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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반공/삼선교: 삼위일체적 선교와 교회

뉴비긴의 "오늘날의 선교를 위한 삼위일체 교리" 5

뉴비긴의 책 '오늘날의 선교를 위한 삼위일체 교리' 5장에 대한 반추입니다. 5장, 6장, 7장은 선교에서 제기되는 3가지의 중요한 문제들을 각각 다루면서 왜 그 중요한 질문들이 삼위일체와 관련있는지를 다룹니다. 세 가지 문제는 1) 세상의 역사 2) 세속화 3) 자생 공동체 입니다. 매우 중요한 주제라고 생각됩니다. 앞으로 이어지는 세 장을 통해 선교의 중요한 문제들을 이해하고 또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답이 삼위일체의 이해에 있음을 깨닫게 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 작은 책자 안에서 5장은 가장 긴 장입니다. 길기도 하지만 좀 어렵기도 합니다. 제가 이해하는 만큼 정리해 보겠습니다. 

 

5. 선교활동과 인류 역사의 모습 (Missions and the Shape of World History)

1) The first concerns the relation between the work of missions and what we expect to happen in history. . . we have seen that in the recent past it has been answered in two principal ways.

첫 질문은 아주 근본적인 질문입니다. 선교 사역을 감당하는 우리는 세상에서 진행되는 역사를 어떤 관점으로 이해하고 있나요? 이것은 세상에 대한 우리의 이해, 좀 더 근본적으로는 우리가 이해하는 복음에 기초하여 형성된 우리의 세계관과 관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뉴비긴은 이 주제와 관련하여 논의되는 2가지의 상반된 시각을 먼저 소개합니다.

2) On the one hand missions have been seen as forwarding and completing the natural evolution of human society. The "Christianization of the world' has been understood as something substantially continuous with the general progress of human development.

그 중 하나의 시각은 세상과 교회의 관계 가운데 '세상'을 강조하는 시각입니다. 이 견해에서 선교란 인간의 역사가 자연적으로 발전해 나가는 것과 궤적을 같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교 논의에서 그 순서를 하나님>세상>교회 으로 주장하여 교회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하나님께서 하시는 하나님의 선교로 알고 그것에 잘 참여하면 되는 것으로 인식하는 견해와 일맥상통하는 주장입니다. 그러고 보면 문화와 복음의 관계에 대한 견해에서도 문화를 강조하는 쪽과 복음을 강조하는 쪽의 견해가 다르듯 우리들은 늘 한쪽으로 고정해야 마음이 편하고 잠이 오는 그런 특성을 가지고 있는 듯 합니다.   

3) On the other hand, and in sharp reaction to this, it has been insisted that the Gospel is radically other than all natural human religion and culture and that mission of the Church is therefore something other than a mere reinforcement or prolongation of the natural course of human progress.

이미 예상하시겠지만 그 반대의 시각은 세상과의 분리적인 차원에서 선교를 이해하는 시각입니다. 물론 앞의 견해에 대한 반작용으로 이런 견해에 더욱 힘을 주게 되었겠지요.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 모든 일에 있어 무엇에 대한 반작용으로 주장되는 견해들은 늘 조심하고 한번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뉴비긴이 이야기 하듯 이 견해에서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그저 배경일 뿐 선교는 오직 교회의 발전만 신경쓰면 된다는 주장을 하는 견해 입니다. 사회참여냐 복음전도냐를 가지고 논쟁하듯, 우리는 왜 늘 표면적 논쟁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사회참여가 진정한 복음적 사회참여인지? 소위 복음전도가 진정성을 내포한 복음적 전도인지? 를 깊이 성찰하지 않는 그런 논쟁에 대해 주님은 '둘 다 아니다' 라고 그 표면에 치우친 우리를 책망하실 것 같습니다.

4) We are now in a situation where it becomes urgently necessary to ask: What is the relation between what God has done once for all in Christ and is continuing to do through the witness of the Church, and the events of world history as a whole? Does the trinitarian starting point help us to face this decisive question?

위의 두 가지 견해가 각각 한쪽으로 치우쳐 있기 때문에 뉴비긴은 이 긴급하고 중요한 질문을 던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단번에 이루신 그 일 그리고 교회의 증거를 통해 지금도 계속하고 계신 그 일과 세상의 역사 전체는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 이 중요한 질문에 삼위일체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도움되는가? 라는 질문입니다. 그가 뭐라고 하는지 살펴 보겠습니다.

5) The Gospel records, and the New Testament as a whole, show us Jesus as the Son of the Father, as the 'Beloved Son', as the 'Only begotten from the Father'. It is impossible to think of him or to speak of him truly apart from the Father. He reveals God by showing us the love and obediance of the Son to the Father. No account of the Gospel which does not put this in the centre can be accepted.

우선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확인하면서 논의를 시작합니다. 복음서나 신약 전체는 예수 그리스도는 성부의 아들, 사랑하는 아들, 아버지로 부터 독생하신 분 등 성부와의 관계 안에서 그 분을 소개합니다. 그리고 성자는 아버지에 대한 사랑과 순종을 통해 그 분을 드러냅니다. 이것을 중심에 두지 않는 복음은 복음이 아닌 것이죠. 사도 요한이 자신의 복음서를 이 관계로 시작하는 것이 이해되는 듯 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예수님은 결코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오신 분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오셨음을 여러차례 말씀하셨습니다.

6) Nevertheless his coming is the decisive event for mankind - for all men and for all history. In him the Kingdom of God has come, but it is hidden. His coming therefore means both salvation and judgment for the world, because by their acceptance or rejection of him men are judged. . . He sends them (his disciples) out as witness to men of the fact that the decisive event of all history has arrived and is impending. . . The Father alone is in control. Yet the coming of the Son is the event by which the Father has chosen to bring all things to the point of decision, to the issue of judgment and salvation. And this event is - so to say - extended in the mission of the disciples sent out before the crucifixion and of the apostles sent out after the resurrection.

성자와 그가 보내신 제자들이 자신들의 운동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인간의 역사에 결정적인 사건입니다. 그 이유는 바로 그 분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은 중립이 없는 구원과 동시에 심판이 세상에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성부께서 모든 것을 다스리시지만 성자가 오신 것은 바로 그 성부께서 구원과 심판이라는 결정적인 지점으로 모든 것을 가져다 놓은 것입니다. 선교는 바로 그 성부께서 성자를 통해 진행하셨고 진행하시는 인류 역사의 최종적인 일의 연장선 상에 있는 것입니다.

7) But this is not otherwise than by the presence of God's Spirit himself. . . It is he who speaks when the persecuted disciples are on trial. It is he who convicts the world of sin, righteousness and judgment - that world which hates and rejects Jesus. It is he who is, properly speaking, the missionary. . . Thus the Christian mission is the clue to world history, not in the sense that it is the 'winning side' in the battle with the other forces of human history, but in the sense that it is the point at which the meaning of history is understood and at which men are required to make the final decisions about that meaning. It is - so to say - not the motor but the blade, not the driving force but the cutting edge. 

