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선반공/삼선교: 삼위일체적 선교와 교회

뉴비긴의 "오늘날의 선교를 위한 삼위일체 교리" 5

뉴비긴의 책 '오늘날의 선교를 위한 삼위일체 교리' 5장에 대한 반추입니다. 5장, 6장, 7장은 선교에서 제기되는 3가지의 중요한 문제들을 각각 다루면서 왜 그 중요한 질문들이 삼위일체와 관련있는지를 다룹니다. 세 가지 문제는 1) 세상의 역사 2) 세속화 3) 자생 공동체 입니다. 매우 중요한 주제라고 생각됩니다. 앞으로 이어지는 세 장을 통해 선교의 중요한 문제들을 이해하고 또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답이 삼위일체의 이해에 있음을 깨닫게 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 작은 책자 안에서 5장은 가장 긴 장입니다. 길기도 하지만 좀 어렵기도 합니다. 제가 이해하는 만큼 정리해 보겠습니다. 

 

5. 선교활동과 인류 역사의 모습 (Missions and the Shape of World History)

1) The first concerns the relation between the work of missions and what we expect to happen in history. . . we have seen that in the recent past it has been answered in two principal ways.

첫 질문은 아주 근본적인 질문입니다. 선교 사역을 감당하는 우리는 세상에서 진행되는 역사를 어떤 관점으로 이해하고 있나요? 이것은 세상에 대한 우리의 이해, 좀 더 근본적으로는 우리가 이해하는 복음에 기초하여 형성된 우리의 세계관과 관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뉴비긴은 이 주제와 관련하여 논의되는 2가지의 상반된 시각을 먼저 소개합니다.

2) On the one hand missions have been seen as forwarding and completing the natural evolution of human society. The "Christianization of the world' has been understood as something substantially continuous with the general progress of human development.

그 중 하나의 시각은 세상과 교회의 관계 가운데 '세상'을 강조하는 시각입니다. 이 견해에서 선교란 인간의 역사가 자연적으로 발전해 나가는 것과 궤적을 같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교 논의에서 그 순서를 하나님>세상>교회 으로 주장하여 교회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하나님께서 하시는 하나님의 선교로 알고 그것에 잘 참여하면 되는 것으로 인식하는 견해와 일맥상통하는 주장입니다. 그러고 보면 문화와 복음의 관계에 대한 견해에서도 문화를 강조하는 쪽과 복음을 강조하는 쪽의 견해가 다르듯 우리들은 늘 한쪽으로 고정해야 마음이 편하고 잠이 오는 그런 특성을 가지고 있는 듯 합니다.   

3) On the other hand, and in sharp reaction to this, it has been insisted that the Gospel is radically other than all natural human religion and culture and that mission of the Church is therefore something other than a mere reinforcement or prolongation of the natural course of human progress.

이미 예상하시겠지만 그 반대의 시각은 세상과의 분리적인 차원에서 선교를 이해하는 시각입니다. 물론 앞의 견해에 대한 반작용으로 이런 견해에 더욱 힘을 주게 되었겠지요.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 모든 일에 있어 무엇에 대한 반작용으로 주장되는 견해들은 늘 조심하고 한번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뉴비긴이 이야기 하듯 이 견해에서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그저 배경일 뿐 선교는 오직 교회의 발전만 신경쓰면 된다는 주장을 하는 견해 입니다. 사회참여냐 복음전도냐를 가지고 논쟁하듯, 우리는 왜 늘 표면적 논쟁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사회참여가 진정한 복음적 사회참여인지? 소위 복음전도가 진정성을 내포한 복음적 전도인지? 를 깊이 성찰하지 않는 그런 논쟁에 대해 주님은 '둘 다 아니다' 라고 그 표면에 치우친 우리를 책망하실 것 같습니다.

4) We are now in a situation where it becomes urgently necessary to ask: What is the relation between what God has done once for all in Christ and is continuing to do through the witness of the Church, and the events of world history as a whole? Does the trinitarian starting point help us to face this decisive question?

위의 두 가지 견해가 각각 한쪽으로 치우쳐 있기 때문에 뉴비긴은 이 긴급하고 중요한 질문을 던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단번에 이루신 그 일 그리고 교회의 증거를 통해 지금도 계속하고 계신 그 일과 세상의 역사 전체는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 이 중요한 질문에 삼위일체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도움되는가? 라는 질문입니다. 그가 뭐라고 하는지 살펴 보겠습니다.

