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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반공/삼선교: 삼위일체적 선교와 교회

뉴비긴의 "오늘날의 선교를 위한 삼위일체 교리" 7

뉴비긴의 책 '오늘날의 선교를 위한 삼위일체 교리' 7장에 대한 반추입니다. 5장, 6장, 7장은 선교에서 제기되는 3가지의 중요한 문제들을 각각 다루면서 왜 그 중요한 질문들이 삼위일체와 관련 있는지를 다룹니다. 세 가지 문제는 1) 세상의 역사 2) 세속화 3) 자생 공동체 입니다. 매우 중요한 주제라고 생각됩니다. 이번 장은 세번째 문제인 자생 공동체를 다루고 삼위일체의 시각 안에서 그 문제를 바라보게 됩니다. 오래전에 쓴 글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맞이하고 있는 현 상황과도 매우 밀접한 주제라고 생각됩니다. 뉴비긴의 혜안이 빛나고 우리도 삼위일체라는 본질에 기대어 50년 후 혹은 그 후까지도 여전히 유효한 선교를 헤아릴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이해하는 만큼 정리해 보겠습니다.

7. 선교 전진의 형태 (The Pattern of Missionary Advance)

1) the third is. . . the question of the immobilization of the missionary movement itself, the question - in other words - of the failure of missions to produce, in the measure in which the Gospel should lead us to expect, spontaneously multiplying Christian communities among the peoples of Asia and Africa. It is, to put it in yet other words, the question: 'Why are the resources of the missionary movement today so largely exhausted in the support of dependant churches and why is so little energy available for fresh advance?'

세 번째 질문은 선교 현장에서의 아주 실제적인, 그러면서도 아주 다루기 어려운 문제를 이야기 합니다. 인적, 물적 더 나아가 선교학적인 것을 포함한 자원들이 선교의 새로운 돌파를 위해 사용되기 보다 외부의 도움을 의존하는 교회를 위해 왜 더 많이 사용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저 역시 수년 전 위클리프의 아시아-태평양 지역을 섬길 때 직면했던 문제입니다. 그냥 앞에서 해 온대로 이렇게 하는 것이 올바른 선교인가? 라는 질문을 던지며 새로운 돌파를 위해 여러 시도를 했던 경험이 있습니다. 물론 늘 이런 일엔 주위의 반대가 많습니다. 특히 이전 패러다임의 열매를 경험했던 분들 혹은 선교학적으로 그 패러다임에 머물러 있는 분들로 부터 말입니다. 뉴비긴이 수 십년 전에 이미 이런 문제에 도전을 했다는 사실이 위로가 됩니다.

2) These institutions, being related to the economy of the sending country rather than to that of the receiving country, continued to depend heavily upon the resources of the missions that founded them.

서양에 기반을 둔 소위 국제 선교 단체들이 선교지에 세운 일종의 지부들은 선교사들이 리더십을 발휘할 때는 물론이고 심지어 현지인들에 의해 운영될 때라도 그 경제적 연결이 선교지 국가의 경제 체제나 현지 교회들과 연관되어 있기 보다는 선교사를 보낸 국가 및 교회들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효율과 비효율의 문제와 상관 없이 그 기본 구조 자체가 상당한 괴리를 가져 옵니다. 몇 해 전에 아프리카 동부의 한 국가에서 있었던 국제 선교 단체의 한 지부 행사에 참여한 적이 있었는데 그 단체의 현지인 대표가 이제 아프리카 선교는 우리의 힘으로 하겠다고 강조하자 참석자 모두가 큰 박수를 쳤습니다. 하지만 그 현지 단체의 사무실은 아주 커다란 대표 사무실, 일본산 4륜 구동 신차가 몇 대, 그리고 게스트 하우스까지 모두 서구 선교 단체의 시스템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국가의 현지 교회와는 전혀 맞지 않는 모습을 보며 그 현지 대표의 바람과 구호는 외부에서 펀드가 오는 만큼만 가능하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물론 마음이 씁쓸했습니다. 이런 체제가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것은 이미 여러 현장에서 밝혀졌으며 코로나 19 이후 경제 상황은 이런 방향의 수정을 더욱 요구할 것으로 보입니다.

3) More important still is the fact that there is no sign of the kind of spiritual dependence with which we have become distressingly familiar in the story of modern missions. The younger churches of modern times have - in most cases - been dependent for ministerial leadership upon the founding missions for years and even decades after their first establishment. The churches established by St Paul, so far as we can tell from the available evidence, had their own ministry of elders or bishops and deacons, as well as others, from the very beginning.

