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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반공/삼선교: 삼위일체적 선교와 교회

뉴비긴의 "오늘날의 선교를 위한 삼위일체 교리" 3

뉴비긴의 책 '오늘날의 선교를 위한 삼위일체 교리' 3장에 대한 반추입니다. 3장이 좀 길기도 하지만 그 내용을 잘 소화하는 일이 쉽지 않아 시간 좀 걸렸습니다. 한 달에 한 장씩은 올려야 하는데 조금 늦었네요. 대신 좋은 반추의 시간이 되기를 빕니다. 이번에도 한종석 선생님이 어려운 내용을 잘 번역해 주셨으니 아래 첨부한 전문을 꼭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3. 오늘을 질문하는 이유들: 선교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Occasions for Questioning Today: Where are Missions Going?)

3장에서 뉴비긴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과 하나님께서 교회의 선교 활동 안에서 하시는 일과의 관계에 대해 다루고 있다. 아마도 당시 하나님의 선교라는 논의가 지나치게 치우치고 있던 상황, 즉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 자체가 하나님의 선교라는 주장에 근거하여 하나님> 세상> 교회 라는 도식을 한 쪽에서 주장하는 상황에서 뉴비긴  답게 균형적인 시각, 그리고 균형을 넘어서는 본질적인 관점을 잘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

1) The Christian world mission cannot command whole-hearted and continuing commitment unless through participation in it men and women are persuaded that they are participating significantly in what God is doing for mankind as a whole.

우리가 선교를 계속하는 혹은 그만두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한 개인이 선교를 이해하는 범위 안에서 결정될 것이다. 만일 교회를 세우는 것이 선교라고 이해한다면 교회를 세울 수 없는 아프가니스탄의 산지 무슬림 종족에서 사역을 하기는 어렵다. 우리가 선교를 그만 두는 혹은 지속하고 있는 이유는 그것이 내가 생각한 선교가 아니거나 혹은 내가 생각한 선교이기 때문일 것이다. 비록 개인이나 교회가 선교에 뜨겁게 헌신했을 지라도 그 헌신한 선교의 범위에 의해 선교의 지속성 여부가 결정된다는 말이다. 뉴비긴은 전심으로 그리고 지속적으로 선교에 헌신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참여하는 그 선교가 하나님께서 전 인류를 향해 하시고 있는 일에 참여하고 있다고 설득되어야 가능하다고 말한다. 만일 우리가 하는 일이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하나님께로 회복시키고 계시는 일의 일부라고 확신할 수 있다면 눈에 보이는 결과에 상관없이 혹은 어려운 상황에 상관없이 우리는 그 선교를 전심으로 지속할 것이다뉴비긴은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선교는 그저 우리 자신이 '잘 될 꺼야' 혹은 ' 이건 안되겠는데' 또는 '이건 영 불안한데' 혹은 '아주 희망이 보여'라고 판단하는 정도의 일이 아닐 뿐더라 '참 좋은 일 하시네요'라고 하면서 누군가 후원해 주는 정도의 일이 아니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역사 가운데 일하시는 전체의 계획 안에서 우리가 하는 일이 의미를 가질 수 있어야 지속적 헌신이 가능하다는 이야기다.

2) There cannot be sustained conviction in the prosecution of the missionary task if there is not some illumination - by faith, not by sight - of the way in which this task is related to God's whole purpose for the world. It is perhaps at this point that we may find the occasion for the present hesitancy in the missionary movement. For we have recently passed from a time when it seemed rather easy to interpret the place of the Christian world mission in the secular history of mankind to a time when it seems more difficult.

나는 개인적으로 선교의 위대한 세기라고 불리우는 19세기와 하나님의 선교 논의가 시작된 20세기의 선교를 잘 관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위대한 세기의 선교가 2번에 거친 세계 대전을 지나면서 축소되거나 사라진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위대한 세기의 선교에서 비본질적인 혹은 상황에 기댄 부분이 있었을 것이고 그것을 반추하여 오늘날 우리의 선교에서 그런 거품에 속한 부분을 다시 반복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뉴비긴은 2번의 대전 후 선교 운동이 '주저함'을 보이는 것에 대해 그 부분을 지적하고 있다. 선교의 위대한 세기에서는 세속 역사와 선교 역사가 마치 동일한 것처럼 발전을 거듭했다. 그러나 발전이 퇴보한 것 처럼 보이는 시대에 선교와 세상 역사는 어떻게 조화를 이룰 것인가? 조화를 이룰 수 없어 세상의 역사와 관련성을 포기하고 기독교 내부 복음으로 더욱 보수화되어 '복음화'라는 명분으로 축소된 복음을 전하면 우리가 하는 선교는 그 역할을 다하는 것인가? 우리가 하는 선교가 하나님의 전체적인 목적 - 세상의 역사를 포함하여 - 안에 의미를 찾지 못하면 선교의 지속성이 없어 뉴비긴이 지적한대로 '주저함'을 보이거나 - 적어도 주저함을 보이는 것은 선교를 그 전체적인 역사 안에서 찾아야 한다는 전제는 가지고 있는 것이다. - 혹은 주저하지 않고 선교를 세상과 결별하고 우리가 무언가를 선포하는 내부적인 것으로 범위를 축소하여 말그대로 '용감'해 질 것이다. 뉴비긴은 전자를 지적했고 나는 개인적으로 후자를 걱정한다.

