘 이런 일엔 주위의 반대가 많습니다. 특히 이전 패러다임의 열매를 경험했던 분들 혹은 선교학적으로 그 패러다임에 머물러 있는 분들로 부터 말입니다. 뉴비긴이 수 십년 전에 이미 이런 문제에 도전을 했다는 사실이 위로가 됩니다.

2) These institutions, being related to the economy of the sending country rather than to that of the receiving country, continued to depend heavily upon the resources of the missions that founded them.

서양에 기반을 둔 소위 국제 선교 단체들이 선교지에 세운 일종의 지부들은 선교사들이 리더십을 발휘할 때는 물론이고 심지어 현지인들에 의해 운영될 때라도 그 경제적 연결이 선교지 국가의 경제 체제나 현지 교회들과 연관되어 있기 보다는 선교사를 보낸 국가 및 교회들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효율과 비효율의 문제와 상관 없이 그 기본 구조 자체가 상당한 괴리를 가져 옵니다. 몇 해 전에 아프리카 동부의 한 국가에서 있었던 국제 선교 단체의 한 지부 행사에 참여한 적이 있었는데 그 단체의 현지인 대표가 이제 아프리카 선교는 우리의 힘으로 하겠다고 강조하자 참석자 모두가 큰 박수를 쳤습니다. 하지만 그 현지 단체의 사무실은 아주 커다란 대표 사무실, 일본산 4륜 구동 신차가 몇 대, 그리고 게스트 하우스까지 모두 서구 선교 단체의 시스템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국가의 현지 교회와는 전혀 맞지 않는 모습을 보며 그 현지 대표의 바람과 구호는 외부에서 펀드가 오는 만큼만 가능하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물론 마음이 씁쓸했습니다. 이런 체제가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것은 이미 여러 현장에서 밝혀졌으며 코로나 19 이후 경제 상황은 이런 방향의 수정을 더욱 요구할 것으로 보입니다.

3) More important still is the fact that there is no sign of the kind of spiritual dependence with which we have become distressingly familiar in the story of modern missions. The younger churches of modern times have - in most cases - been dependent for ministerial leadership upon the founding missions for years and even decades after their first establishment. The churches established by St Paul, so far as we can tell from the available evidence, had their own ministry of elders or bishops and deacons, as well as others, from the very beginning.

뉴비긴은 그런 현대 선교의 구조가 적어도 성경에서 발견하는 초대교회의 선교와는 아주 다르다고 지적합니다. 바울과 그 동역자들의 선교는 그런 경제적 지위를 가지고 있지도 않았고 소위 저개발 국가로 간 것도 아니며 선교지에서 선교 대리인을 찾아 급여를 지불하는 따위의 일은 찾아 보기 어렵다고 말합니다. 또 선교지에서 사역을 확장하기 위해 파송 교회에 무엇을 요구하는 예도 찾기 어려우며 오히려 신생 교회로 부터 무엇을 받거나 신생 교회의 구호금을 오히려 반대로 전달하는 사례가 있을 뿐이라고 지적합니다. 더 중요한 문제는 영적인 의존도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문제인데 돈을 비롯한 외적인 것의 의존과 무관하지 않으면서 더 심각한 것은 현지 교회의 자신학화가 없다는 문제입니다. 성경을 스스로 읽기 보다는 외부인의 해석에 의존하는 영적, 선교학적, 신학적 의존이 아주 무섭습니다. 초대교회의 선교에서는 사역이 오히려 스스로 이루어졌다고 뉴비긴은 말합니다. 그러하기에 오늘날 우리가 신학이라고 말하는 것이 헬라의 문화 안에서 스스로 발전할 수 있었겠지요.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신학이 헬라 문화 안에서 이루어진 자신학의 결과였다면 너무 지나친 말일까요?

4) If, with many scholars, we accept the view that the Epistle to the Galatian's was addressed to those same congregations of whom we read in Acts 14, we have an exceptionally clear statement of the grounds of that confidence which enabled the apostles to take what - in the view of modern missionaries - would be regarded as the appalling risk of leaving new congregations without proper supervision. For here is a case in which the new congregations did in fact go astray very quickly. . . . Every paragraph of the letter bears witness to the intense spiritual solidarity of the apostle with these Galatian Christians, his deep love from them and his sense of responsibility for them. Yet the whole argument of the letter shows that he rests everything on his faith in the adequacy of the Spirit as the source of truth and holiness.

뉴비긴은 갈라디아의 예를 듭니다. 갈라디아 교회가 여러 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사도행전 14장에 나오는 공동체가 맞다면, 현대 선교의 시각에서 볼 때 그렇게 어린 교회를 두고 떠나는 것은 무책임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실제로 그 공동체는 곧 많은 문제를 가지게 됩니다. 하지만 서신서를 통해 보면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공동체와 깊은 유대감을 가지고 있으며 그들에 대한 책임감에 기반한 깊은 사랑을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진리와 거룩의 원천이 선교사인 자신이 아니라 성령이라는 사실을 굳게 믿고 있다는 것을 서신서를 통해 보여주고 있습니다.

5) That is the apostle's answer to an erring congregation - not to devise means of bringing them under closer ecclesiastical control, but to remind them of the source of their life as Christians and of the place where they must go if they would be at that spring whence the life of God flows. In this epistle the reference is especially to the relation of the Spirit to the law. In other epistles - notably Romans, I Corinthians and Ephesians, much is said about the relation of the Spirit to the various ministries in the Church. Both of these have great importance for our understanding of the weakness of the modern missionary movement, and we shall look for a moment at each.