뉴비긴은 성부와 성자 그리고 그 연장선 상에서 제자들의 관계를 설명한 후에 연결하여 성령의 관계를 설명합니다. 이 모든 것은 성령의 임재 가운데 이루어 진다는 거죠. 예수의 공생애 사역의 시작에도 성령의 임재가 있었고 증인으로서 이 선교를 이어가는 제자들에게도 성령이 임재하여 진행됩니다. 제자들의 입에 할 말을 두시는 것도 성령이고 세상에 죄와 의와 심판을 정하시는 것도 성령의 사역입니다. 그러므로 사실 선교사는 성령이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는 선교는 역사의 실마리를 제공하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인간 역사의 다른 세력과 대조하여 이기는 편이라는 뜻이 아니라 역사의 의미가 이해되는 지점 그리고  그 의미를 향해 사람들에게 마지막 결정을 요구하는 지점이라는 면에서 실마리를 제공하는 겁니다. 쉽게 말하면 동력을 제공하는 모터 자체가 아니고 그 모터에 붙어 있는 날끝과 같은 역할입니다. 얼마나 적절한 비유인가요. 보이는 것은 날끝이 하는 것 같지만 사실 모터에 붙어 있지 않다면 연필 한자루 제대로 깍기나 하겠습니까? 그나마 날이 서 있을 때나 말이죠. 날도 잘 갈아야 하지만 궁극적인 것은 모터에 붙어 있어야 합니다. 물론 저는 이런 기계 비유보다는 유기적인 면이 포함된 예수님의 포도나무와 가지 비유를 더 좋아합니다^^

8)  The most sustained and explicit New Testament statements of the relation between the mission of the Church and events of world history are to be found in the apocalyptic sections of the first three Gospels and in the discourses at the end of the fourth Gospel. In both the synoptic and Johannine discourses certain notes are repeated - hatred of the world, the tribulation of the Church in the world, the presence of the Spirit who answers the accusations of the world, the victory of Christ.

선교와 세상의 역사의 관계를 잘 드러내는 신약의 본문들은 공관복음의 묵시 부분과 요한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마지막 강화입니다. 여기에 반복적으로 나오는 것이, 제자 공동체에 대한 세상의 증오, 세상에서 당하는 교회의 고난, 그런 세상의 비난에 대한 성령의 응답,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 등 입니다. 이제 이것을 다루기 위해 뉴비긴은 마가복음 13장을 들어 설명을 시작합니다.

8-1) 'Many will come in my name, saying, "I am he!" and they will lead many astray.'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내가 그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 (막13:6)

여기는 너무 길어서 영어 인용을 생략했습니다. 뉴비긴의 주장은 위의 성경 구절이 의미하는 전제에 대한 설명입니다. 다시 말해서 많은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온다는 것은 기독교의 메시지가 어떤 형태로든 전해졌음을 의미합니다. 기독교의 세계관과 전혀 다른 형태의 세계관이 우리에게 도전이 되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진정한 메시야의 전파되는 동시에 세상에 가짜가 나오는 현상이 동반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온 세상에 복음이 전해지는 것만을 선교의 과업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세상은 그 메시지를 왜곡하여 기독교와 유사 형태이면서 적 그리스도적인 현상이 난무하게 됩니다. 뉴비긴이 이런 이야기까진 하지 않았지만 선교가 어떤 방식으로 되는냐가 중요한 이유는 과업으로 이해되는 선교는 이런 왜곡을 낳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긴급하나 정확한 순도를 유지하는 것이 정말로 중요합니다.

8-2)  'But take heed to yourselves; for they will deliver you up to councils; and you will be beaten in synagogues; and you will stand before governors and kings for my sake, to bear testimony before them. And the gospel must first be preached to all nations.' The task of the Church in relation to the events of world history is not to be the governors and and controller of them, but to be the suffering servant and witness of the Lord, manifesting in its witness the true meaning of these events.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사람들이 너희를 공회에 넘겨 주겠고 너희를 회당에서 매질하겠으며 나로 말미암아 너희가 권력자들과 임금들 앞에 서리니 이는 그들에게 증거가 되려 함이라 또 복음이 먼저 만국에 전파되어야 할 것이니라 (막13:9-10)

세상의 역사와 관련하여 교회는 그들의 통치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합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대리자로 세상을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본질을 망각할 때 나오는 다양한 기독교의 모습을 우리는 오늘 바로 지금 목도하고 있죠. 오히려 교회는 세상 역사의 진정한 의미를 드러내기 위해 고난을 감수하고 주님의 증인이 되는 사명입니다. 따라서 고난을 받을 상황을 제거하는 크리스텐덤 적인 사고는 교회의 진정한 의미가 아니며 따라서 그러한 힘을 앞세워 정복해 나가는 식민주의적 선교 방식도 교회의 사명과는 거리가 멉니다. 뒷 문장만 부분적으로 취해서 '돌격 앞으로!'라고 외치는 것은 단순히 미성숙한 것이 아니라 틀린 것입니다.

8-3)   'And when they bring you to trial and deliver you up, do not be anxious beforehand what you are to say; but say whatever is given you in that hour, for it is not you who speak, but the Holy Spirit.'

사람들이 너희를 끌어다가 넘겨 줄 때에 무슨 말을 할까 미리 염려하지 말고 무엇이든지 그 때에 너희에게 주시는 그 말을 하라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요 성령이시니라 (막13:11)

다시 한번 이것이 교회의 일이 아니라 성령의 일임을 분명히 한다. 요한복음 (16:8) 에도 보혜사 성령이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고 기록되어 있다. 사도 바울의 말처럼 교회는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나타내시는 그리스도의 향기이다 (고후2:14-16). 누군가에게는 사망의 냄새이고 누군가에게는 생명의 냄새이다.  참된 그리스도와 유사품들이 난무하는 세상 한 복판에서 교회는 그 참된 그리스도를 드러내고 세상으로 하여금 결단을 요구하는 하나님의 표지이다. 그래서 뉴비긴은 이렇게 말한다. '교회는 어떻게 혹은 무엇을 말할지 고민해서는 안되고 교회의 모든 삶이, 심지어 하찮아 보이는 것에서 조차 하나님의 성령의 주권적인 통치에 열려있는지를 고민해야 한다.'

8-4) Finally, the whole thirteenth chapter of St Mark is dominated by the assurence that God is leading all things to a final consummation in which the powers of antichrist will muster all their strength against the Kingdom of God and will be finally vanqished. . . World history does not contain in itself the secret of its own redemption. The Church, which is embedded in world history, belongs to it, and bears witness to its true beginning and end, is nevertheless apart from world history, in the sense that its witness is to an end which is not merely implicit in the story itself.

뉴비긴은 마가복음 13장의 전체적인 결과는 결국 하나님께서 모든 어둠의 세력을 제거하시고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방향으로 다스리시고 인도하시는 것을 드러낸다고 말합니다. 세상의 역사와 교회의 증거와 관련하여 이렇게 구별합니다. "세상의 역사는 스스로 구원할 수 없습니다. 교회는 비록 그 세상 안에 있고 그 세상의 진정한 시작과 끝을 증거하고 있지만 동시에 교회의 증거가 세상의 역사와 구별되는 이유는 언젠가는 반드시 올 진정한 종말, 단순히 그 이야기속에 슬쩍 숨겨놓은 종말이 아니라 반드시 이루어질 종말을 증거하기 때문입니다.

9) The foregoing paragraphs do not pretend to do justice to the whole breadth of the biblical teaching about the relation of the Christian missions to world history. But reflection on this chapter can perhasps put us into a position where we can hear what the Bible has to say on the question with which we began. Not that the Bible ever answers our questions exactly in the form in which we put them. The Bible always requires of us a shift in standpoint, for which time and patience are needed. Our thesis is that from the standpoint of this chapter we can begin to understand the coherence and the relevance of the trinitarian faith as it illuminates the questions we are asking: in what sense is God at work in secular history? And how is the missionary work of the Church related to God's work in secular history?