뉴비긴은 그런 현대 선교의 구조가 적어도 성경에서 발견하는 초대교회의 선교와는 아주 다르다고 지적합니다. 바울과 그 동역자들의 선교는 그런 경제적 지위를 가지고 있지도 않았고 소위 저개발 국가로 간 것도 아니며 선교지에서 선교 대리인을 찾아 급여를 지불하는 따위의 일은 찾아 보기 어렵다고 말합니다. 또 선교지에서 사역을 확장하기 위해 파송 교회에 무엇을 요구하는 예도 찾기 어려우며 오히려 신생 교회로 부터 무엇을 받거나 신생 교회의 구호금을 오히려 반대로 전달하는 사례가 있을 뿐이라고 지적합니다. 더 중요한 문제는 영적인 의존도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문제인데 돈을 비롯한 외적인 것의 의존과 무관하지 않으면서 더 심각한 것은 현지 교회의 자신학화가 없다는 문제입니다. 성경을 스스로 읽기 보다는 외부인의 해석에 의존하는 영적, 선교학적, 신학적 의존이 아주 무섭습니다. 초대교회의 선교에서는 사역이 오히려 스스로 이루어졌다고 뉴비긴은 말합니다. 그러하기에 오늘날 우리가 신학이라고 말하는 것이 헬라의 문화 안에서 스스로 발전할 수 있었겠지요.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신학이 헬라 문화 안에서 이루어진 자신학의 결과였다면 너무 지나친 말일까요?

4) If, with many scholars, we accept the view that the Epistle to the Galatian's was addressed to those same congregations of whom we read in Acts 14, we have an exceptionally clear statement of the grounds of that confidence which enabled the apostles to take what - in the view of modern missionaries - would be regarded as the appalling risk of leaving new congregations without proper supervision. For here is a case in which the new congregations did in fact go astray very quickly. . . . Every paragraph of the letter bears witness to the intense spiritual solidarity of the apostle with these Galatian Christians, his deep love from them and his sense of responsibility for them. Yet the whole argument of the letter shows that he rests everything on his faith in the adequacy of the Spirit as the source of truth and holiness.

뉴비긴은 갈라디아의 예를 듭니다. 갈라디아 교회가 여러 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사도행전 14장에 나오는 공동체가 맞다면, 현대 선교의 시각에서 볼 때 그렇게 어린 교회를 두고 떠나는 것은 무책임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실제로 그 공동체는 곧 많은 문제를 가지게 됩니다. 하지만 서신서를 통해 보면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공동체와 깊은 유대감을 가지고 있으며 그들에 대한 책임감에 기반한 깊은 사랑을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진리와 거룩의 원천이 선교사인 자신이 아니라 성령이라는 사실을 굳게 믿고 있다는 것을 서신서를 통해 보여주고 있습니다.

5) That is the apostle's answer to an erring congregation - not to devise means of bringing them under closer ecclesiastical control, but to remind them of the source of their life as Christians and of the place where they must go if they would be at that spring whence the life of God flows. In this epistle the reference is especially to the relation of the Spirit to the law. In other epistles - notably Romans, I Corinthians and Ephesians, much is said about the relation of the Spirit to the various ministries in the Church. Both of these have great importance for our understanding of the weakness of the modern missionary movement, and we shall look for a moment at each.

선교사인 사도 바울이 자신의 영향 아래 있는 갈라디아 공동체에 문제가 발생한 것에 대해 그 공동체를 통제하기 보다는 중요한 문제를 일깨우는 노력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선교사의 역할에 많은 것을 시사해 줍니다. 선교사의 역할은 물리적으로 현지 공동체를 조정하고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고 근본적인 것을 스스로 바라볼 수 있도록 돕는 역할임을 보여 줍니다. 뉴비긴은 사도 바울이 특별히 갈라디아서에서는 성령과 율법의 관계를 강조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다른 서신서에서 바울은 교회의 여러 사역과 성령의 관계를 언급합니다. 이 두 가지, 즉 성령과 율법의 관계 그리고 성령과 여러 사역과의 관계는 현대 선교 운동이 가진 약점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에 뉴비긴은 이 부분을 살펴봅니다.

5-1) No one who knows modern missions can doubt that one of the greatest problems confronting them is legalism, . . . Legalism is a besetting danger for Christians everywhere, but its danger are multiplied when there is an authoritative organization, representing the superior power and prestige of the ruling race, standing alongside the Church to enforce by its many-sided authority the ethical standard accepted in the country from which the missionaries come.