5) The Gospel records, and the New Testament as a whole, show us Jesus as the Son of the Father, as the 'Beloved Son', as the 'Only begotten from the Father'. It is impossible to think of him or to speak of him truly apart from the Father. He reveals God by showing us the love and obediance of the Son to the Father. No account of the Gospel which does not put this in the centre can be accepted.

우선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확인하면서 논의를 시작합니다. 복음서나 신약 전체는 예수 그리스도는 성부의 아들, 사랑하는 아들, 아버지로 부터 독생하신 분 등 성부와의 관계 안에서 그 분을 소개합니다. 그리고 성자는 아버지에 대한 사랑과 순종을 통해 그 분을 드러냅니다. 이것을 중심에 두지 않는 복음은 복음이 아닌 것이죠. 사도 요한이 자신의 복음서를 이 관계로 시작하는 것이 이해되는 듯 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예수님은 결코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오신 분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오셨음을 여러차례 말씀하셨습니다.

6) Nevertheless his coming is the decisive event for mankind - for all men and for all history. In him the Kingdom of God has come, but it is hidden. His coming therefore means both salvation and judgment for the world, because by their acceptance or rejection of him men are judged. . . He sends them (his disciples) out as witness to men of the fact that the decisive event of all history has arrived and is impending. . . The Father alone is in control. Yet the coming of the Son is the event by which the Father has chosen to bring all things to the point of decision, to the issue of judgment and salvation. And this event is - so to say - extended in the mission of the disciples sent out before the crucifixion and of the apostles sent out after the resurrection.

성자와 그가 보내신 제자들이 자신들의 운동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인간의 역사에 결정적인 사건입니다. 그 이유는 바로 그 분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은 중립이 없는 구원과 동시에 심판이 세상에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성부께서 모든 것을 다스리시지만 성자가 오신 것은 바로 그 성부께서 구원과 심판이라는 결정적인 지점으로 모든 것을 가져다 놓은 것입니다. 선교는 바로 그 성부께서 성자를 통해 진행하셨고 진행하시는 인류 역사의 최종적인 일의 연장선 상에 있는 것입니다.

7) But this is not otherwise than by the presence of God's Spirit himself. . . It is he who speaks when the persecuted disciples are on trial. It is he who convicts the world of sin, righteousness and judgment - that world which hates and rejects Jesus. It is he who is, properly speaking, the missionary. . . Thus the Christian mission is the clue to world history, not in the sense that it is the 'winning side' in the battle with the other forces of human history, but in the sense that it is the point at which the meaning of history is understood and at which men are required to make the final decisions about that meaning. It is - so to say - not the motor but the blade, not the driving force but the cutting edge. 

뉴비긴은 성부와 성자 그리고 그 연장선 상에서 제자들의 관계를 설명한 후에 연결하여 성령의 관계를 설명합니다. 이 모든 것은 성령의 임재 가운데 이루어 진다는 거죠. 예수의 공생애 사역의 시작에도 성령의 임재가 있었고 증인으로서 이 선교를 이어가는 제자들에게도 성령이 임재하여 진행됩니다. 제자들의 입에 할 말을 두시는 것도 성령이고 세상에 죄와 의와 심판을 정하시는 것도 성령의 사역입니다. 그러므로 사실 선교사는 성령이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는 선교는 역사의 실마리를 제공하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인간 역사의 다른 세력과 대조하여 이기는 편이라는 뜻이 아니라 역사의 의미가 이해되는 지점 그리고  그 의미를 향해 사람들에게 마지막 결정을 요구하는 지점이라는 면에서 실마리를 제공하는 겁니다. 쉽게 말하면 동력을 제공하는 모터 자체가 아니고 그 모터에 붙어 있는 날끝과 같은 역할입니다. 얼마나 적절한 비유인가요. 보이는 것은 날끝이 하는 것 같지만 사실 모터에 붙어 있지 않다면 연필 한자루 제대로 깍기나 하겠습니까? 그나마 날이 서 있을 때나 말이죠. 날도 잘 갈아야 하지만 궁극적인 것은 모터에 붙어 있어야 합니다. 물론 저는 이런 기계 비유보다는 유기적인 면이 포함된 예수님의 포도나무와 가지 비유를 더 좋아합니다^^

8)  The most sustained and explicit New Testament statements of the relation between the mission of the Church and events of world history are to be found in the apocalyptic sections of the first three Gospels and in the discourses at the end of the fourth Gospel. In both the synoptic and Johannine discourses certain notes are repeated - hatred of the world, the tribulation of the Church in the world, the presence of the Spirit who answers the accusations of the world, the victory of Christ.