그래서? 마가복음 13장의 그 설명은 잘 알겠는데 그것이 앞서 질문한 선교와 세상 역사의 관계에 대해 뭐라는 건데? 라고 반문할 수 있을 겁니다. 뉴비긴 역시 이 점을 설명합니다. 성경은 늘 우리가 질문한 것을 바로 답하지 않고 우리의 시각이 변화되도록 요구한다는 겁니다. 우리 편이냐 아니면 저쪽 편이냐를 묻는 여호수아에게 '둘다 아닌데'라고 답한 여호와의 군대 장관이나 '내 이웃이 누군데요?' 라고 대상을 묻는 율법학자에게 '누가 이웃이 되었지?'라고 주체를 되묻는 예수님처럼 성경은 답을 주기보다 우리의 관점을 뒤 흔듭니다. 세상 역사야 교회야 라고 묻는 우리에게 삼위일체의 관계와 역할 안에서 교회의 자리를 이해하고 그 교회가 세상 속에 있으나 세상에 속하지 않은 비밀을 증거하는 이 긴장이 우리의 질문을 바꾸어 놓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은 세속 역사 속에서 역사하시는 걸까? 그리고 교회의 선교 사역은 세속 역사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와 어떻게 관계되는 걸까? 라고 말입니다.

10) We may sum this up by saying tha tthe Church's mission to all the nations is a participation in the work of the triune God. . . Success is not measured by the number of adherents or the range of visible influence upon affairs. The significance of the Church's missionary witness will lie at this point: that it is the place where men are confronted with the reality and power of God's Kingdom. The rest is in the hands of the Father. It is sufficient for the Church that it be faithful. . . It (such a faith) delivers us on the one hand from alternations of optimism and pessimism which beset any undertaking not rooted in faith concerning God's whole action in history. It delivers us on the other hand from the kind of over-heated apocalypticism which is not content to leave 'the day and the hour' in the Father's hands.

너무 길어졌네요. 이쯤에서 마지막 정리를 하고 끝내야 겠습니다. 모든 민족을 향한 교회의 선교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눈에 보이는 어떤 것에 의해 성공과 실패를 논할 일은 아닙니다. 교회의 선교는 바로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실재와 능력을 마주하게 되도록 하는 지점에 있는 것이고 나머지는 아버지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교회는 진정성을 가지고 충성을 다하면 됩니다. 하나님께서 역사 가운데 총체적으로 진행하시는 일에 근거하지 않은 낙관 혹은 비관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이 바로 그런 믿음입니다. 이 믿음은 '그 날과 그 시'를 아버지께 맡기지 못한 과열된 종말론으로 부터도 자유롭게 해 줍니다. 선교가 삼위일체적 선교-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선교적 속성과 사역을 이해하고 그 안에서 교회의 정체성을 깨달아 바르게 참여하는 선교 - 가 되지 못하면 위에 언급한 그런 근거 없는 것에 의해 우리가 좌우되거나 혹은 그런 무근거 열정으로 남을 미혹하기도 할 것입니다.

마무리 하면서 역시 부족함을 느낍니다. 아래 한종석 선생님이 수고해 주신 전문을 올립니다. 천천히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5장 선교활동과 인류 역사의 모습

 

이제 우리는 선교활동의 사역 안에서 주저함의 근거에 대한 실례로 제시한 세가지 문제로 돌아간다. 첫번째 문제는 선교활동의 사역과 우리가 역사에서 일어날 것이라고 기대하는 일

 

들과의 관계이다. 우리는 이것이 긴급한 질문이라는 것과 최근에 두가지 중요한 방향으로 답이 주어진 것을 경험했다. 한편으로 선교활동은 인간사회의 자연적인 발전을 촉진하고 완성하는 것으로 여겨져 왔다.“ 세계의 기독교화는 인간이 발전하는 일반적인 진보와 더불어 본질적으로 지속되는 것으로 이해되어 왔다.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이해에 대한 신랄한 반작용으로 복음은 모든 자연적인 인간 종교 문화와는 차별되는 것이고 따라서 교회의 선교는 인간 진보의 자연적인 진행을 단순히 강화하거나 연장하는 것이 아니라는 주장이 있어왔다. 우리는 이러한 당연하고 타당한 생각이 선교활동이 오직 교회의 발전만을 신경 쓰거나 세상역사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일부가 아닌 구원 계획이 이루어지는 단순한 배경으로 여겨지는 상황을 만들었다는 것을 또한 목격했다. 우리는 이제 다음과 같은 질문을 긴급하게 물어야 하는 상황에 다다랐다. 하나님이 그리스도안에서 모두를 위해서 한 일 그리고 교회의 증거를 통해서 지속적으로 하는 일과 세상 역사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 전체와는 무슨 관계가 있는가? 삼위일체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이 우리로 하여금 이 결정적인 질문으로 향하도록 하는가?

 

신약 전체와 복음서는 우리에게 예수를 성부의 아들, “사랑하는 아들그리고성부로부터 유일하게 난 자로 보여준다. 성부로부터 떼어 놓고서는 예수를 이야기하거나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예수는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사랑과 순종을 보여줌으로써 하나님을 드러낸다. 이것을 중심에 놓지 않는 복음의 어떠한 서술도 받아들여질 수 없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아버지로서 다스린다는 사실은 가르침의 중심에 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유지하며 모든 것을 돌보며 모든 것을 다스린다. 가장 묵시적인 본문에서 조차아직 끝이 아니다라는 소리가 지속적으로 들린다. 자비로운 하나님은 회개할 수 있는 기회가 있도록 여전히 시간을 주고 여전히 현재의 세상을 유지한다. 이것은 전체적인 성경의 가르침과 일치한다. 모든 것을 창조한 하나님은 자신의 뜻에 따라 그것들을 지속시키고 이끌어 나간다. 세상의 가장 강력한 힘 조차도 그것이 징벌(앗시리아)이건 혹은 도움(구브로)이건 자비로운 목적에 사용하도록 그의 손안에 있다. 반제국주의나 제국주의도 악마의 단순한 작품이 아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스리고 사용한다.

 

성자로서, 예수는 성부를 사랑하고 그에게 순종한다. 그는 일어나는 일들에 대한 성부의 명령에 자신을 완전히 바친다. 그는 세상의 역사를 자신이 지배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사건들의 지배자와 감독자가 되려는 모든 유혹을 거부한다. 모든 것을 다스리는 자의 일시적인 현현으로서 사람들 사이에서 신의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그는 모든 것을 다스리는 자의 뜻에 자신을 기꺼이 바치는 성자로 나타난다. 또한 그는 세상의 사건들을 통제하는 힘을 갖게 될 어떤 운동을 시작하고자 하지 않는다. 그의 제자들이 그러한 힘을 가지고자 했을 때 그는 그들을 나무랐다. 그는 그들에게 권력과 영향력을 갖는 것을 기대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시종일관 그는 성부가 일어나는 일들의 주인이고 그 틀 안에서 자신과 자신을 따르는 자들이 이루어야 할 사명이 있음을 받아들인다.

