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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에서

과일장수 강남이

품에서는 한달에 한 번 혹은 특별한 사안이 있을 때마다 GMF에 속한 가족들 그리고 이 공간을 찾아 주시는 선교 관심자 분들께 보내는 일종의 대표 서신입니다.

 

곳곳에서 살고 또 사역하시는 사랑하는 선생님들,

 

9월입니다. 평안하신지요? 더위의 기운이 좀 가신 듯 합니다. 저는 영국에 출장을 와 있는데 기온이 아침 저녁에는 11도까지 내려갑니다. 환절기에 여러분도 계신 곳에서 강건하시기를 빕니다.

제가 살고 있는 쌍문동은 드리마 "응답하라 1988"(응팔)의 무대입니다. 드라마에 나오는 쌍문약국은 제 모교회의 권사님이 운영하시고 감포면옥은 87년 저희 부부 결혼식 피로연 장소였습니다. 브라질 떡볶이는 청년부 예배 마치고 가는 장소였고요. 제작진이 나름 잘 준비했다고 생각했습니다.

대개 큰 찻길로 동네가 나누어지기에 지하철 4호선 쌍문역의 1번 2번 출구로 나오면 창동이고 3번과 4번 출구로 나오면 쌍문동입니다. 창동 방향인 쌍문역 2번 출구로 나오자 마자 바로 길가에 과일을 파는 노점이 하나 있는데, 그 곳에서 지난 수십년간 과일을 파는 주인 아저씨의 이름이 "강남"입니다. 

 

쌍문동 2번 출구 과일가게

 

강남이는 창동국민(초등)학교 6학년 때 저와 같은 반 친구입니다.

저는 시골살다가 원래 고향인 서울로 6학년 때 전학을 와서 창동국민학교 6학년 6반에 배정되었습니다. 앞에 자리가 없어 키가 작음에도 불구하고 반에서 가장 키가 커서 맨 뒤에 앉아 있던 강남이의 짝이 되어 옆에 앉았습니다. 당시 공책 한권이 10원이었는데 강남이는 종이 질이 안 좋은 5원짜리 공책을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엄마에게 10원 받아서 5원짜리 사고 5원은 뭐 사먹었니?"라고 제 수준에서 물었는데 "아니, 5원짜리로 두권 샀어." 하면서 "한권은 너 전학 선물로 줄께."라면서 공책을 내밀었습니다. 6학년 2학기에 낯선 곳으로 전학 온 내게 처음 마음 문을 열어 준 친구가 강남이 였습니다. 졸업 후 다른 중학교로 진학하고 오랫동안 소식을 모르고 지내다가 어른이 된 어느날 지금의 자리에 과일 노점상을 하는 강남이를 보게 되었고 선교사인 제가 가끔 귀국하여 모교회를 가게 되면 지나다 안부를 묻곤 했습니다. 요즘은 전보다 자주 그곳을 지나면서 더욱 반갑게 인사하고 과일 한 봉지를 사들고 옵니다. 

저는 선교사로 이곳 저곳을 다니다 이제 다시 국내로 와서 동네로 왔지만 강남이는 계속 이곳을 지키며(?) 살았기에 강남이를 보면 50년 전인 1973년부터의 옛 기억이 올라옵니다. 지금은 수천명이 모이는 제 모교회 터는 당시 블록을 찍어 말리는 공터였고 그 앞에 딱 9채의 집이 있었는데 거기 사시던 외삼촌 집으로 제가 오게 되어 거기서 학교를 다녔습니다. 요즘처럼 비가 많이 올 때면 학교가는 논밭 길이 물에 넘쳐 큰 길로 돌아서 갔던 기억, 지금은 복개가 되어 상상이 불가능하지만 당시는 제가 살고 있는 숭미초등학교 언덕부터 저희 교회 앞을 지나 중랑천에 이르기까지 개천이 있어 개천 양쪽의 좁은 길로 걸어다녔던 기억 등등.

말하자면 강남이는 제게 박물관과 같은 역할을 해 줍니다. 가끔 지나다가 강남이를 만날 때 마다 오래된 기억과 추억이라는 박물관의 물건을 꺼내 보는 셈입니다. 비록 그 때의 모습을 보여주는 지역 박물관은 없지만 제겐 강남이가 바로 박물관의 역할을 해 주는 '박물인'입니다. 

 

과일장수 강남이

 

그러고 보니 아프간에서 사역할 당시 마을에서 저를 보던(남자 아이들) 그리고 숨어서 보던(여자 아이들) 그 아이들의 눈이 생각납니다. 그 아이들에게 저는 코리아이(한국인) 혹은 허리지(외국인) 혹은 이사이(기독교인)에 대한 추억을 주는 '박물인' 이었다고 생각이 됩니다. 지금은 장성했을 그 아이들이 문득 그 때 자기들의 마을에 왔던 그 '아담 칸'을 기억하며 '한국인은 그랬었지." 혹은 '외국인은 그랬었지' 혹은 더 나아가 '기독교인은 그랬었지'라고 기억해 준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오늘 계신 곳을 살아가는 모든 선생님들은 누군가에게 '박물인'으로 살고 있는 셈입니다. 특히 지금 만나는 어른말고 주위에서 자신의 눈을 통해 느끼고 있을 그 다음 세대에게 어떤 기억과 추억을 남기게 될지... 그 아이들에게 '과일장수 강남이'처럼 좋은 '박물인'들이 되기시를 바랍니다. 샬롬.

 

2023년 9월 1일

권성찬 드림

 

추신: 사실 튀르키예 출장을 막 다녀 온 터라 그 곳에 대해 쓰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너무 큰 고기쌈을 입에 넣은 듯, 아직 씹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튀르키예는 참 크고 깊은 곳이구나 라고 생각했습니다. 반추가 가능해지는 언젠가 써 봐야지 하고 미뤄둡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