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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에서

아버지의 후회

품에서는 한달에 한 번 혹은 특별한 사안이 있을 때에 마다 GMF에 속한 가족들 그리고 이 공간을 찾아 주시는 선교 관심자 분들에게 보내는 일종의 대표 서신입니다.

 

곳곳에서 살고 또 사역하시는 사랑하는 선생님들,

 

모란을 잃었지만 희망을 놓지 않고 삼백예순날을 기다리겠다는 그 오월입니다. 아직 긴장을 늦추긴 이르지만 코로나로 잃었던 일상을 점차 회복하는 중에 있습니다. 근 3년만에 저도 얼마전 영국으로 출장을 다녀왔습니다. 

영국 훈련장소

오랫만이어서 그랬을까요? 런던 히드로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메고 있던 배낭을 잃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양 한마리나 드라크마 하나보다 훨씬 큰 걸 잃은 셈입니다. 컴퓨터는 물론 외장 하드디스크, 그리고 싸 짊어지고 다니는 저의 개인적인 모든 것과 모든 자료를 잃었으니까요? 일행을 기다리느라 잠시 옆에 벗어 놓을 걸 모르고 공항 밖으로 나와서야 배낭이 없는 걸 알았습니다. 다시 들어가 보려고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허사였습니다. 결국 숙소에 와서 인터넷으로 공항 분실물 센터에 등록해 놓고 다음 날 멀리 떨어진 훈련 장소로 갔습니다. 일주일의 훈련 기간을 보내며 혹시 모를 소식을 기다렸습니다. 마침 훈련을 인도하는 분의 남편이 영국 분인데 이전에 중요한 직책에 있던 분이라 여기 저기 전화를 돌리고 이메일을 보내 알아봐 주었지만 그런 가방은 없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어쩌면 폭발물로 의심되어 처리하는 곳으로 바로 가서 폐기되었을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눅15:7, 10). 누가 회개하는 걸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양이? 드라크마가? 제 배낭이? 생각해 보니 후회는 저의 몫이었습니다. 왜 그걸 벗어 놓았을까? 뭔 생각을 하느라 그럴 두고 나왔을까? 등등 자책과 후회가 이어졌습니다. 인터넷도 잘 안터지는 시골 구석에서 진행된 6일간의 훈련 기간 동안 비록 조급해 하진 않았지만 생각이 많았습니다. 양과 드라크마와 아들의 입장이 아니라 잃어버린 입장, 즉 목자와 여인과 아버지의 입장이었습니다. 왜 그랬을까? 왜 좀 더 주의를 기울이지 못했을까?

그러다 아버지의 후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돈을 주지 말았어야 했을까? 지금도 어디선가 몸을 망가뜨리고 인생을 허비할 아들을 생각하다가  잠자리를 뒤척거리고 이윽고 대문을 기웃거리며 이런 저런 생각을 하실 아버지의 후회말입니다. 자유를 주되 마지막 어둠으로 빠지기 전, 죄의 자리로 가기 직전까지만 허락했어야 했을까? 자신의 형상으로 우리를 만들며 온전한 자유의지를 주신 그 아버지의 후회말입니다. 

돈을 내어주신 아버지는 그 후회와 안타까움과는 비교할 수 없는 '그 무엇'을 바라기에 내어주신 거겠죠. 자유의지를 주신 하나님은 어둠과 죄인의 자리에 있는 우리에게 그와는 비교할 수 없는 무엇, '그 무엇'을 바라기에 자유를 허락하신 거겠죠. 

아들이 그저 몸만 돌아왔다면, 우리가 그저 교회로만 왔다면 '그 무엇'을 바라시며 그 큰 희생을 치르신 아버지와 하나님은 괜한 일을 하신 셈이 아닐까요? 그러니 아버지와 하나님은 바라시던 '그 무엇'을 기어코 찾고야 마시겠죠? 아버지는 찾은 것으로 보입니다. 아들이 돌아오는데 그치지 않고 달려오신 아버지를, 안고 키스를 퍼 부으시는 아버지를, 다시 아들로 맞아주시고 잔치를 베푸시는 아버지를, 그리고 그 이후 다시 함께 살며 매일 만나는 아버지를, 이전에 알던 그 아버지가 아니라 진작 알았어야 할 그 참 아버지로 새롭게 보게 되었을테니 말입니다. 이제 남은 건 우리, 자신의 형상과 자유의지를 주신 그 목적대로 끝없는 진리를 향해, 끝없는 사랑의 관계를 향해 더 나아가야 할 우리가 남아 있습니다.

 

금요일, 모든 걸 포기하고 훈련을 마치고 공항으로 올라오는 차 안에서 연락을 받았습니다. 배낭을 찾았다고.. 마감시간 20분을 남기고 도착하여 사랑하는 배낭을, 내 소중한 그 자료들을 다시 만났습니다. 이제 하나님께 더욱 깊이 나아가는 일만 남았습니다. 샬롬.

 

2022년 5월 1일

권성찬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