선교사인 사도 바울이 자신의 영향 아래 있는 갈라디아 공동체에 문제가 발생한 것에 대해 그 공동체를 통제하기 보다는 중요한 문제를 일깨우는 노력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선교사의 역할에 많은 것을 시사해 줍니다. 선교사의 역할은 물리적으로 현지 공동체를 조정하고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고 근본적인 것을 스스로 바라볼 수 있도록 돕는 역할임을 보여 줍니다. 뉴비긴은 사도 바울이 특별히 갈라디아서에서는 성령과 율법의 관계를 강조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다른 서신서에서 바울은 교회의 여러 사역과 성령의 관계를 언급합니다. 이 두 가지, 즉 성령과 율법의 관계 그리고 성령과 여러 사역과의 관계는 현대 선교 운동이 가진 약점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에 뉴비긴은 이 부분을 살펴봅니다.

5-1) No one who knows modern missions can doubt that one of the greatest problems confronting them is legalism, . . . Legalism is a besetting danger for Christians everywhere, but its danger are multiplied when there is an authoritative organization, representing the superior power and prestige of the ruling race, standing alongside the Church to enforce by its many-sided authority the ethical standard accepted in the country from which the missionaries come.

먼저, 형식주의의 문제 입니다. 뉴비긴은 인도와 아프리카의 예를 듭니다. 세례를 주기 위해 경건한 인도인의 상투를 자르게 하는 것, 일부다처제를 가진 아프리카에서 그것을 강제로 바꾸게 하는 것 등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기독교는 하나님의 은혜, 기쁨 대신 일부다처에서 벗어나는 집단으로 인식하게 하는 오류를 범한다는 것입니다. 저의 경험에 의하면 외형적으로 뜨거운 선교사들이 성급하게 이런 문제를 처리하려는 경향을 보입니다. 변화는 순식간에 일어나기도 하지만 니고데모의 경우처럼 서서히 일어나기도 합니다. 따라서 율법 중심으로 접근하기 보다는 성령, 그리스도의 은혜, 그 기쁨 등에 집중함으로써 그 본질 이해로 부터 현지 공동체가 스스로 형식을 변화해 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죠. 선교사가 본국의 윤리를 잣대로 현지 공동체에 강요하는 것은 그 자체의 옳고 그름을 떠나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러고 보면 오늘날 한국 사회가 교회를 항구적인 생명과 항구적인 기쁨을 전해주는 공동체로 보기보다 동성애나 이슬람을 반대하는 집단 정도로 축소해서 볼까 염려됩니다. 선교지의 윤리를 함부로 재단하지 않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게다가 이것의 더 깊은 문제는 현지 공동체가 이런 외적 기준을 눈치보다가 복음의 깊은 이해, 그리고 스스로 말씀을 읽어내는 영적 자립 등을 놓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5-2) No less central to our problem is the question of the Church's ministry. We have noted a startling contrast between the apostles, who apparently ordained the presbyters of the new congregations from among the new converts within a few weeks of their baptism, and modern missionaries who have generally thought that a period of some decades was needed before an ordained native ministry could be produced. Much can be, and had been, written about the reasons for this. There is no doubt that a great deal is due to the fact that the thinking of missionaries about the ministry was (naturally) shaped by the fact that the ministry in the Churches from which they came was a full-time salaried occupation for men of high academic attainments, who were accorded a place high in the scale of social influence.

그 다음은 사역에 대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세례 받은 지 얼마되지 않은 사람들 중에 장로를 세워야 했던 상황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선교사들은 대부분, 교회의 지도자들을 고학력과 전임 사역자들로 세우는 문화에서 왔기 때문에 선교지에서도 그런 기준을 적용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선교지는 초대 교회와 같은 상황인 경우가 있습니다. 아프리카 시에라리온 선교사로 가르치러 갔다가 거기 상황이 초대교회와 더 가깝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오히려 배웠다는 앤드류 월스 교수의 말이 생각납니다. 선교사인 우리는 중립적이지 않습니다.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그리고 어떤 곳에서는 좋은 것이나 다른 곳에서는 나쁜 것일 수 있는 것들로 가득 차 있는 문화의 산물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보는 모든 것이 바른 것이라는 환상을 버려야 합니다. 성경과 성령으로 돌아가야 하는 이유입니다.

6) Having said all this, one must now go on to say something more. There are movements in our time which lay such exclusive emphasis on the work of the Holy Spirit that they appear to be in danger of distorting their witness by failure to recognize that the mission is the mission of the triune God, Father, Son, and Spirit. There can, be a kind of monism of the Spirit which is not the faith of the New Testament.

뉴비긴은 이런 율법과 사역에 대한 대조 혹은 근본 본질로서 성령을 강조한 후에 마지막으로 성령 강조의 왜곡을 경계합니다. 성령을 강조하는 것이 마치 단일신론적 강조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성부만 강조하는 사람들, 성자 예수만 강조하는 사람들처럼, 마찬가지로 성령의 사역만을 마치 단일신론처럼 강조하면 삼위일체 하나님의 선교라는 중심을 놓칠 수 있다는 경계입니다. 그의 마지막 강조는 성령은 성부와 성자의 성령이라는 사실입니다. 성령의 사역은 우리로 하여금 성자와 하나되어 삼위 하나님의 공동체에 참여케 하며, 성자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성부에게 순종했듯이 우리로 하여금 순종케하고 복음의 증인으로 살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7장까지 중심 주제는 모두 마쳤습니다. 이제 수일 내에 마무리인 8장을 올리고 시간을 봐서 전체에 대한 제 반추를 올려 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래 한종석 선생님이 수고해 주신 전문을 올립니다. 천천히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7장 선교 전진의 형태