 

그럼에도 그가 온 것은 인류-모든 사람과 모든 역사-를 위한 결정적인 사건이다. 그의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비록 숨겨지기는 했지만 도래했다. 그가 온 것은 세상을 향한 구원과 심판을 동시에 의미한다. 왜냐하면 그를 받아들이거나 거부하는 것으로 인간은 심판되기 때문이다. 그가 온 것은 단순히 하나의 종교 운동의 시작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제자들을 단순히 교리나 프로그램을 전파하기 위해서 보내지 않는다. 그는 그들을 모든 역사의 결정적인 사건이 도래했고 임박했음을 사람들에게 증거하기 위해서 보낸다. 그러나 이 사건은 그가 통제할 수 있는 것들 중의 하나가 아니다. 성부만이 통제할 수 있다. 그러나 성자가 온 것은 성부가 모든 것을 결정의 순간으로 즉 심판과 구원의 쟁점으로 인도하기로 선택한 사건이다. 그리고 이 사건은 말하자면 십자가에 달리기 전에 보냄을 받은 제자들과 부활 후에 보냄을 받은 사도들의 선교로 확장된다. 이 사건들안에서 성부는 마치 주인이 자신의 하인들을 정산을 위해서 부르거나 농부가 자신의 밭을 추수하기 위해서 나가는 것처럼 인간의 역사를 결정적인 순간으로 인도한다.

 

그러므로 성자와 그가 자신의 형제로 여기는 사람들은 성부의 통치의 대리인으로서가 아니라 통치의 증인으로 세상에 보내어진다. 성자가 온 것과 그의 이름으로 그의 형제들이 가는 것을 통해 성부는 인간 역사를 최종적 쟁점들로 이끈다. 그러나 이 일은 하나님의 성령의 임재를 통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이 일은 성령이 비둘기처럼 내려오는 것을 볼 때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라는 아버지의 목소리를 예수께서 듣는 바로 그 순간에 이루어진다. 이 일은 가버나움의 회당에 서서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는 성령에게 기름 부음을 받은 자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그리고 마지막 정죄의 이유는 성자에 대한 신성모독이 아니고 성자 안에서 말하고 일하는 성령에 대한 신성모독이다. 마찬가지로 제자들에게 증거하는 이도 성령이다. 성령의 임재를 통해서 제자들은 아들의 자격을 받게 되고 그 때문에 성자의 사역을 세상에서 계속할 수 있는 힘을 얻는다. 제자들의 상속의 증표요 성부가 역사를 이끌고 가는 영광스러운 마지막에 대한 증거와 보증도 성령이다. 따라서 성부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한 증인도 제자들이 아니라 성령 자신이다. 고난받는 제자들이 재판을 받을 때도 말하는 것은 성령이다. 예수를 싫어하고 거부했던 바로 그 세상에 대해 죄와 의와 심판을 선언하는 것도 바로 성령이다. 제대로 말하자면 그가 바로 선교사이다.

 

그러므로 기독교 선교는 세상 역사에 대한 실마리이다. 그 실마리는 인간 역사 안에 있는 다른 세력과의 전투에서 승리하는 편이라는 의미가 아닌 역사의 진의가 이해되는 그리고 사람들이 그 진의에 대한 마지막 결정들을 내려야 하는 지점이라는 의미에서 실마리이다. 따라서 비유로 하자면 모터가 아니라 칼날이고 원동력이 아니라 날끝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역사의 전투를 지배자로서 뚫고 나가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역사의 유일한 주관자이신 성부를 바라보고, 그들의 순종의 배경이 되는 사건들에 대한 성부의 결정을 받아들이며 자신들의 인도자인 성령에 의존하는 섬기는 자들로서 그 전투들을 뚫고 나간다. 그들은 사람들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과 관련해서 하나님과 같은 편에 서거나 혹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결정을 사람들이 하도록 하는 증인으로서 세상의 역사를 뚫고 지나간다. 그리고 그들 안에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의 진정한 의미를 여실히 말해주기 위해서 성령이 거한다.

 

교회의 선교와 세계역사의 사건들과의 관계를 가장 지속적이고 분명히 이야기해주는 신약의 진술들은 처음 세 복음서의 묵시적인 부분들과 네번째 복음서 마지막 부분의 담화에서 발견된다. 공관복음서와 요한의 담론에서 어떤 요소들은 반복된다. 교회에 대한 세상의 증오,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세상, 세상에서의 교회의 고난, 세상의 비난에 응답하는 성령의 임재, 그리스도의 승리 등이 바로 그 것들이다. 다가 올 일들에 대한 제자들의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마가복음 13장에서 주님이 하신 말씀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 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이 담화는 성전에 대한 질문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제자들은 성전의 영광에 놀라워하고 있었다. 주님은 그것의 완전한 파괴에 대한 예언으로 답하신다.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에 대한 충성스러운 이스라엘 사람들의 기대를 완전히 저버리는 이 보다 더 한 예언은 없었을 것이다. 이사야에 따르면 시온 산은 온 땅의 나라들이 하나님을 공평과 평화의 근원으로 인정하기 위해서 모이는 장소였다. 

 

제자들은 당연히 놀라고 당황해서 다가올 일들에 대한 해석을 요청했다. 제자들이 받은 답은 지금 진행되고 있는 우리의 토론과 관련해서 최소한 다음의 요소들을 가지고 있다.

 

(A) ‘많은 사람들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내가 그라 하여 많은 사람들을 미혹하리라.’ 즉 진정한 메시아만이 가져다 줄 수 있는 것을 가져다 준다고 헛되이 주장하는 거짓 그리스도들이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이것은 악한 힘들에 대한 일반적인 경고가 아니고 훨씬 더 구체적이다. 이 경고는 오직 그리스도가 알려지거나 기대되는 상황에서만 일어나는 가증한 악의 특정한 형태에 대한 것이다. 이 경고는 거짓 그리스도, 궁극적으로 적그리스도에 대한 것이다.

 

이 경고의 필요성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계시의 본성으로 부터 생겨난다. 그리스도의 세상으로의 도래는 인간으로 하여금 그들의 마지막 운명을 마주하도록 한다. 그의 도래에 의해서 인간에게 열린 가능성은 완전한 구원의 가능성 혹은 완전한 상실의 가능성이다. 그의 앞에서 중립은 궁극적으로 불가능하다. 인간은 그리스도를 주로 인정하든지 아니면 사기꾼으로 비난하든지 부드럽게 그러나 가차없이 둘 중 하나의 선택으로 몰리게 된다. 이것은 네번째 복음서에서 빛과 어둠의 상징으로 표현된다. 그는 세상의 빛, 진정한 빛, 인간이 가지고 있는 유일한 빛이다. 그의 도래로 인간은 완전한 빛을 받아들이든지 아니면 어둠 속에서 걷든지 선택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그의 도래는 심판, 분리, 양극화를 의미한다. 이것은 네번째 복음서에서 마지막에 자신을 그리스도와 그의 사람들로부터 분리시키고 어둠 속으로 일부러 들어간 유다의 이야기에서 가장 생생하게 보여진다.

 

요한복음 14-16장의 담화와 우리가 지금 고찰하고 있는 것과 같은 묵시적인 본문 모두 이러한 양극화의 과정을 역사를 통해 예언적으로 투영한다. 이것은 예수의 지상사역이 끝남과 함께 멈추지 않는다. 그것은 교회의 증거를 통해 시간을 따라 확장된다. 그리고 바로 이 배경 안에서 하나님이 예수를 통해서 인류에게 제시한 구원이 아닌 다른 구원을 제시하는 거짓 그리스도들에 대한 경고를 우리가 이해한다. 거짓 그리스도들의 제안은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구원의 선물이 제시된 곳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메시지(희석된 형태라도)가 세상의 구석구석까지 침투한 현 시대가 모든 종류의 메시아적 운동이 일어나는 시간이라는 것은 신약성경이 우리가 예측하도록 이끄는 바와 완전히 일치한다. 인류의 대다수는 비교적 최근까지 신약성경이 묘사하는 방식의 총체적인 구원의 가능성에 대한 믿음없이 살아왔다. 세상의 문제에 개입하지 않음으로 얻어지는 개인의 구원의 가능성에 대한 믿음이 실제로 있어왔다. 그러나 인간의 일들이 목표로 삼아 그 방향으로 움직이는 인류의 전체적인 구원에 대한 가능성에 대한 믿음은 없었다. 이것은 새롭고 혁명적인 믿음이다. 이것의 영향은 인류의 대다수가 여전히 그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시간의 고대적인 순환개념의 붕괴이고 인간으로 하여금 미래에 있는 새로운 질서를 향한 전진에 기초를 둔 직선적 사고를 하도록 한다.