선교와 세상의 역사의 관계를 잘 드러내는 신약의 본문들은 공관복음의 묵시 부분과 요한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마지막 강화입니다. 여기에 반복적으로 나오는 것이, 제자 공동체에 대한 세상의 증오, 세상에서 당하는 교회의 고난, 그런 세상의 비난에 대한 성령의 응답,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 등 입니다. 이제 이것을 다루기 위해 뉴비긴은 마가복음 13장을 들어 설명을 시작합니다.

8-1) 'Many will come in my name, saying, "I am he!" and they will lead many astray.'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내가 그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 (막13:6)

여기는 너무 길어서 영어 인용을 생략했습니다. 뉴비긴의 주장은 위의 성경 구절이 의미하는 전제에 대한 설명입니다. 다시 말해서 많은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온다는 것은 기독교의 메시지가 어떤 형태로든 전해졌음을 의미합니다. 기독교의 세계관과 전혀 다른 형태의 세계관이 우리에게 도전이 되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진정한 메시야의 전파되는 동시에 세상에 가짜가 나오는 현상이 동반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온 세상에 복음이 전해지는 것만을 선교의 과업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세상은 그 메시지를 왜곡하여 기독교와 유사 형태이면서 적 그리스도적인 현상이 난무하게 됩니다. 뉴비긴이 이런 이야기까진 하지 않았지만 선교가 어떤 방식으로 되는냐가 중요한 이유는 과업으로 이해되는 선교는 이런 왜곡을 낳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긴급하나 정확한 순도를 유지하는 것이 정말로 중요합니다.

8-2)  'But take heed to yourselves; for they will deliver you up to councils; and you will be beaten in synagogues; and you will stand before governors and kings for my sake, to bear testimony before them. And the gospel must first be preached to all nations.' The task of the Church in relation to the events of world history is not to be the governors and and controller of them, but to be the suffering servant and witness of the Lord, manifesting in its witness the true meaning of these events.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사람들이 너희를 공회에 넘겨 주겠고 너희를 회당에서 매질하겠으며 나로 말미암아 너희가 권력자들과 임금들 앞에 서리니 이는 그들에게 증거가 되려 함이라 또 복음이 먼저 만국에 전파되어야 할 것이니라 (막13:9-10)

세상의 역사와 관련하여 교회는 그들의 통치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합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대리자로 세상을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본질을 망각할 때 나오는 다양한 기독교의 모습을 우리는 오늘 바로 지금 목도하고 있죠. 오히려 교회는 세상 역사의 진정한 의미를 드러내기 위해 고난을 감수하고 주님의 증인이 되는 사명입니다. 따라서 고난을 받을 상황을 제거하는 크리스텐덤 적인 사고는 교회의 진정한 의미가 아니며 따라서 그러한 힘을 앞세워 정복해 나가는 식민주의적 선교 방식도 교회의 사명과는 거리가 멉니다. 뒷 문장만 부분적으로 취해서 '돌격 앞으로!'라고 외치는 것은 단순히 미성숙한 것이 아니라 틀린 것입니다.

8-3)   'And when they bring you to trial and deliver you up, do not be anxious beforehand what you are to say; but say whatever is given you in that hour, for it is not you who speak, but the Holy Spirit.'

사람들이 너희를 끌어다가 넘겨 줄 때에 무슨 말을 할까 미리 염려하지 말고 무엇이든지 그 때에 너희에게 주시는 그 말을 하라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요 성령이시니라 (막13:11)

다시 한번 이것이 교회의 일이 아니라 성령의 일임을 분명히 한다. 요한복음 (16:8) 에도 보혜사 성령이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고 기록되어 있다. 사도 바울의 말처럼 교회는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나타내시는 그리스도의 향기이다 (고후2:14-16). 누군가에게는 사망의 냄새이고 누군가에게는 생명의 냄새이다.  참된 그리스도와 유사품들이 난무하는 세상 한 복판에서 교회는 그 참된 그리스도를 드러내고 세상으로 하여금 결단을 요구하는 하나님의 표지이다. 그래서 뉴비긴은 이렇게 말한다. '교회는 어떻게 혹은 무엇을 말할지 고민해서는 안되고 교회의 모든 삶이, 심지어 하찮아 보이는 것에서 조차 하나님의 성령의 주권적인 통치에 열려있는지를 고민해야 한다.'

8-4) Finally, the whole thirteenth chapter of St Mark is dominated by the assurence that God is leading all things to a final consummation in which the powers of antichrist will muster all their strength against the Kingdom of God and will be finally vanqished. . . World history does not contain in itself the secret of its own redemption. The Church, which is embedded in world history, belongs to it, and bears witness to its true beginning and end, is nevertheless apart from world history, in the sense that its witness is to an end which is not merely implicit in the story itself.