 

이 글에서 고려하고 있는 질문들 중에 세번째 질문은 선교 활동에 있어서 가장 민감한 사안이다. 이는 선교 운동 자체의 고착화에 관한 질문이고 다른 말로 하면 선교가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사람들 가운데 기독교 공동체가 자발적으로 배가하는데 있어서 복음이 우리에게  기대하는 수준에 이르는데 실패한 것에 관한 질문이다. 또 다른 말로 하면 왜 오늘날의 선교 운동의 자원들이 외부의 도움에 의존하는 교회를 돕는데 대부분 사용되는가 그리고 왜 새로운 전진을 위한 에너지는 조금밖에 남아있지 않는가 하는 질문이다.

 

근대 선교기관들은 대부분 세속적인 힘들의 흐름과 함께 전진했다. 선교기관들은 대부분 상대적으로 부유하고 강한 나라들로부터 정치적 경제적으로 자신들의 나라의 직접적인 영향아래 있던 지역들로 진출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진출하는 곳에 있는 사람들에 비해 월등한 물질적인 자원을 배경으로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그 자원을 현지 대리인을 고용하고, 땅과 건물들을 구입하거나, 혹은 자신들의 고국에 있는 기관들을 본 따서 만든 훈련 및 봉사 기관을 설립하는데 사용했다. 이 현지 기관들은 설립되는 나라보다는 선교 기관의 출신 국가와 경제적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그들을 설립한 선교단체의 자원에 지속적으로 대부분 의존하게 되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새롭게 설립된 기독교 공동체들은 설립한 선교 기관에 일반적으로 시작부터 영적으로 물질적으로 모두 의존하였다는 것이다.

 

서구 국가의 정치적 경제적 힘이 세계의 다른 지역과 비교해서 더 많은 성장을 지속적으로 하는 한, 선교의 전진은 이런 방식으로 함께 나아 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전진이 지속 될수록 필요한 도움의 양도 지속적으로 증가하게 될 것이고 새로운 전진을 위해 사용 가능한 자원의 비율은 감소하게 될 것이다. 선교의 전체적인 움직임은 자신의 성공에 의해서 정체하는 경향을 보이게 될 것이다. 이렇게 단정하는 것에 예외가 있기는 하겠지만 근대 선교 운동의 전체를 고려할 때 이 것은 적절한 일반화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초대교회의 선교 방법과 비교하게 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다. 신약의 증거들을 통해서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보면, 바울과 그의 동료들의 선교 방법은 우리가 지금까지 서술한 방법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명백하게 사도들의 뒤에는 19세기 선교사들이 누렸던 것과 같은 눈에 띄는 경제적 정치적 세력의 지원이 없었다. 또한 그들은 소위 더 문명화 된 사회의 특혜를 가지고 있지도 않았다. 그들은 낙후된 지역으로 가지 않았다. 그들은 고린도나 에베소 혹은 로마의 시민들에게 기술적인 지원을 제공할 위치에 있지도 않았다. 그들이 그 도시들에서 개종자들에게 선교의 대리자가 되도록 급여를 지급했다는 증거도 없고 안디옥 교회에게 새로운 교회를 지원하거나 새로운 지역에서 전도를 하기 위한 추가의 자금을 내도록 요청했다는 것도 찾을 수 없다. 재정의 집행에 대해 우리가 읽는 것은 반대의 방향으로 이루어 졌는데 사도를 지원하거나 (. 빌립보서 4:10) “오래된 교회들의 고통을 구제하기 위해 어린 교회로부터 전달된 선물이었다 (고린도후서 8-9장 등). 어린 교회가 오래된 교회에 재정적으로 의존했다는 흔적은 어디에도 없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근대 선교의 이야기에서 질릴 정도로 들어왔던 종류의 영적 의존에 대한 어떠한 흔적도 없다는 사실이다. 근대의 어린 교회들은 대부분의 경우 처음 설립된 후 수년간 또는 수 십년이 지난 후에도 사역에 관한 지도력을 자신들을 설립한 선교 기관에 의존해 왔다. 우리에게 있는 증거로 추정하면, 사도 바울에 의해서 설립된 교회들은 시작부터 장로나 감독 혹은 집사와 같은 교회의 직무를 스스로 감당했다. 그들은 교회의 삶을 영위하는데 필수적인 것들을 시리아나 유대의 오래된 교회에 어느 순간에도 의존하지 않았다. 사도 바울이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버지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복음으로써 너희를 낳았음이라” (고린도전서 4 15) 라고 표현한 것 같이 어린 교회들이 사도 바울과 밀접한 관계를 가졌던 것은 사실이다. 그는 하나님 안에서 그들의 아버지이고 필요할 때마다 바울은 그들에게 이 사실을 상기시키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아버지의 관계가 안디옥에 있는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자동으로 상속된다는 어떠한 암시도 발견되지 않는다. 사도 바울이 이 문제에 대해서 분명했다는 사실이 오히려 그가 가장 실수가 많고 죄가 많은 교회조차도 완전한 의미에서의 하나님의 교회로 불렀다는 것에 더욱 주목하게 만든다. 그는 그들을 감독자가 관리대상을 부르는 방식으로 부르지 않았다. 그는 그들에게 큰소리를 치며 제어 하고자 하는 어떠한 생각도 거부했다. 그는 그들의 동료였지 관리자가 아니었다 (고린도후서 1:24). 그들은 자신들의 믿음 위에 자유롭게 설 수 있었고 바울은 하나님의 집안의 일원인 성인이 된 아들을 대하듯이 그들에게 말했다.