 

수 천년 동안 인간의 삶이 지금까지 있어왔던 것과 급진적으로 달라 질 것이라는 기대없이 살아왔던 모든 사람들이 이제 존재의 완전한 새로운 질서의 가능성에 대해 가능성을 열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우리시대의 이러한 혁명적인 특징이 생겨난다. 새로운 질서에 대한 이 비전의 내용은 다양하나 그 희망의 틀은 어디서나 눈에 띄게 일치한다. 그 틀은 고대의 비기독교적인 체계들의 사상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이 체계들이 역사의 의미에 대한 성경적인 이해에 의해서 형성된 문화로부터 온 자극들과 접촉함으로써 생긴 것이다. 사실상 서구 문화에 추진력을 주고 서구 문화로 하여금 인도나 중국 문명과 같은 아주 오래되고 안정된 인간 체계를 붕괴시키도록 한 것이 바로 새 질서에 대한 이 희망이다. 크리스토퍼 도슨이 지적한 바와 같이 이전의 식민지들로 하여금 식민세력의 정치적 멍에를 벗어 던지도록 하는데 성공한 운동들 스스로가 자신들의 이론적 토대를 서구에 의존해왔다는 것은 충격적인 사실이다. 인도의 힌두 마하 사마 그리고 이집트의 무슬림 형제들과 같이 자신들의 이론적 토대를 고대의 비기독교적인 신앙에서 찾았던 운동들은 반식민운동의 정치적 지도력을 차지하는데 실패해왔다. 우리시대의 혁명운동들은, 그들의 정치적 노선이 대부분 반서구이지만, 아시아나 아프리카의 고대 종교의 산물이라고 여겨지지는 않는 운동들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성경적 희망의 다양화된 세속적 형태들에 의해서 힘을 얻는다. 근본적으로 그들은 메시아적 운동들이다. 그들은 비성경적인 종교들의 범주 안에서 이해될 수 없다.

 

그러한 운동들은 잠재적으로 선과 악을 동시에 전달한다. 그들은 이제까지 그리고 지금도 불의와 억매임으로부터 수백만을 해방시키는 도구이고 새로운 지적 영적 삶의 전달자이고 새로운 진리와 새로운 관심사를 일깨우는 도구이다. 그들은 선물들을 가지고 오는데 그 선물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인간에게 완전한 행복을 준다고 주장하고 따라서 자신들에 대한 인간의 완전한 충성을 요구하는 한 그들은 자신들이 인간을 해방시키고자 하는 것들 보다 궁극적으로 더 무시무시한 악의 전달자가 된다. 우리가 고찰하고 있는 본문을 이해했다면, 이것은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진정한 메시아의 도래는 가짜들이 출현하도록 한다. 역사의 진정한 끝- 알파인 동시에 오메가인- 인 메시아의 도래는 결정의 필요성을 재촉하고 어떠한 결정도 최종적이지 않은 시간의 순환적 이해로부터 인간이 나오도록 강요한다. 하나님의 구원의 제안은 하나님의 것이 아닌 다른 형태의 구원(인간의 완전한 행복)의 제안들을 곤두박질치게 한다. 이것은 육신이 된 말씀의 도래로 부터 시작된 인간 세상사의 양극화의 한 부분이다. 성육신은 하나님의 목표가 실패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지나가야 하는 것들 중의 하나이다. 또한 인간의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이 기꺼이 치르고자 하는 값의 일부이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이 하나 있다. 이 혁명적인 운동들이 이 장에서 이야기하는 것들과 관련되어 이해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그들 중 하나가 적그리스도로 취급되어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 담화는 시대를 분별하고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의 사역에 비추어 인간역사의 사건들을 해석하고자 하는 요구임과 동시에 특정한 사건을 궁극적인 사건과 동일시하는 실수에 대한 경고도 담고 있다. 그러나 그 날과 시간은 하늘의 천사도 심지어 성자를 포함한 그 누구도 알지 못하고 성부만이 알고 있다.[1] 하나님의 인내의 한계가 어디인지 혹은 그가 인간 역사를 위해서 정해놓은 경계가 어디인지를 우리가 아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 그리스도를 제외하고는- 그간 제기하지 않았던 질문 즉 인간의 구원에 대한 질문에 대한 의식적인 답변이 이 운동들 안에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할 의무가 있는데 그 답변은 기독교 이후의 것이고 이교적 사상으로서의 의미가 아닌 반기독교적인 것이다. 따라서 그 운동들은 그리스도가 인류를 위해서 제기한 문제들을 향해 있고 이 사실은 그 문제들과 관련한 교회의 의무를 결정한다. 그 의무는 마가복음 13장을 다루는 다음 난에 다루어진다.

 

(B)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사람들이 너희를 공회에 넘겨주겠고 너희를 회당에서 매질하겠으며 나로 말미암아 너희가 권력자들과 임금들 앞에 서리니 이는 그들에게 증거가 되려함이라. 또 복음이 먼저 만국에 전파되어야 할 것이니라.” 세상의 역사와 관련된 교회의 과업은 그들의 지배자나 통치자가 되는 것이 아니고 이 사건들의 진정한 의미를 증거함을 통해서 주님의 고통받는 종이요 증인이 되는 것이다. 교회는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의 도구가 아니고 말과 고난을 통한 하나님의 통치의 증인이다.

 

우리의 선교적 사고와 신약성경과의 유사성은 고난을 통해서 교회의 부르심을 이해하는 지점에서 어느 정도 판단될 수도 있을 것이다. 교회 역사에서 국가의 권위가 일반적으로 기독교인을 지지했던 콘스탄틴시대의 오랜 기간 동안 기독교인들이 자신들의 신앙으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하는 것은 비정상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근대 선교사들이 아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 그리고 태평양에 있는 비기독교적인 문화로 나갔을 때 조차, 그들은 유럽 국가들의 힘을 등에 업고 있었고, 그 힘에 의해서 보호되기를 대개 기대했다. 이러한 오랜 경험의 결과로, 많은 기독교인들이 어디든지 가서 기독교를- 또는 사실 상 다른 어느 종교든지 - 전파할 수 있고 그 일을 함에 있어서 법과 질서를 통해서 보호받는 것이정상적인상태라고 당연히 여기는 듯하다. 이 것은 성경이나 혹은 상식에 기초하지 않은 허상이다. 어떤 종류의 공통적인 신념들이나 관습들에 기초하지 않고 결속하는 인간사회는 존재하지 않는다. 스스로의 방어체계를 발동하지 않고 이러한 신념들이나 관습들이 어느 정도를 넘어 위협을 당하도록 내버려 두는 사회는 없다. 종교적 혹은 이념적 신념들을 배제하면서 다양한 종교들이 서로 경쟁하도록 공평하게 감시하는 중립적인 세속적 정치질서에 대한 생각은 타당한 기초를 가지고 있지 않다. 신약성경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은 고난을 자신들의 제자도의 정상적인 표식으로 그리고 그들의 증인됨을 특징짓는 형태중 하나로 기대해야 한다고 분명히 이야기한다.

