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에서는 한달에 한 번 혹은 특별한 사안이 있을 때마다 GMF에 속한 가족들 그리고 이 공간을 찾아 주시는 선교 관심자 분들께 보내는 일종의 대표 서신입니다.
곳곳에서 살고 또 사역하시는 사랑하는 선생님들,
안녕하세요? 그렇게 추웠던 시간이 지나고 이제는 마치 봄의 한 가운데 있는 듯 따뜻합니다. 얼었던 모든 영역이 이렇게 풀려지기를 소원합니다. 대한민국만세입니다.
며칠 전 어느 모임에서 기독교 철학자 한 분을 초대하여 강의를 듣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이번 강의는 쌩텍쥐페리의 '어린왕자'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오래전에 읽었던 책을 이번 강의를 듣기 위해 다시 읽자 새롭게 보이는 것들이 많았습니다. 같은 책이 나이에 따라 다르게 읽히는 당연한 경험이었습니다.
특히 책의 핵심 주제 중 하나인 '길들임'의 의미를 새롭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저자가 가축을 길들인다는 뜻의 프랑스어 중에서 구조의 느낌이 강 '도메스티케' 대신 사적인 관계를 강조하는 '아프리브아제'를 사용했다니 우리 말로 단순히 '길들이다'로 번역한 것이 옳은지는 모르겠으나 영어로는 'tame'이라고 했으니 달리 표현하기도 어려울 것 같습니다.
전에 박해영 작가의 '나의 해방일지'에서 '사랑'이라는 단어 대신 '추앙'이라는 단어를 꺼내든 것에 대해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나는 당신을 추앙합니다'.
'사랑합니다'라는 말로는 담아내기 어려운 의미를 표현하기 위해 새로운 단어를 꺼내들고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을 취함으로서 '조건없이 사랑하는 관계'를 환기시킨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어린왕자에 나오는 '나를 길들여줘!'라는 말도 다소 어색한 표현을 가지고 오늘날 사용하는 '사랑'이라는 단어가 담아내지 못하는 깊이와 의미를 표현했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경우 수식어를 사용하여 새로운 의미를 담고자 합니다. '진정한 사랑', '진짜 참기름, '선교적 교회', '선교적 성경읽기' 등등. 하지만 그렇게 수식어로도 만족할 수 없다면 본래의 의미, 본질을 찾기 위해 아예 새로운 단어로 대체할 수도 있습니다. '추앙'과 '길들이다'는 후자의 경우입니다.
모르죠. 앞으로 진정한 사랑대신 '추앙', '길들임'을 사용했듯이 '진짜 참기름'을 '갸름'이라고 부르는 날이 올지도, 동일하게 선교적 본질을 회복한 교회는 '갸회'라고 부를지도.. 그냥 상상입니다.
따라서 단어에는 각주가 필요합니다. 동일한 단어도 서로 다른 이해와 의미로 사용하면 소통이 어려우니까요.
과업 중심의 선교가 이미 상당히 우리 안에 굳어져 있기에 선교라는 단어도 '샨교'로 바꾸고 싶은 심정입니다. 선교는 중단하고 대신 '샨교하자'고 말입니다. 그러면 묻겠죠. 샨교가 뭐냐고. 그렇게 질문할 때, 이때다 싶게 진정한 의미의 선교, 성경이 말하는 선교를 설명할 기회가 주어질 듯 합니다.

길들인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묻는 어린왕자에게 여우는 말합니다. 말하자면 '길들이다'라는 단어에 각주를 다는 셈입니다.
"그건 '관계를 맺는다'는 뜻이야."
"네가 나를 길들인다면 우리는 서로를 필요로 하게 되는 거야. 너는 내게 이 세상에서 하나 밖에 없는 존재가 되는 거야. 난 네게 이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존재가 될 거고..."
"참을성이 많아야 해...우선 내게서 좀 떨어져서 이렇게 풀밭에 앉아 있어... 넌 날마다 조금씩 더 가까이 다가앉게 될 거야..."
"같은 시간에 왔으면 더 좋았을걸... 그래서 의식이 필요한거야...어떤 날이 다른 날들과, 어떤 시간이 다른 시간들과 다르게 만드는 게 의식이야."
"네 장미꽃이 그토록 소중하게 된 것은 네가 네 장미꽃을 위해서 들인 시간때문이야"
"네가 길들인 것에 대해서 너는 영원히 책임이 있는 거야."
그러니 '길들이다'의 각주는 관계를 맺는것, 서로를 필요로 하는 것, 하나 밖에 없는 존재가 되는 것, 참을성을 가지고 거리를 유지하며 천천히 다가가는 것, 일정한 의식(rite)이 필요한 것, 시간을 들이는 것, 영원히 책임지는 것 등입니다. 이러한 풍성한 각주를 기억하지 않고 그냥 '길들이다'를 사용하면 점차 '길들이다'는 소유하는 것, 무례하게 구는 것, 복종시키는 것, 가스라이팅 등으로 왜곡되어 결국 우리는 또 다른 단어를 찾아 나서게 될 겁니다.
선교지의 새로운 문화를 맞이하는 우리는 그렇게 그 문화와 언어와 그 속에 있는 사람들과 서로 길들여져 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피조물인 우리와 이렇게 길들임의 관계를 시작하셨고 세상을 향한 그 길들임의 여정을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계신 곳에서 섬기는 사람들과 깊이 길들여져 가며 그들로 물들어져 가시기를 빕니다. 샬롬.
2026년 3월 1일
권성찬 드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