 

추후의 선교적 전진의 중심이 된 것이 바로 이런 살아있는 교회들이다. 그들은 자신들을 지원하도록안디옥 선교회에 의지하지 않고, 선교의 전진은 외부로부터 오는 더 많은 자원에 의지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들 안에 그리고 그들과 함께 있는 성령 안에 증인됨과 성장을 위해서 꼭 필요한 자원을 가지고 있다. 그들에게는 인간적이 의미에서의보장에 대한 것이나 모교회의 보호를 누릴 수 있으리라는 어떠한 생각도 없다. 반대로 그들이 믿고 세례를 받은 후에 사도 바울이 그들을 떠나는 순간 그들은많은 고난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가야 한다는 경고를 받았다. 그러나 사도들이 각각의 교회에서 금식과 기도를 통해서 장로를 선택하고 자신들이 믿는 주께 그들을 위탁하고 떠나는 바로 그 상황 가운데 이 경고가 주어졌다는 것이 중요하다. 고작 몇 주전에 개종한 사람들에게 신성한 직분을 임명하고, 이교도 사회의 사악함과 부패한 권력에 둘러 쌓여 있으며 가시적인 지원도 없고, 우리가 아는 한 영향력이 있거나 교육을 받은 사람이 거의 없는 이제 막 이교도로부터 개종한 교회들을 직접적으로 감독하지 않고 사도들을 떠나게 할 수 있는 이 특별한 자신감의 비밀이 무엇인지 만약 묻는다면, 오직 하나의 답만이 가능하다. 그 것은 이 새로운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을 받았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의 모든 방법은 (이 단어가 단순한 한 가지 방법을 훨씬 뛰어 넘은 어떤 것을 표현하는데 적합하다면) 이 한 가지 답에 의존한다고 말하는 것은 그다지 지나친 것이 아니다. 이는 하나님의 성령 자신이 선교사이고, 성령의 임재와 축복은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주어지고, 그 임재와 축복은 성령을 소유한 사람들에 의해 인지되고, 성령이 있는 곳에는 사람에게 필요하거나 혹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에서 기대할 수 있는 모든 능력과 지혜와 은혜가 있다는 것이다.

 

많은 학자들이 주장하듯이 우리가 갈라디아서가 사도행전 14장에 나오는 교회들에게 쓰여졌다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사도들로 하여금 적절한 감독 없이 새로운 교회를 떠나는 - 근대 선교사들의 시각으로 보면- 끔찍한 위험을 감당하게 하는 자신감의 근거가 되는 아주 분명한 진술을 갖게 된다. 왜냐하면 갈라디아 교회가 새로운 교회가 실제로 아주 급속히 방황하게 되는 사례이기 때문이다. 이 사례는 사도 바울의 선교 방법에 반대하는 근거의 중요한 조각인 것처럼 보인다. 서신서가 확실하게 이야기하는 사실은 사도들이 새로운 교회를 주께 의탁하고 교회 안에서 선출된 장로들의 책임하에 맡기고 떠날 때 사도들은 그들과의 관계를 끊지 않았다는 것이다. 서신서의 모든 단락은 사도와 갈라디아 그리스도인들 간의 단단한 영적 유대와 사도의 그들에 대한 깊은 사랑 그리고 그들에 대한 책임감을 증거하고 있다. 그럼에도 서신서 전체의 논조는 진리와 거룩함의 근원으로서 성령의 합당함에 대한 자신의 믿음에 사도 바울이 모든 것을 의지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갈라디아 그리스도인들을 올바른 길에서 벗어나게 한 거짓 선지자들은 모든 권위를 자신들이 차지했다. 그들은 아주 대단한 영향력을 끼치며 성경과 전통을 언급했다. 사도 바울은 성경과 전통을 자신의 직접적인 경험을 통해서 해석된 십자가와 연관시키며 다음과 같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질문한다. ‘너희에게 이 것만 물어보겠다. 너희는 성령을 율법의 행위를 통해서 받았느냐 아니면 믿음으로 들음을 통해서 받았느냐?” 그리스도 안에서의 그들의 존재는 성령을 받았느냐의 문제라는 이 확신에 모든 것이 달려있다. 사도 바울이 성경의 문제로 반대자들과 만나러 간 것은 아브라함의 진정한 아들들은 성령을 따라서 난 자들이라는 것을 그들에게 설득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그들에게 진정한 쟁점은 율법의 문제가 아니라 성령과 육신의 문제라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를 지배하는 두개의 힘이 있는데 바로 육신과 성령이다. 성령의 권세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율법이 거스를 수 없는데, 이는 성령이 율법이 명령은 하지만 줄 수 없는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를 그들 안에 만들기 때문이다. 이 것들은 율법에 의해서 만들어 질 수 없다. 이 것들은 성령의 열매이다. 그리고 성령은 십자가의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어진다. 그러므로 바울은 자필 추신에서 갈라디아서를 시작한 그 지점으로 다시 돌아간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이 것이 진리에서 벗어나고 있는 교회들에 대한 바울의 응답인데 그들을 밀접한 교회 제도적 통제를 위한 장치를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고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들의 삶의 원천이 어디 인지와 하나님의 생명이 흐르는 샘에 거하기 위해서 반드시 가야하는 곳이 어디인지를 일깨워주기 위해서이다. 이 서신서에서의 논점은 특별히 성령과 율법과의 관계이다. 다른 서신서 특별히 로마서, 고린도전서와 에베소서는 성령과 교회의 다양한 사역의 관계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 이 두가지는 근대 선교 운동의 약점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데 우리는 각각에 대해서 고찰할 것이다.

