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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에서

같은 공간 다른 시간

품에서는 한달에 한 번 혹은 특별한 사안이 있을 때마다 GMF에 속한 가족들 그리고 이 공간을 찾아 주시는 선교 관심자 분들께 보내는 일종의 대표 서신입니다.

 

곳곳에서 살고 또 사역하시는 사랑하는 선생님들,

 

6월입니다. 평안히 지내고 계시는지요?

얼마전 영국 시골, 숲이 울창한 곳에서 진행되는 선교 훈련 프로그램에 다녀왔습니다. 시차 문제로 평소보다 일찍 잠이 깨어 아주 이른 시간에 숲을 거닐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낮에는 볼 수 없었던 풍경이 펼쳐졌습니다. 우선 풀들이 이슬을 머금어 다른 풀처럼 보였고 낮에 전혀 볼 수 없는 오소리가 나와 있었고 야생 토끼들과 꿩, 그리고 낮에는 주로 물가 근처에서 노는 거위들이 태어난지 얼마 안된 어린 새끼들을 데리고 사람이 다니는 길까지 올라와 열심히 자녀 교육(?)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는다는 말씀이 인간이 잘때도 돌보신다는 인간 중심의 해석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게 아니라 같은 공간을 다른 시간에 다른 피조물들이 사용하고 있으니 계속 돌보시는가 보다 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오른쪽에 보이는 이슬을 머금은 민들레 갓털은 새벽에나 볼 수 있는 그림입니다. 태어나 처음 봤네요.

 

30년전 싱가폴에서 선교 훈련을 받을 때 숙소 근처의 공원에 대한 관찰보고서를 쓰는 과제가 있었습니다. 한 공원을 여러 다른 시간에 방문하여 관찰하는 일이었습니다. 아침 이른 시간에는 주로 중국인들이 단체로 모여 천천히 움직이는 타이치 운동을 하였습니다. 오전 10시쯤 방문하면 필리핀이나 인도네시아에서 온 가정부들이 주인집 어린 아이를 유모차에 태우고 거기 모여 이야기를 나눕니다. 그들에게 공원은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는 일종의 바벨론 강가였습니다. 이른 오후에는 어린이들이, 조금 더 지나면 청소년들이 공원을 사용합니다. 저녁 후에 방문해 보면 다시 타이치 운동을 하는 그룹이 모입니다. 같은 공간을 각기 다른 그룹이 다른 시간에 각자의 목적을 가지고 사용하는 셈입니다. 영화 기생충을 생각나게 합니다. 

 

물소리로 함께 숲으로 가요.

 

우리 각자에겐 주로 움직이는 시간과 공간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반복되면 우리의 눈은 일정한 틀 안에서 만들어진 안경을 쓰게 됩니다. 생각이 그 틀 안에서 굳어지게 되고 다시 그것은 곧 우리의 패러다임이 됩니다. 그런 틀 혹은 경계를 넘어가야 우리가 늘 반복해 살아가는 공간과 시간만이 유일한 세상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그러니 우리의 성찰 건강을 위해 가끔은 우리가 자주 다니지 않는 시간 그리고 가보지 않은 공간에 다녀 보면 어떨까요? 심지어 우리가 살고 있는 동네도 이른 새벽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다르고 한밤중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다릅니다. 그리고 그 모두가 우리의 이웃이고 우리가 만나야 할 사람들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렇게 내 경계를 넘어서 볼 때 다른 입장에 대한 이해가 생깁니다. 비록 우리가 다른 사람이 될 수 없고 선교사로서 현지인이 될 수 없지만 이런 경계를 넘는 경험들이 현지인의 입장에 대한 이해를 도울 수 있다고 믿습니다. 늘 보수적으로 내가 정한 시간, 내가 정한 공간만을 살 때 규칙적이라는 좋은 습관이 생길지 모르나 고정틀이라는 부작용이 생기기 시작하고 타인 혹은 다른 세계에 대한 이해는 현저히 떨어지는 '꼴통보수'가 될 위험이 높습니다. 안 가본 곳, 안 만나본 사람들을 한번쯤 만나보는 그런 계절이 되면 좋을 것 같습니다. 데이비드 보쉬의 책에 나오는 글로 인사를 대신합니다. '판에 박힌 삶을 주의하세요. 그건 사실 무덤이나 마찬가지입니다!"(Beware of ruts. They are, in fact, shallow graves!). 샬롬.

 

2023년 6월 1일

권성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