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에서는 한달에 한 번 혹은 특별한 사안이 있을 때마다 GMF에 속한 가족들 그리고 이 공간을 찾아 주시는 선교 관심자 분들께 보내는 일종의 대표 서신입니다.
곳곳에서 살고 또 사역하시는 사랑하는 선생님들,
작가 한강이 노벨 문학상을 받았습니다. 그날을 한강절, 아니 하루는 너무 짧으니 한강계절을 만들어야 한다는 여류 작가들의 웃음 소리가 들려옵니다. 아시아, 여성, 그리고 상대적으로 젊음이라는 삼중의 장벽을 너머 수상자를 정했다는 스웨덴 한림원의 혁신이 어떤 의미인지 곱씹어봐야 하겠습니다. 혁신은 늘 세상이 한발 앞서갑니다.
작가의 이름을 진작에 알았지만 그녀의 소설을 읽지 못했습니다. 주문한 책은 밀려서 언제 올지 모르고 오는대로 부리나케 그녀의 뒤를 쫒아보려 합니다. 초판을 가지고 있다는 지인 목사님의 내공도 부럽고 초판도 탐납니다.
이번 수상과 관련하여 여러 인터뷰와 기사들을 접하면서 ‘작가’와 ‘번역가’라는 의미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됩니다.
어떤 칼럼에서 이런 글을 보았습니다. “역사는 역사가에 의해 정리되지 않는다. 작가를 기다려야 한다.”
그러고 보니 90년대 탈리반 정권의 아프간에 살지 않았던 할레드 호세이니가 그 안에서 탈리반 정권의 6년을 꼬박 살아낸 저보다 더 깊이 그 시대의 아픈 삶을 ‘연을 쫒는 아이” 등을 통해 표현했고, 80학번인 저보다도 작가 한강이 그 해 있었던 일을 깊이 바라봅니다. 너무 당연한 소리죠.
되돌아보면 선교사로서의 저의 삶은 어설픈 역사가의 길이었다고 반성하게 됩니다. 무엇을 사실대로 묘사해야 한다는 강박, 실제로는 해석된 사실이면서도 그것이 단 하나의 진리인 것처럼 생각한 외부자의 시각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 때 선교지에서 작가적인 시각과 삶이었다면 어땠을까? 생존해야 하는 치열한 상황이었지만 성찰의 공간을 만들어 어설픈 작가라도 되었다면 어땠을까 생각해 봅니다. 작가가 되는 일은 그 안에서 살아야만, 즉 현지인이어야만 되는 것이 아니라는 면에서 외부자나 내부자 누구든 작가적 시선을 가질 수 있다는 희망을 품게 됩니다.
이번 수상과 관련해서 생각한 두번째 주제는 ‘번역가’입니다. ‘소년이 온다’의 영어 책 제목은 ‘Human Acts’라고 합니다. 전혀 연관성이 없습니다. 서구권에서 원제를 그대로 직역하면 ‘성적인 의미’나 ‘종교적 의미’가 강하게 채색되기에 부득이 소설의 다른 부분에서 제목을 가져왔다고 합니다. 이번 수상에 번역가 김보라(데보라 스미스)의 역할이 컸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입니다. 그녀의 번역이 직역이 아니어서 불편해하는 사람들도 많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직역하면 원작자의 기분은 좋을지 몰라도 번역본을 받은 사람들에게 의미가 전달되지 못하는 어려움이 생기게 됩니다.
번역도 창작이라는 말을 수용한다면 아람어 가르침을 제자들에게 그대로 받아 적도록 하지 않으신 예수님, 그리고 복음의 기록을 아람어가 아닌 헬라어로 기록함으로 애초부터 번역을 수용한 기독교의 정신은 본래의 의미(본질)를 보존하기 위해 창작을 수용하는 정신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렇다면 선교사는 복음을 번역하는 사람이라는 기존의 관점을 재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삶으로 복음을 살아내야 한다는 면은 그대로 간직한다 손 치더라도 어떤 면에서 선교사란 번역하는 사람이기 보다는 번역가를 길러내는 일, 아니 길러낸다는 말이 너무 관여하는 것처럼 보인다면 번역가가 생겨나도록 풍토를 조성하는 사람 정도로 자리매김을 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사역지에서 많은 번역가들이 일어나기를 소망합니다.
이제 작가의 소설을 하나씩 음미하며 ‘작가적 시각’을 배우고, 기회가 된다면 한권의 원작과 번역본을 같이 잡아 ‘번역가'가 얼마나 창의적인지 헤아려보고 싶습니다. 부디 계신 곳에서 가끔은 작가가 되시고 번역가의 환경을 만드실 수 있기를. 샬롬.
2024년 11월 1일
권성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