 

(A) 근대 선교활동을 아는 어느 누구도 그 것이 직면하는 가장 큰 문제가 형식주의임을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이 형식주의는 새로운 기독교 공동체내에서의 윤리적 기준에 대한 합의를 이와 관련된 사람들의 자유로운 동의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 얻으려는 시도로부터 나온 끔찍한 결과이다. 사람들은 이 주제가 후회와 당혹감으로 가득해서 이 것에 대해 말하는 것을 주저한다. 그 안에 헛웃음이 나올만한 일도 있기는 하다. 경건한 힌두교 신자의 전통적인 상투머리를 세례를 받기 위해서 잘라야 하는지에 대해 남아시아의 선교사와 상류 카스트 개종자 간에 생긴 갈등은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그러나 탄식을 불러일으키는 이야기들이 더 많다. 예를 들면 아프리카의 일부다처제에 의해서 유발된 갈등에 대한 애처로운 이야기가 있는데, 그 곳에서 선교기관들이 일부일처제를 아프리카의 개종자들이 진정한 문제가 무엇인지를 깨닫기도 전에 규정으로 부과하려고 애를 쓴 듯 했다. 그 결과로 일부다처제가 지속적으로 성행하게 되었고, 교회가 가족의 삶 속에서 성령에 의해서 주어진 승리와 기쁨이 있는 곳을 대표하는 곳이 아닌 일부다처제로부터 벗어난 집단을 대표하는 곳으로 보여지게 되었다. 형식주의는 어디에서나 기독교인들을 끊임없이 위협하는 위험이지만, 그 위험은 지배 인종의 우월적인 힘과 특권을 대표하는 권력 기관이 교회와 함께 다양한 측면의 권위를 이용해서 선교사들의 출신 국가에서 받아들여지는 윤리적 기준을 강요하는 일이 일어나는 곳에서 배가된다. 갈라디아서의 열정적인 호소를 통해 변호한 그런 종류의 전도의 자유를 사도바울이 이러한 상황에서도 인정했을 것이라고 사람들은 믿지 못할 것이다. 만약 근대 선교활동들이 그리스도의 삶의 순결함, 은혜, 정직함을 믿은 것 만큼 그대로 행동했다면, 율법을 부과한 결과가 아닌 성령의 임재의 열매만이 있지 않을까? 그리고 이 시점에서의 실패가 근대 선교활동 기간의 대부분의 어린 교회들을 특징짓는 의존하는 태도와 영적 연약함의 원인을 대부분 설명하고 있지는 않은가?

 

(B) 우리의 문제의 또 다른 중심은 교회의 사역에 대한 질문이다. 우리는 세례를 받은 지 몇 주 안된 새로운 개종자들안에서 새로운 교회의 장로들을 안수한 사도들과, 안수 받은 현지 사역자들을 배출하기 까지 일반적으로 수 십년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근대 선교사들간의 놀라운 대비를 발견하게 되었다. 이에 대한 다양한 이유들이 제기될 수 있고 또 제기되어 왔다. 선교사들의 사역에 대한 생각이 자신들의 출신 국가의 교회에서의 사역에 대한 이해로부터 (자연스럽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의심할 여지가 없는데, 고국에서의 이들의 사역은 사회에 높은 영향력을 끼치는 지위에 있는 고학력의 남자들이 담당하는 전임사역이었다. 그러한 사회에서는 목자들이나 어부들 혹은 장막제작자들이 사역을 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역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이교도 사회 안에서 대부분 시골 사람들 가운데 성장해가는 새로운 교회들의 상황에 맞게 수정하지 않은 채 전달하려는 시도는, 한 명이 사십 개 혹은 오십 개의 교회들의 명목적인목사가 되는 것이 일반적인 상황이 되어버리는 것과 같은 불합리한 결과들을 낳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육을 받지 못하고 순박한 남녀를 복음의 교제로 부르는 성령이, 가르침, 설교, 인도, 상담과 운영의 다양한 사역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그들 가운데서 사람들을 또한 일으킨다는 사도적 믿음을 있는 그대로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쉽지 않았다. 따라서, 사도행전에 묘사된 교회와는 달리, 근대의 어린 교회들은 사역에 관련된 지도력을 자신들의 부모 교회들에 수십년 간 의지해 왔다.

 

성령의 임재의 능력을 통해서만이 자신들이 하는 말들이 무엇이라도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을 모르고 복음을 선포하러 가는 선교사는 분명히 없다. 그리고 자신의 교회에서 거룩한 삶이 일어나는 것은 성령의 일함을 통해서 만이 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목사는 당연히 없다. 교회의 선교에서 성령의 역할을 강조함에 있어서 내가 모두가 아는 것을 단순히 반복하고 있는 것 일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신앙이 생동감있게 존재하는 순간에도 우리가 하는 일의 구조와 전통 안에는 이 신앙이 실제적인 영향을 끼치지 못하게 하는 요인들이 있다는 것을 여전히 확신한다. 나는 지금 의도적으로 일인칭으로 시점을 전환하고 있는데 왜냐하면 지금 언급해야 하는 것들이 개인의 간증의 형태가 아니고는 전달이 될 수 있는지 의문이 들기 때문이다.

