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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에서

루오와 바르트

품에서는 한달에 한 번 혹은 특별한 사안이 있을 때마다 GMF에 속한 가족들 그리고 이 공간을 찾아 주시는 선교 관심자 분들께 보내는 일종의 대표 서신입니다.

 

곳곳에서 살고 또 사역하시는 사랑하는 선생님들,

 

오래 전 아프가니스탄에 살 때 가끔 수도 카불에 올라가면 잡화들을 파는 거리에 들러 혹 그림이 있는지 조심스레 묻곤 했습니다. 당시 탈리반 정권은 일반 학문을 마약이라고 정의하고 특히 인간의 감성과 관련된 음악, 미술 등을 철저히 금지시켰습니다. 해서 그림을 구하기란 별 따기였습니다. 한 가게에서 차를 마시며 주인과 좀 더 가까워 진 후에야 그가 다락에 꽁꽁 숨겨 놓은 작은 소품들을 볼 수 있었고 그렇게 구한 아프간 화가의 그림 몇 점을 지금도 가지고 있습니다. 언젠가 그 니아즈라는 화가가 아프간의 이중섭이 되기를 바라면서...ㅎㅎ. 바쁜 시간을 지내시겠지만 짬을 내어 계신 나라 혹은 지역의 화가들이 그린 그림을 감상하는 여유가 있기를 바래봅니다. 

 

니아즈라는 화가가 1973년 카불에서 그린 그림

 

조르주 루오(1871-1958)는 '침묵'이라는 소설을 쓴 일본의 엔도 슈사쿠 그리고 '동방의 루오'라고 불리는 우리나라의 이중섭 등에게 영향을 미친 프랑스 종교화가입니다. 서울이 아닌 전남 광양(전남도립미술관)에서 작년 10월부터 루오 전시회가 열렸습니다. 시간을 내지 못하고 있다가 전시 마감을 하루 앞둔 1월 28일에 부랴 부랴 방문 했습니다. "인간의 고귀함을 지킨 화가 조르주 루오" 라는 전시회 제목은 루오를 잘 표현하고 있었습니다. 

루오의 그림을 보면서 믿음이 깊었던 그가 하나님의 마음으로 사람이 사는 세상을 자세히 들여다 보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비슷한 시기를 살았던 스위스의 목회자이자 신학자인 칼 바르트(1886 - 1968)가 떠올랐습니다. 두 사람의 분야는 전혀 다르지만 근대 역사에서 가장 큰 고통의 시기인 세계대전을 겪어서인지 성찰이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계대전 직전까지 "선교의 위대한 세기"를 막 지나 온 교회, 그리고 그 선교를 일선에서 담당해 온 선교회들은 자신감에 차 있었습니다. 그런 인간적 자신감 속에는 서구 우월주의가 포함되어 있었고, 해서 "선교"에 대한 열정이 가득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라는 자기 중심, 더 엄밀히는 서구라는 자기 중심에 취하다보니 역설적으로 "선교"가 반드시 지향해야 하는 하나님에 대한 지속적인 묵상은 멈춰 있었고 그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에 대한 지속적인 존중도 멈추게 되었습니다. 오히려 "식민"이라는 날카로운 칼을 선교에 품게 되었습니다. 세계 대전으로 인해 인간적 자신감, 그리고 교회와 선교회 중심성이 깨지고서야 비로서 막혀 있던 '지속적인 성찰'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하나님에 대한 지속적인 성찰은 바르트의 강조점이었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그의 묵상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으로 나타났고 그의 이러한 성찰이 선교계에 영향을 주어 "교회의 활동은 성삼위 하나님의 속성을 반영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라는 용어가 등장했습니다. 동일한 성찰의 지점에서 인간에 대한 지속적인 존중은 루오의 강조점이었습니다. 그는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의 모습, 그들의 시간과 거리 등을 판화로 혹은 그림으로 표현해 내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선교를 정의해 보면 선교란 "성삼위 하나님(본질)과 인간의 구석 구석(상황) 사이를 연결하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적당히 중간 쯤에 자리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본질을 묵상하고 지속적으로 상황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라 여겨집니다. 그러니 선교는 완벽하게 본질이시며 완벽하게 상황(인간)이시면서 그 둘 사이를 완벽하게 연결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지속적으로 따르는 수 밖에 없음이 자명합니다. 선교는 그리스도이고, 그리스도는 참 선교이시기 때문입니다.

 

루오의 그리스도와 빈자들

 

루오는 그림을 통해 하나님을 바르게 안다는 것은 그 분이 관심을 가진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을 표현했습니다. 고통과 외로움과 상실 등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을 그려내면서 하나님의 관심이 어디에 있는지 상기시켰습니다. 가장 하나님다운 것은 세상에서 가장 사람다운 것임을, 완전한 하나님이신 그 분이 바로 가장 완전한 인간이신 그리스도이심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회색으로 그려야 할 것 같은 우울한 상황을 찬란한 색들로 그려낸 것을 보면서 루오는 하나님의 마음과 시각을 가졌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시각에서는 오늘 우리가 겪는 모든 것들이 나름의 "색"을 가졌을 것입니다. 비록 아직 우리에겐 흑백이겠지만... 하나님의 색을 지닌, 그리고 계신 곳을 아름다운 색으로 만들어 가실 여러분이 아름답습니다. 샬롬.

 

2023년 3월 1일

권성찬 드림

 

추신: 오늘이 삼일절입니다. 흑백의 유관순 누나도 누군가 색동저고리를 입혀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