 

그러나 이것은 교회가 세상에서 일어나는 사건들과의 관계에서 수동적인 역할만을 감당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주님과 함께 전파하고 행동하도록 부름받았다. 전 세계를 향한 복음의 전파는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룬 우주적 본성에 대한 증언이다. 그리고예수가 행동하고 가르치기 시작한 것은 인간 역사를 구성하는 많은 가닥 중의 하나가 아닌 그 역사의 진정한 목적을 드러내는 것이라는 사실을 증언하는 것이다. 이것이 제자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선포를 거부하는 사람들과 논쟁하기 위해서 기다리지 말고 서두르도록 지시 받은 이유이다. 이것이 바울이 로마 제국의 동쪽 땅들 위에 그가 세운 기초들 위에 짓기 위해서 기다리지 않고 가장 먼 서쪽으로 서둘러 가려고 했던 이유이다. 이 것이 해외 선교활동들이 보편적 교회의 확장이라는 개념에 의해서 소진되지 않는 견고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이유이다. 이것이 특히 다른 상황에 처해있는 사람들에게 가서 그들의 상황에 맞게 복음이 표현되도록 하는 일을 하는 선교 과업의 근본적인 성질이다. 복음을 새로운 인간의 상황과 연결시키는 이 신속성은 하나님이 그리스도안에서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한 일의 성격에 대한 교회의 증언의 본질적인 부분이다. 이것이 없이는 복음은 편안함에 익숙해지는 과정에 의해서 쉽게 본질을 상실하게 된다. “모든 민족이라는 문구는 심각하게 받아들여져야 하고 이로 인해해외선교는 여전히 타당성과 필요성을 가지게 된다. 당연한 이야기지만민족이라는 단어로 번역되는 성경 언어는 현대 영어에서의 그 단어가 가리키는 특정한 인간 집단이라는 뜻과 단순히 동일시되어서는 안된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또한 행동하도록 부름받았다. 이 행동 안에서 그들은 좋은 소식을 선포하도록 기름 부음을 받았고 치유, 해방, 소생의 행동을 통해서 그 복음을 구체화한 그들의 주님과 하나가 된다. 이러한 행동들은 또한 증거의 특성을 가질 것이다. 그들은 도구라기 보다는 표지이다. 이것은 가르치고 치유하는 성직의 오래된 예전의 형식에서 그리고 기술적인 도움이라는 새로운 프로그램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표지들은 보리떡과 물고기와 마찬가지로 잘못 해석될 수도 있다. 그것들은 그릇된 형태의 메시아주의의 근거가 될 수도 있다 (요한복음 6:15절 참조).  이러한 그릇된 형태의 메시아주의는 기독교 단체 안에서 조차 나타나는데 이 사실을 다른 운동들을 메시아주의의 관점에서 해석하는 기독교인들이 깊이 생각해야한다. 하나님의 나라의 표지로 적법하게 이해되는 일들이 그 자체로 인간의 갈망의 대상이 될 수 있어서 예수의 주장에 대한 거부와 (요한복음 6:41) 제자들의 이탈을 (요한복음 6:60-66) 야기할 수도 있다. 그러나 올바르게 이해된다면 그것들은 하나님의 나라의 임재와 능력에 대한 교회의 증언의 필요한 부분이다. 그것들은 하나님이 자신의 나라를 수립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그것들은 하나님 나라의 현존하는 실제의 증거들이다. 우리 시대의 혁명적인 운동들을 제어하거나 극복하기 위해서 (강사들이 이따금씩 제안하는 것처럼) 교회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성경으로부터 나온 삶의 방식들과 개념들이 세상의 사람들에게 주는 충격과 따로 떨어져서는 이 운동들이 설명이 되지 않는다. 교회는 오히려 이 운동들 안에서 하나님의 주권적인 다스림을 믿으며 그 다스림이 나타나는 장소 즉 사람이 하나님에게 순종하거나 거역하는 결정을 하도록 부름을 받은 장소가 되어 하나님을 증거하며 고난 받는 종으로 모든 곳에 존재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C) 그러나 이 증거는 교회의 일이 아니고 교회 안에 거하는 성령의 일이다. “너희를 넘겨 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그 때에 너희에게 할 말을 주시리라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이 곧 성령이시니라유사하게 요한의 담화에도 성령이 올 때 그가 세상의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 깨우쳐 줄 것이라고 쓰여있다. 교회가 세상에 전달하는 증언은 따라서 교회 스스로 만들어 낸 무언가가 아니다. 그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일이다. 그것의 때는 그리스도인들이 고난과 거절을 당하는 것이 용인된 모든 것을 다스리는 성부의 질서 안에서 그에 의해서 정해진다. 그것의 본질은 성령의 일인데 그는 자신의 주권적인 자유 안에서 교회가 약하고 어려움에 처해있을 때를 자신이 세상을 깨우치기 위한 기회로 사용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아들됨을 공유하는 자들로서 성부를 경배하며 성부의 사건들에 대한 처결을 자신들의 사명이 성취되는 틀로서 인정하며, 하나님의 완성된 목적을 그들로 하여금 미리 맛보도록 하며 그 목적에 대한 가장 강력한 증언과 그 증언을 거부하거나 받아들여야 한다면 세상에 맞서는 성령의 임재를 기뻐하면서 그리스도의 사역을 역사를 통해서 지속하도록 부름받았다.

 

그러므로 교회는 자신을 위대한 선교사 사도가 한 말씀이 되도록 만들 수 있다.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고린도후서 2 14-16). 생명력있는 그리스도인 공동체들의 발생과 민족들에게 다른 방식으로 구원을 제시하는 메시아적 운동들의 출현이 세상 구석구석으로 침투해 가는 복음과 성경에 의해서 형성된 삶의 방식들을 뒤따라 일어난다는 사실에 우리는 놀라서는 안된다. 이것은 다름이 아닌 하나님이 예수 안에서 시작한 일의 연속이고, 자신에 의해서 창조된 모든 만물을 자신 안에 두신 성부의 진정한 목적과 인간에게 완전한 행복을 가져다 준다고 거짓되이 주장하는 자들에 의해서 제시되는 대체품 사이에서의 선택을 더욱 예리한 말투로 민족들에게 직면하도록 하는 것이다. 모든 인류로 하여금 최종적인 결정을 하도록 인도하는 것은 예수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목적이다. 인류의 한복판에서 교회의 존재는 하나님이 그 일을 하시는 방법이다. 그러나 인간을 결정의 순간으로 이끄는 하나님의 목적에 대한 증언은 성령 자신의 증언이다. 반대와 거절의 정확한 한복판에서 교회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언제나 승리로 이끄는 하나님께 감사한다

 

기독교 선교와 세상 역사와의 관계에 대한 이러한 이해가 복음과 비기독교적인 종교들과의 만남에 대한 질문들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은 가치가 있다. 이러한 종교들의 현재의 형태는 기독교 이후의 현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 종교들의 부흥의 현재적 표지는 서구 세계와의 접촉으로 인해서 들어온 모든 영적인 힘들의 영향에 대한 그들의 반응이다. 그들의 지도자들은 서구의 역동적인 사회가 상대적으로 정적인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사회들에 준 영향에 의해서 야기된 문제들과 씨름하고 있다. 대부분 그들은 서구세계의 과학적인 개념들을 탐구하고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기를 갈망하고 있지만 서구 사상의 성경적 뿌리에는 관심이 없다.