 

나는 근대선교활동의 전형적인 틀 안에서 선교사로 살고 일해왔는데 기관들을 운영하고, 인도인 일꾼들을 감독하고, 교회를 책임지고 있는 교사들과 다른 이들을 고용하고 관리하는 책임을 맡아왔다. 나는 이 시스템이 실질적으로 정체가 된 것을 목격했다. 급여를 받는 일꾼들의 숫자를 늘릴 수 있는 자금이 없었다. 따라서 새로운 지역들로 나아갈 수 없었다. 교사들을 새로운 지역으로 보낼 수도 없었다. 교사를 자신의 마을로 보내달라고 하는 구도자들은 유감스럽게도 돌아서야만 했다. ‘본국으로부터 새로운 자원이 와야 만이 기존의 선교기관이 새로운 선교기관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인도를 얻자는 식의 어떠한 말도 마찬가지로 진정성이 없는 것은 당연했다. 지상명령에 대한 교회의 순종이 예산의 여유라는 비본질적인 것에 의존해야만 하는 것인지 내 자신에게 물을 수 밖에 없게 되었다.

 

대답은 다양한 경험을 통해서 왔다. 먼저 마을의 교회에서 온 평범한 사내들이 모든 것이 교회와 선교단체와 같은 공식 기관의 지휘하에 있는 상황에서 벗어나 북미나 중동의 군대 생활과 같은 상황에 살면서 자신들의 동지들 사이에 어떻게 적극적인 증인과 전도자가 되었는지를 목격함을 통해서였다. 두 번째는 전임사역자의 지도없이 버려진 마을의 교회들을 다양한 평신도 남녀들이 자발적으로 목사와 전도자로 섬기기 위해서 방문하는 것을 알게 됨을 통해서였다. 그리고 세 번째이면서 가장 결정적으로 복음이 최근에 처음으로 선포된 아주 낙후된 한 지역의 소그룹 운동의 경험을 통해서였다. 마지막의 경험으로부터 넓은 적용이 가능하다고 생각되는 몇가지 명백한 확신이 일어났다.

 

먼저, 결정적인 순간은 전도자와 구도자 간의 첫번째 만남이 이루어지는 그 처음 순간이라는 것이 확실해졌다. 이 지역에서 복음은 새로운 개종자들을 통해서 확산되었다. 교회로부터 대리인이 보내진 적이 없었던 마을로부터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와서 가르침과 세례를 요구하곤 했다. 이러한 요청에 대한 전통적인 응답은 (예산이 허락하면) 급여를 받는 교사를 그들 가운데서 일하면서 세례를 위한 준비를 하도록 보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다른 가능한 응답이 있다는 것이 경험을 통해서 분명해졌다. 그 것은 성령이 그들 가운데서 이미 일하고 이루어 놓은 것이 무엇인가를 찾는 것이다. 그러한 요청 뒤에는 일관되게 그리스도에 대해 더 알고자 하는 소망을 야기시키는 어떠한 경험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것은 꿈이나, 기도에 대한 응답, 신성한 힘에 의한 해방, 전도지나 성경의 일부를 우연히 읽게 되는 것, 혹은 다른 마을에서 온 그리스도인과의 만남같은 것들이다. 이런 것들은 아주 사소한 것처럼 보였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의문을 통해서 성령이 이러한 방법으로 개인의 삶이나 집단으로 하여금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소망을 갖도록 감동시켰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주권자이며 앞서가는 성령의 이러한 감동을 전도자는 자신의 안내자로 받아들이고 인정해야 한다.

 

두 번째로는 전도자는 성령이 감동시킨 사람이 최소한 지금은 그 공동체를 위해서 선택된 사역자임을 반드시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령이 그를 택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왜냐하면 그 집단이 세례를 받기 위해서 온 것은 그의 경험을 통해서 이기 때문이다. 그는 아마도 무지하고 읽고 쓸 줄 모르는 사람일 수 있다. 이 것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성령이 그를 사용하고 또한 지속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막지는 않는다. 그는 전도자가 무시할 수 없는 영적인 권위를 이미 가지고 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는 그 공동체를 책임지도록 선교기관이 보내는대리자에 의해서 대치되기 위해 구석으로 치워질 수 없다. 성령이 복음에 대한 소망을 집단 안에서 일깨우기 해서 사용한 것이 바로 그 사람이고, 반대되는 증거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성령이 그를 그들의 영적인 지도자로 계속해서 사용할 것이라고 당연히 생각해야 한다. 외부로부터 오는 도움은 형제로서의 지원의 형태이어야 하고 성령이 이미 준비한 지도자를 대치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 해당되는 사람이 읽거나 쓰지 못한다면 읽는 것을 배우면 될 것이고 영적으로 깨어있는 사람이 빨리 배우는 것은 경험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세 번째로 그 집단이 우상에 대한 모든 믿음에서 돌아서서 살아있는 하나님에게로 돌아가기로 결정을 했다는 것이 확실해지면 세례가 미뤄져서는 안된다. 일정한 가르침은 분명히 필요하지만 세례가 어떤 성취의 증서가 되는 것처럼 오해되는 방식으로 되어서는 안된다. 이따금 주장되는 것처럼 구도자가 세례를 받는 결정을 하기 전 얼마간의 기간 동안 시험기간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세례가 성령에 의한 거듭남의 예식이라기 보다는 선한 행동의 증서라는 위험한 암시를 주는 것과 같다. 하나님께 돌아가겠다는 분명한 결정이 이루어지면 교회는 예수가 자신에게로 온 죄인들을 즉시 환영한 것처럼 새로운 가족 구성원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복음의 모든 부분이 분명히 말하고 있다.