뉴비긴은 마가복음 13장의 전체적인 결과는 결국 하나님께서 모든 어둠의 세력을 제거하시고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방향으로 다스리시고 인도하시는 것을 드러낸다고 말합니다. 세상의 역사와 교회의 증거와 관련하여 이렇게 구별합니다. "세상의 역사는 스스로 구원할 수 없습니다. 교회는 비록 그 세상 안에 있고 그 세상의 진정한 시작과 끝을 증거하고 있지만 동시에 교회의 증거가 세상의 역사와 구별되는 이유는 언젠가는 반드시 올 진정한 종말, 단순히 그 이야기속에 슬쩍 숨겨놓은 종말이 아니라 반드시 이루어질 종말을 증거하기 때문입니다.

9) The foregoing paragraphs do not pretend to do justice to the whole breadth of the biblical teaching about the relation of the Christian missions to world history. But reflection on this chapter can perhasps put us into a position where we can hear what the Bible has to say on the question with which we began. Not that the Bible ever answers our questions exactly in the form in which we put them. The Bible always requires of us a shift in standpoint, for which time and patience are needed. Our thesis is that from the standpoint of this chapter we can begin to understand the coherence and the relevance of the trinitarian faith as it illuminates the questions we are asking: in what sense is God at work in secular history? And how is the missionary work of the Church related to God's work in secular history?

그래서? 마가복음 13장의 그 설명은 잘 알겠는데 그것이 앞서 질문한 선교와 세상 역사의 관계에 대해 뭐라는 건데? 라고 반문할 수 있을 겁니다. 뉴비긴 역시 이 점을 설명합니다. 성경은 늘 우리가 질문한 것을 바로 답하지 않고 우리의 시각이 변화되도록 요구한다는 겁니다. 우리 편이냐 아니면 저쪽 편이냐를 묻는 여호수아에게 '둘다 아닌데'라고 답한 여호와의 군대 장관이나 '내 이웃이 누군데요?' 라고 대상을 묻는 율법학자에게 '누가 이웃이 되었지?'라고 주체를 되묻는 예수님처럼 성경은 답을 주기보다 우리의 관점을 뒤 흔듭니다. 세상 역사야 교회야 라고 묻는 우리에게 삼위일체의 관계와 역할 안에서 교회의 자리를 이해하고 그 교회가 세상 속에 있으나 세상에 속하지 않은 비밀을 증거하는 이 긴장이 우리의 질문을 바꾸어 놓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은 세속 역사 속에서 역사하시는 걸까? 그리고 교회의 선교 사역은 세속 역사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와 어떻게 관계되는 걸까? 라고 말입니다.

10) We may sum this up by saying tha tthe Church's mission to all the nations is a participation in the work of the triune God. . . Success is not measured by the number of adherents or the range of visible influence upon affairs. The significance of the Church's missionary witness will lie at this point: that it is the place where men are confronted with the reality and power of God's Kingdom. The rest is in the hands of the Father. It is sufficient for the Church that it be faithful. . . It (such a faith) delivers us on the one hand from alternations of optimism and pessimism which beset any undertaking not rooted in faith concerning God's whole action in history. It delivers us on the other hand from the kind of over-heated apocalypticism which is not content to leave 'the day and the hour' in the Father's hands.

너무 길어졌네요. 이쯤에서 마지막 정리를 하고 끝내야 겠습니다. 모든 민족을 향한 교회의 선교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눈에 보이는 어떤 것에 의해 성공과 실패를 논할 일은 아닙니다. 교회의 선교는 바로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실재와 능력을 마주하게 되도록 하는 지점에 있는 것이고 나머지는 아버지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교회는 진정성을 가지고 충성을 다하면 됩니다. 하나님께서 역사 가운데 총체적으로 진행하시는 일에 근거하지 않은 낙관 혹은 비관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이 바로 그런 믿음입니다. 이 믿음은 '그 날과 그 시'를 아버지께 맡기지 못한 과열된 종말론으로 부터도 자유롭게 해 줍니다. 선교가 삼위일체적 선교-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선교적 속성과 사역을 이해하고 그 안에서 교회의 정체성을 깨달아 바르게 참여하는 선교 - 가 되지 못하면 위에 언급한 그런 근거 없는 것에 의해 우리가 좌우되거나 혹은 그런 무근거 열정으로 남을 미혹하기도 할 것입니다.

마무리 하면서 역시 부족함을 느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