3) 뉴비긴이 이 글 안에서 간단하게 정리한 선교 대회와 논의

뉴비긴은 이 장에서 다루는 주제와 관련하여 선교 대회에서 어떻게 그 논의가 변천되어 왔는지 소개한다. 우선 1910년의 에딘버러 대회에서는 세계 복음화를 '당장' 이루자는 분위기였고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한다는 것이 주요 주제였다. 1928년 예루살렘 대회에서 여전히 하나님의 나라를 강조하면서 그 하나님의 나라는 '그리스도를 닮은 세상'이기 보다 '새로운 하늘과 새로운 땅'이라는 관점에서 이해되었다. 1938년의 탐바람 대회는 교회의 세계 선교라는 주제가 강조되었다. '교회 중심의 선교'라는 인식이 강조된 대회였다. 1952년 윌링겐 대회에서 선교에 대한 이런 교회 중심적 이해에 비판이 제기 되었다. 이러면서 제기된 질문은 '하나님께서 우리 시대의 사건 안에서 행하시는 일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하는 것이었다. 1961년의 뉴델리 대회에서는 이 부분에 대한 논쟁이 있었다. 타종교와의 진정한 대화를 해야한다는 주장이 있었고 다른 한편에서는 이런 주장이 혼합주의의 위험을 가져 온다고 보았다.

한 마디로 정리하면 선교를 교회가 끝낼 수 있다는 인간 중심의 교만한 시각과 그 반대 방향에서 하나님 선교와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을 동일시여기는 지나친 극단 사이에서 이리저리 오가는 방황의 시기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4) It must be confessed that in some of our thinking about the task of missions we have taken a wholly unbiblical view of the world. We have spoken as though the affairs of secular history concerned us only when they either assisted or impeded the work of the Church. . . . But if we avoid the errorof denying God's work in the world outside the Church, we have also to avoid the opposite error, which is so to identify the dynamic movements of secular history with the work of God that one judges the 'relevance' of the work of the Church by the measure in which it relates itself to these movements.

우리는 세상의 역사를 이해할 때 우리의 기준에서 기독교에 혹은 더 축소해서 말하자면 선교에 도움이 되는 영역에 대해서만 '하나님의 역사'라고 취사선택해 왔다. 한류가 동남아를 휩쓸 때 우리는 한류가 선교를 위해 하나님께서 일으키신 운동으로 말하는 것을 서슴지 않았다. 역사를 취사 선택하여 하나님의 선교를 말하는 것은 취사선택하지 않은 부분에 대해 하나님이 하신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암묵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뉴비긴은 그것이 완전히 비성경적이라고 지적한다. 반대로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하나님의 일하심이라고 동일화 시켜 버리는 것에 대해서도 뉴비긴은 경고한다. 그럴경우 교회가 하는 사역이 적절한가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운동에 적실한가로 판가름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 두 극단을 어떻게 벗어 날 수 있는가?

5) In the older Churches of the West it may well be that syncretism is the real danger; . . . But this kind of syncretism is not a living danger in the Churches of Asia. Here the danger, as their leaders have often pointed out, is 'ghettoism' - a practical withdrawal into the position of a tolerated and static minority, a cultural and religious enclave within the majority community. Correspondingly the great need is to find ways of breaking out of this isolation and of entering into real dialogue with the men of other faiths who are wrestling with the problems of the mordern world and who are seeking resources to meet its demands.

그 두 극단의 문제는 소위 '대화'라는 주제까지 이어진다. 하나님의 선교를 세상과 동일시하는 입장을 따라가다보면 대화는 우리가 가진 믿음의 포기라는 지점까지 열게 된다. 반대로 역사를 취사선택하고 '선포'만을 강조하는 소극적 입장에 서게 되면 대화는 '혼합주의'를 낳게 된다고 비판한다. 이 문제를 평면에 놓고 이것이 옳으냐 저것이 옳으냐의 문제로 접근하는 대신 뉴비긴은 서로 다른 상황에서 이 문제를 바라보도록 도와준다. 뉴비긴은 분명 그리스도까지 양보하는 대화를 거부한다. 그리스도의 유일성은 뉴비긴의 흔들림없는 기초이다. 그 동안 기독교 문화를 구축하고 기독교가 주류였던 서양 세계에서 이러한 타종교와의 대화를 용납하기 어려운 이유는 그러한 새로운 사상으로 인해 자칫 혼합주의 신앙이 만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역으로 말하면 기존 기독교 국가의 교회들은 새로운 사상을 염려해야 하는 수동적 상황에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런 면에서 한국 교회는 서양 교회가 아니면서 서양 교회가 처한 패러다임을 닮아 있다. 다가오는 상황에 대해 상당히 보수적이고 수동적이다. 하지만 선교지의 교회들의 상황은 혼합주의를 염려해야 할 상황이 아니라고 뉴비긴은 설명한다. 기독교가 소수 종교인 선교지의 상황에서 다른 종교와의 대화는  필수적이다. 적극적으로 격려해야 할 상황이다. 왜냐하면 소수이고 심지어 핍박을 받는 상황이다 보니 안으로 더 훔츠려 들어 게토화가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혼합주의라는 신학적 토론이 아니라 나가지 않고 머물러 있는 교회가 교리를 지키다가 선교적 상황을 상실하는 율법 중심의 유대인처럼 될 수 있다.  

6) 뉴비긴은 마지막으로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과 하나님이 교회의 선교적 활동 안에서 하고 있는 일과의 관계에 대해 몇가지 질문을 하며 3장을 매듭짓는다. 기독교인이 줄고, 기독교가 영향을 미치는 영역이 줄고 그나마 존재하는 기독교인들도 서구에서 도움을 받으며 살아가는 별로 위협이 되지 않는 소수의 사람들로 인식되는 상황에서 선교는 어떠해야 하는가?를 묻고 있다. 선교는 이제 한 두 사람을 공동체에서 빼내면서 첫 열매로 보고하는 방식대신 무언가 근본적인 변화를 해야 할 상황을 맞이 하고 있다고 느끼게 되는 것은 뉴비긴 시대와 우리 시대가 닮은 꼴 이기 때문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