 

네 번째로 세례 이후에는 가능한 대로 충분한 교육이 있어야 한다. 경험으로 보면 이 시점에 배우고자 하는 진정한 열망이 있다. 교육하는 자의 태도는이제 당신은 아버지의 집에 받아들여 졌습니다. 하나님의 가족이 무엇인지, 우리가 어떻게 그 구성원이 되었는지, 어떻게 운영되는지, 그리고 그 곳에 적합하며 아버지를 기쁘게 하는 행동은 무엇인지 이제 함께 배워봅시다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새로운 집에서의 삶이 전도자에 의해서 전해진 규칙을 따른 결과가 아니고, 성령 자신의 삶에 참여함을 통해서 받을 수 있도록 주어진 새로운 집에서의 삶 그 자체인 성령의 선물이라는 것이 매 순간 가르쳐져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다섯 번째로, 배우는 것과 증인됨은 동반되어야 한다. 새로운 교회는 신앙의 핵심을 배우는 몇 달 동안 동시에 자신들의 이웃에게 증인의 삶을 살아야 한다. 시작부터 이렇게 해야 하는데, 왜냐하면 배우는 것은 단순한 교훈이 아니고 삶 즉 성령의 삶인데 성령의 본성은 교제함이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면, 배우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고 사랑은 사랑함으로써 알 수 있다. 따라서 자신을 위해서 배우는 것과 다른 사람과의 교제는 동행한다. 내가 지금 예를 들고 있는 지역에서 이것의 결과로 교회는 지속적인 외부의 자원에 의존하지 않는 자연 발생적인 성장을 통해서 자신을 배가하기 시작했다. 거의 모두가 이교도인 지역에서 교회는 12년간 13개에서 55개로 늘었다. 성장의 비결은 새로운 그리스도인들의 자발적인 증거였다. 그리고 영적인 지도자가 외부가 아니라 그 곳에 있었기 때문에 새로운 교회는 기독교 선교활동을 불신함으로 그들을 허물려고 하는 단호한 시도들을 견딜 수 있었다. 이러한 종류의 운동의 한가운데에서 그리스도를 위해서 인도를 얻는 것에 대해 진심어린 이야기를 할 수 있다.

 

선교의 전진을 회복하는 비결은 성령의 일함에 대한 신약의 이해를 좀 더 진지하게 받아들이는데 있다는 믿음에 대한 증거로 개인의 경험의 작은 조각이 소개되었다. 물론 여기에 묘사된 상황에서의 많은 특징들 중에 기독교 선교가 다루어야 하는 다른 상황들에서 흔히 발생하는 것이 아닌 것도 있다. 그러나 근대의 선교 방법과 사도 바울의 선교 방법의 엄청난 대비가 사려 깊은 그리스도인의 양심에 제기하는 날카로운 도전을 피하는 것은 어렵다. 선교사들이 서양의 나라들에서 아시아와 아프리카 그리고 세계의 다른 지역으로 가게 된 역사적 환경에 의해서 근대 선교방법들이 아주 자연스럽게 대부분 형성되었다는 것을 의심하기는 어렵다. 선교활동들이 강하고 부유한 교회들에 의해서 이끌리어 상대적으로 낙후되고 무지한 사람들에게로 향하는 일종의 작전이었던 시대의 끝이 다가오고, 월등한 부와 권력 그리고 세속적인 영향의 소유에 기대는 선교 작전들의 형태가 미래에 대한 아무런 희망도 주지 못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신약에 더 충실한 형태로 재생산을 추구하며, 지난 수 십 년간 선교활동들이 해왔던 것 보다 더 선교활동에서의 성령의 우선됨과 주권을 강조하는 운동들에 의해서 전통적인 선교활동의사역이 많은 지역에서 그리고 다양한 방법으로 도전을 받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내가 묘사하려고 한 경험을 공유하는 그 누구도 이 도전의 타당함을 의심할 수 없을 것이다. 신약에의 충실함은 단순히 이론으로서 만이 아닌 실제적인 선교활동에서 성령을 중심의 위치에 두도록 우리를 이끈다. 성령은 여전히 주권적이고 자유로운데 예루살렘의 베드로와 장로들이 성령의 분명한 임재가 할례받지 않은 이방인들에게도 주어졌다는 것에 놀랐듯이 성령에게는 우리를 놀라게하고 우리가 기대하지 못한 일을 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 성령은 선교사가 절대 상상하지 못할 길들을 열고 그가 그렇게 할 때 선교사는 반드시 그 뒤를 따라야 한다. 성령은 선교사라면 선택하지 않을 사람들을 자신의 도구로 선택하는데 이러한 일이 일어날 때 성령의 선택은 존중되어야 한다. 성령은 가장 능력있고 굳건한 기독교의 전략을 위압하는 적대적인 세력들의 면전에서 아주 미약하고 사소한 사람들을 강력한 증인으로 만들어 낸다. 성령은 이 세상의 세력들을 흔들기 위해 정말 작고 우연한 일들과 말들을 사용한다. 성령은 소박하고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을 선한 목자가 부끄러워하지 않을 전도자와 목사로 만든다. 성령은존재하지 않는 것 들을 불러 존재하게 한다.’ 그의 임재를 보지 못할 수도 있다. 전적으로 우리의 힘으로 만든 전략을 통해 선교활동의 일을 조직하는 것도 가능하다. 성령의 일은 성령에 의해서 통찰할 수 있고 이러한 통찰력은 오직 사용할 때 자라난다. 어떤 이는 서서히 성령의 일들을 못보게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가 성령의 임재를 찾는데 익숙해 질 정도로 성숙해지면, 그는 모든 인간적인 요소들이 우리를 대항하여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것처럼 보이는 바로 그 순간에 성령의 임재를 발견하고 성령의 증인이 되어 이 세상의 세력을 그 기초까지 흔들게 된다. 성령은 자신의 승리를기독교 제국의 월등한 자원들에 의존하지 않는다. 성령은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요구하고 그의 뜻대로 사용한다. 만약에 선교기관들이 성령의 선교에 진실로 복종하면 그들은 두려워 할 필요가 없고, 대신 200년 간 주류와 함께 일해왔으나 이제 그 주류를 거슬러 가야하고 세상의 부자와 권세자들로부터 가난하고 무지한 사람들에게 가는 것이 아니고 정확히 반대방향으로 가야한다는 부름을 지금 받고 있다면 기뻐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상황들에서 우리는말하는 것은 네가 아니라 성령이라는 말의 뜻을 새롭게 배우게 될 것이다.