먼저, 형식주의의 문제 입니다. 뉴비긴은 인도와 아프리카의 예를 듭니다. 세례를 주기 위해 경건한 인도인의 상투를 자르게 하는 것, 일부다처제를 가진 아프리카에서 그것을 강제로 바꾸게 하는 것 등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기독교는 하나님의 은혜, 기쁨 대신 일부다처에서 벗어나는 집단으로 인식하게 하는 오류를 범한다는 것입니다. 저의 경험에 의하면 외형적으로 뜨거운 선교사들이 성급하게 이런 문제를 처리하려는 경향을 보입니다. 변화는 순식간에 일어나기도 하지만 니고데모의 경우처럼 서서히 일어나기도 합니다. 따라서 율법 중심으로 접근하기 보다는 성령, 그리스도의 은혜, 그 기쁨 등에 집중함으로써 그 본질 이해로 부터 현지 공동체가 스스로 형식을 변화해 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죠. 선교사가 본국의 윤리를 잣대로 현지 공동체에 강요하는 것은 그 자체의 옳고 그름을 떠나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러고 보면 오늘날 한국 사회가 교회를 항구적인 생명과 항구적인 기쁨을 전해주는 공동체로 보기보다 동성애나 이슬람을 반대하는 집단 정도로 축소해서 볼까 염려됩니다. 선교지의 윤리를 함부로 재단하지 않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게다가 이것의 더 깊은 문제는 현지 공동체가 이런 외적 기준을 눈치보다가 복음의 깊은 이해, 그리고 스스로 말씀을 읽어내는 영적 자립 등을 놓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5-2) No less central to our problem is the question of the Church's ministry. We have noted a startling contrast between the apostles, who apparently ordained the presbyters of the new congregations from among the new converts within a few weeks of their baptism, and modern missionaries who have generally thought that a period of some decades was needed before an ordained native ministry could be produced. Much can be, and had been, written about the reasons for this. There is no doubt that a great deal is due to the fact that the thinking of missionaries about the ministry was (naturally) shaped by the fact that the ministry in the Churches from which they came was a full-time salaried occupation for men of high academic attainments, who were accorded a place high in the scale of social influence.

그 다음은 사역에 대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세례 받은 지 얼마되지 않은 사람들 중에 장로를 세워야 했던 상황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선교사들은 대부분, 교회의 지도자들을 고학력과 전임 사역자들로 세우는 문화에서 왔기 때문에 선교지에서도 그런 기준을 적용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선교지는 초대 교회와 같은 상황인 경우가 있습니다. 아프리카 시에라리온 선교사로 가르치러 갔다가 거기 상황이 초대교회와 더 가깝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오히려 배웠다는 앤드류 월스 교수의 말이 생각납니다. 선교사인 우리는 중립적이지 않습니다.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그리고 어떤 곳에서는 좋은 것이나 다른 곳에서는 나쁜 것일 수 있는 것들로 가득 차 있는 문화의 산물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보는 모든 것이 바른 것이라는 환상을 버려야 합니다. 성경과 성령으로 돌아가야 하는 이유입니다.

6) Having said all this, one must now go on to say something more. There are movements in our time which lay such exclusive emphasis on the work of the Holy Spirit that they appear to be in danger of distorting their witness by failure to recognize that the mission is the mission of the triune God, Father, Son, and Spirit. There can, be a kind of monism of the Spirit which is not the faith of the New Testament.

뉴비긴은 이런 율법과 사역에 대한 대조 혹은 근본 본질로서 성령을 강조한 후에 마지막으로 성령 강조의 왜곡을 경계합니다. 성령을 강조하는 것이 마치 단일신론적 강조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성부만 강조하는 사람들, 성자 예수만 강조하는 사람들처럼, 마찬가지로 성령의 사역만을 마치 단일신론처럼 강조하면 삼위일체 하나님의 선교라는 중심을 놓칠 수 있다는 경계입니다. 그의 마지막 강조는 성령은 성부와 성자의 성령이라는 사실입니다. 성령의 사역은 우리로 하여금 성자와 하나되어 삼위 하나님의 공동체에 참여케 하며, 성자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성부에게 순종했듯이 우리로 하여금 순종케하고 복음의 증인으로 살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7장까지 중심 주제는 모두 마쳤습니다. 이제 수일 내에 마무리인 8장을 올리고 시간을 봐서 전체에 대한 제 반추를 올려 보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