 

만약에 그리스도인들이 이 위대한 종교들의 현재 대표들과의 만남에서 그리스도를 증거하기를 원한다면 그들은 인류의 공통적인 사회가 되고 있는 이 역동적인 사회의 근원과 특징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들은 반드시 어떻게 그 근원과 특징이 고대 비기독교 종교들에서는 제기되지 않았던 문제점들을 제기하며 어떻게 인간의 삶에 대한 고대의 순환적 이해를 붕괴시키며 인간의 본성과 운명에 대한 즉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지는 새로운 질문들을 제기하는지에 대해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계획의 본질과 한계, 세속국가의 개념, 교육의 특성과 목표, 사회내에서의 가족의 위치 등과 같은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국가들이 걱정하는 긴급한 문제들은 그 문제들에 관해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인류에게 하고 있는 일의 의미에 대한 증언을 해야하는 것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증언은 말하자면 교회가 만들어낸 증거가 아니고 교회 안에 거하는 성령의 주권적 활동일 때만 나타난다. 교회가 하나님의 목적에 대해서 이야기하려고 애써왔던 것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빛으로서의 권위를 가지고 성령은 단순한 충성의 조그만 조각이나 무지한 말을 사용해서 기대하지 않은 방법으로 기대하지 않은 장소에서 증언할 수도 있다. 따라서 교회는 어떻게 혹은 무엇을 말해야 할지를 걱정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모든 삶이, 심지어 중요하지 않아 보이는 세부적인 것 조차, 하나님의 성령의 주권적인 다스림에 열려있는지를 걱정해야 한다.

 

(D) 마지막으로 마가복음의 13장 전체는 적그리스도의 세력들이 하나님의 왕국에 대항해서 자신들의 모든 힘을 집결시키고 결국 패배하게 되는 최종적인 끝으로 하나님이 모든 것을 이끌고 있다는 확신으로 가득 차 있다. 양극화의 과정은 마지막을 향해 가고 있다. 갈등은 더욱 첨예해지고 결정은 더욱 다급하게 된다. 완벽한 세상을 향한 점진적으로 오르막은 없다. 세상의 역사는 자신의 구원의 비밀을 자신 안에 담고 있지 않다. 교회는 비록 세상의 역사 안에 내재해 있고 속해 있으며 그 역사의 진정한 시작과 종말을 증거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증거가 그 이야기 안에 단순히 내포되어 있지 않은 종말에 대해 증거한다는 의미에서 세상 역사와 구별되어 있다. 그러므로 인간의 역사 안에서 인간에 대한 교회의 관계는 단순히 결속의 관계만이 아니고 분리의 관계이기도 하다. 여기서 또한 교회는 자신에게 주어진 직무를 다할 때 인간과의 결속을 통해서 인간들에게 신적인 심판을 선언한 주님을 따른다. 주님의 십자가는 죄인인 사람들과의 완전한 동일시의 궁극적인 표지임과 동시에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완전한 거부가 분명히 드러난 지점이기도 하다. 아마도 이 이중적인 특성은 단순한 의미의사람과 다니엘이 하늘의 구름과 함께 오는 것을 본 신비하고 초자연적인 인물을 모두 뜻할 수 있는인자라는 모호한 칭호를 선호하는데서 드러난다.

 

앞의 단락들이 기독교 선교활동의 세상과의 관계에 대한 성경적인 가르침을 전체적으로 다루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장의 반추는 우리가 시작에서 제기했던 질문에 대해 성경이 무엇이라고 이야기하는지를 우리가 들을 수 있는 지점까지 우리를 이끌고 왔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제기한 형태로 정확히 우리의 질문에 성경이 답을 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성경은 언제나 우리로 하여금 관점의 변화를 요구하는데 이것은 시간과 인내가 필요로 하는 일이다. 이 장의 관점에서 볼 때 우리의 주장은 우리가 묻고 있는 질문들을 조명하는 삼위일체 신앙의 통일성과 연관성을 우리가 이해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 질문들은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은 세상의 역사 안에서 일하고 있는가? 그리고 어떻게 교회의 선교 과업이 세상 역사안에서의 하나님의 일과 관련되어 있는가? 하는 것이다.

 

부정적인 시각에서 성경의 관점은 우리의 마음속에 대개 존재하지만 검증되지 않은 특정한 가정들을 제외시킨다.  먼저, 역사를운명의 충돌, 인간의 영(의심할 여지없이 신적인 영의 도움을 받는)과 환경의 힘들의 싸움으로 보는 오래된 이교도의 그림은 거부되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명백히 나타나고 우리의 마음속 있는 성령의 임재를 통해 알게 되는 동일한 하나님이 만물과 사건들의 모든 뼈대를 창조했고 다스리는 하나님이라는 것이 삼위일체 신앙의 핵심이다. 두번째로 성경은 세계 전체가 점진적인 진보의 과정을 통해서 좀 더그리스도를 닮은곳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 대한 어떠한 근거도 제공하지 않는다. 따라서 기독교 선교활동이 이러한 의미에서이 흐름과 함께 하게 될 것이라는 견해에도 근거를 제공하지 않는다. 세번째로,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는 어떠한 구원의 이름도 알지 못한다. 하나님이 세상 역사의 힘들을 지도하고 사용한다 할지라도 이러한 힘들은 구원에 관한 어떠한 대안적 혹은 보완적인 방법을 포함하고 있지 않다. 하나님의 세상을 위한 목적은 택정 그리고 선택의 방법으로 진행된다. 그리고 선택되고 사랑받는 이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긍정적으로는 우리가 묻고 있는 질문들과 관련된 성경의 가르침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가 만물의 시작이요 끝이고, 역사 한가운데로의 그의 도래는 역사의 끝에 관한 계시이고, 따라서 이 도래는 모임과 흩어짐, 종말과 심판의 이중적 과정을 촉진한다는 것이다. 세상에서의 교회의 선교는 그 이중적 과정을 역사를 통해서 그 끝이 이를 때까지 지속하는 것이다. 교회의 전체적 선교의 틀 안에서의 특정한 종류의 활동이라는 의미에서의 선교활동은 새로운 인간 공동체들이 이 과정이 진행되는 영역안으로 들어오도록 하는 수단이다.

 