 

이 모든 것에 더해서 여기에 추가로 언급해야 할 것이 있다. 성령의 사역을 특별히 강조 하는 운동들이 우리 시대에 있는데 그들은 선교가 삼위일체 즉 성부, 성자, 성령의 사역임을 인지하는데 실패함으로 말미암아 자신들이 증거하는 것을 왜곡할 위험을 갖고 있는 듯 보인다. 신약의 믿음이 아닌 성령의 일원론 같은 위험도 있을 수도 있다. 선교활동에서의 성령의 중심성에 대한 경험과 믿음에 대한 선교 운동안에서의 회복은 완전한 삼위일체의 신앙의 배경 안에서 이해되지 않으면 왜곡될 것이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성령이다. 성령의 임재의 결정적인 표지는 예수 그리스도가 주라는 고백이다 (고린도전서 12:1-3, cf. 요한일서 4:1-3). 능력안에서의 성령의 도래는 십자가에 못박히고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믿는 것의 열매이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것을 받아서 우리에게 보여준다. 성령은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고 우리는 성령 안에서 세례를 통해서 하나의 몸, 그리스도의 몸 안으로 들어간다. 성령은 인간을 모든 종류의 개인적인 흥망성쇠로 인도하는 도깨비 불이 아니고 인간을 그리스도와 그의 하나된 몸의 교제안에서 결합시키는 이이다. 성령이 자유롭고 주권적이라는 것은 진리이다. 모든 선교사가 알듯이 성령은 교회보다 앞서 가지만 동시에 그가 앞서 가는 것은 바로 교회이다. 사도 요한의 말은 이 점에 관해서 매우 단호하다. ‘이로써 너희가 하나님의 영을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성령은 사람을 예수와 그의 역사적인 삶과 그를 주라고 시인하는 사람들의 교제안에 결합시킨다. 이 것을 잊게 되면, 성령의 이름은 몸의 연합을 파괴하는 태도와 관습 등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사용될 수 있다. 단순한 생동력이 성령의 임재의 표지일 수는 없다. 따라서 역동적으로 성장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은 아니다. 성령의 자유라는 이름 안에서 새로운 분파의 끝없는 증가는 사도 바울이 사랑 안에서 그 몸을 세운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니다 (에베소서 4:16).

 

성령은 성부의 성령이다. 성령은 성부로부터 나온다. 성령에 의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인정할 수 있게 된다. 성령의 특징적인 언어는아바, 아버지이다. 성령을 통해서 우리는 인간역사의 모든 사건을 아버지로서 다스리는 하나님의 통치를 믿을 수 있고 인류의 세속적인 삶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어느 정도 분별할 수 있다. 성령을 통해서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마무리되는 희망 안에서 살고 행동할 수 있는데, 이는 성령 자신이 증표이고 선험이고우리가 그 것을 얻기까지 우리 기업의 보증이기 때문이다 (에베소서 1:14). 성령을 소유한다는 것은 인간의 세속적인 관심사나 정의와 자유를 위한 공동체와 나라들의 투쟁 혹은 예술과 과학 분야에서의 창조적인 작업에서 물러난다는 말이 아니다. 반대로, 성령에 의해서 소유된다는 것은 자유를 기다리는 모든 창조물의 탄식과 고통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함과 동시에 성령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되는 것을 확증함으로 말미암아 그 탄식과 고통이 종착점에 대한 희망으로 가득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령의 교리가 성부의 교리와 분리될 때 젊은이들이 교회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발견하는데 교회에서의 삶이 그들이 살아가면서 결정들을 내려야 하는 세상의 삶과는 무관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활력이 넘치는 급격한 성장으로 시작했던 운동들이 결국은 빈약하게 끝나게 되고 만다.

 

교회의 선교과업에서의 성령의 중심성에 대한 강조를 회복하는 것 그 자체가 그 강조에 의해서 왜곡되고 오도될 수 있기 때문에 이러한 것들을 말하는 것이 필요하다. 성령은 성부와 성자의 성령이다. 성령의 사역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아들됨에 참여할 수 있게 하고 성자의 아버지에 대한 순종 안에서 성자와 하나되게 한다. 그리고 성령만이 우리를 그의 증거에 참여할 수 있게 하고 따라서 그의 증거의 통로가 되게 한다.

  • 이남희 2020.05.21 13:0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성령은 가장 능력있고 굳건한 기독교의 전략을 위압하는 적대적인 세력들의 면전에서 아주 미약하고 사소한 사람들을 강력한 중인으로 만들어 낸다.

    ==> 강력한 "증인"입니까?

    출처: https://www.gmf.or.kr/134 [(사)한국해외선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