그러나 이러한 담대한 주장들은 예수가 누구인지에 대한 완전한 진술의 문맥, 다른 말로 하면 삼위일체 신앙의 문맥안에서가 아니면 제대로 이해될 수가 없다. 성부만이 시간과 때를 알고 그것들을 결정한다. 보냄을 위한 시간이 무르익었을 때 성자를 보낸 이가 바로 성부이다. 인간의 역사가 예수에게로 집중되도록 하는 방법으로 인간의 역사의 사건들을 다스리는 이가 바로 성부이다. 그의 이름으로 보냄을 받고 그의 보냄의 연장선인 교회는 단순히 자신의 확신들을 선전하기 위해서 낯선 세상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다. 교회는 주님인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에게 속해 있고 다스림을 받는 세상으로 나아가며 그를 선포함으로 세상의 진정한 끝을 알린다. 그렇게 함으로 인해서 교회는 주님의 경험을 자신의 삶 속에서 지속적으로 반복한다. 그의 도래가 모임과 흩어짐, 베드로의 제자됨과 게바의 적개심을 촉진시켰던 것처럼 교회의 선교안에서도 그와 같은 이중적 경험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 경험은 전체적으로 성부에 의해서 다스려진다.  인간이 삶을 영위하도록 충분한 안정성과 질서를 통해서 세상을 보존하고, 의인과 불의한 자 모두를 위해서 비를 내려주고, 추수때까지 알곡과 쭉정이가 함께 자라도록 허락하며, 인간이 예수를 그들의 주님으로 받아들이든지 아니면 거부하든지 할 수 있는 충분한 인간의 자유를, 짧게나마, 유지해 주는 이가 바로 성부이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인간을 이 선택과, 교회의 충성과 변절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존재의 마지막 쟁점으로 인간을 몰아가는 세상 역사의 중요한 사건들로, 그리고 진정한 오메가에 대한 질문 즉 그리스도 혹은 적그리스도의 질문으로 이끄는 역사의 흐름을 주장하는 이도 성부이다. 성부는 그가 선택하는 어떠한 방법을 통해서든지 만물과 모든 일들을 다스린다. 그는 교회에 구속되지 않는다. 그를 섬기도록 하는 어떠한 것이나 그 누구도 사용하고 또 사용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일하는 것에는 준거점과 가시적인 중심이 있다. 완전한 하나님임과 동시에 사람이고 영원하나 역사의 일부인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그 오메가이다. 궁극적인 쟁점들이 인간에게 제시된 것은 특정한 장소와 시간에 사람으로서 육신을 입고 온 그의 도래를 통해서이다. 그리고 이 쟁점들이 인간의 자각과 의지적인 시인이나 거부를 위해서 계속 새롭게 제시되는 것도 교회의 선교적 사역을 통해서 인간에게 오는 그의 지속적인 도래를 통해서이다.

 

그러나 이 지속적인 도래는 단순히 교회의 사업이 아니다. 이것은 성부와 성자와 함께 하는 이인 살아있는 성령의 사역을 통해서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도래를 새롭게 재현시키는 성령의 지속적인 사역의 외향적인 형태이다. 인간이 예수를 주로 시인할 수 있고 따라서 모든 사건들의 주권적인 지배자가 성부인 것을 알 수 있는 것도 성령의 임재를 통해서이다. 성령은 하나님의 목적의 성취의 증거이다. 그의 안에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만물이 완전하게 되는 것을 미리 맛본다. 그에 의해서 만물의 완전함이 우리가 소망하는 대로 이루어질 것이라는 확증을 갖게 된다. 따라서 그렇게 살고 행동하는 사람들은 비록 의도치 않은 말이나 행동을 통해서라도 그들이 살아가고 있는 소망 안에서 그 완전함의 증거가 된다. 이 증거는 근본적으로 종교적언어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전체적인 세상에서의 삶에 관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인성 안에서 모든 것을 마무리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의지에 대한 증거이기 때문이다. 성령이 다스리는 곳에서는 말과 행동이 세상 역사의 평범한 사건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를 바라는 숨겨져 있는 희망에 대한 증거가 된다. 이는 성령이 모든 것을 다스리는 성부와 모든 것이 그 안에서 완전하게 될 성자와 함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부의 목적에 대해 교회의 삶 안에서 증거하는 이인 성령은 교회의 경계에 국한되지 않는다. 선교사들이 경험하는 것과 같이 사도행전은 성령이 교회에 앞서서 간다는 것을 분명히 가르친다. 고넬료와 같이 모든 세대와 민족의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받아들이도록 이전부터 기적적으로 준비되어왔다. 그러나 성령과 성부가 하나이므로 성령의 이 사역은 교회를 제외하는 하나님의 새로운 방법이라는 뜻이 절대로 아니다. 이 것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준비하는 것이고 교회는 성령이 인도하는 곳으로 따라 가도록 언제나 준비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유사하게 성부가 만물을 다스리고 진정한 종말로 이끄는 신적인 다스림은 교회의 행동이나 이해를 훨씬 뛰어넘는 것이다. 그러나 성부가 성자와 성령과 하나이기 때문에 사건들에 대한 신적인 다스림은 하나님이 교회 안에서 하고 있는 것과 별개로 진행되거나 혹은 대체하는 것이 아니다. 이 것은 이미 언급된 이중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인간이 삶을 영위하고 자신들의 결정을 할 수 있는 자유의 영역을 보존하는 것과 인간이 자신들의 최종적인 운명에 관한 결정을 하도록 이끄는 것이다. 이 것이 교회의 사역에 한정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 것의 궁극적인 목적은 인간을 그리스도안에서 자신들의 진정한 운명을 받아드리도록 하는 것이기 때문에 교회로부터 분리되지도 않는다.

 

우리는 이 논의를 모든 민족을 위한 교회의 선교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에의 참여라고 요약할 수 있다. 그 안에서 그리스도는 인간들에게 자신들의 진정한 종말에 관한 결정을 하도록 도전하는 자신의 사역을 계속한다. 그 사역은 그리스도가 성육신한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들이 종말을 당면하게 되는 지점이 된다. 하나님의 나라가 손안에 들어온 것이다. 그러나 선교는 그리스도의 사역이 그랬듯이 표면적으로는 선교를 좌우하는 것같은 사건들을 다스리고 결정하며 유일하게 자랄 때와 추수할 때를 결정하고 알고 있는 성부에 의지해서 성취된다. 선교를 좌우하는 표면적인 상황들에는 고통, 패배, 배교, 거짓 메시아적 주장들의 등장 등이 반드시 포함된다. 성공은 추종자들의 수나 문제들에 대한 가시적인 영향의 범위로 측정될 수 없다. 교회의 선교적 증거의 중요성은 이 지점에 놓여있다. 그 장소는 바로 하나님의 나라의 실제와 능력을 인간이 마주하는 곳이다. 나머지는 성부의 손에 달려있다. 교회는 충성되기만 한다면 그것 만으로 충분하다. 그러나 이것도 걱정할 거리가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증거는 인간의 일이 아니라 성령의 일이다. 하나님의 선교는 인간의 개혁운동의 방식을 따라서 추진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인간의 삶을 이루는 모든 사건의 미로들을 가지고 하는 일, 즉 모든 것이 그의 안에서 창조된 그리스도안에서 만물을 매듭짓는 것에 대한 성령의 증거 안에 교회가 참여하는 것이다.

 

이러한 믿음이 우리로 하여금 자유롭고 책임있는 행동을 할 수 있도록 한다. 이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하는 일이 무의미함의 심연에서 길을 잃는 것이 아니고 역사를 위한 하나님의 목적의 성취에 참여하는 것임을 확증해준다. 이 믿음은 한편으로 역사 안에서의 하나님의 전체적인 행동에 관한 믿음에 근거하지 않는 약속에 의해서 포위된 낙관주의와 비관주의의 양자 택일로부터 우리를 구한다. 이 믿음은 또 한편으로는모든 날과 시간을 성부의 손에 맡기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는 과열된 종말주의로부터도 우리를 구한다.  이 믿음 안에서 결과와 상관없이 우리는 하나님의 사역을 함께 하고 있고 그의 즐거움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 그리스도를 주로 선포하기 위해서 온 민족으로 나갈 수 있다.



[1] 만약에 마가복음 13:14-23과 누가복음 21:2-24의 차이가 AD70년에 일어난 사건에 비추어 누가가 마가자료를 새롭게 쓴 것의 결과라면, 이 것은 동일한 논점을 좀 더 분명히 입증한다. 신약성경이 역사의 사건들을 묵시적인 시각에서 해석한 것은 특정한 사건들이 종말과 동일시 된다거나 혹은 특정한 인물들이 적그리스도와 동일시된다는 것을 암시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