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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반공/삼선교: 삼위일체적 선교와 교회

혼합된 연료

 

뉴비긴의 '오늘날의 선교를 위한 삼위일체 교리'를 묵상하는 가운데 있습니다. 앞에 보시면 서론과 1장에 대한 글이 있습니다. 번역된 책이 나와 있으나 원문이 어려운 탓도 있고 번역이 매끄럽지 못한 부분도 있어 그 책을 읽기가 쉽지 않습니다. 해서 '한종석' 선교사님께서 새롭게 번역하여 보내 주시고 계셔서 그 전문을 해당되는 곳에 올렸으니 전문을 보기 원하시는 분들은 다시 그 글로 가셔서 밑부분을 보시면 되겠습니다. 다음은 2장을 올릴 차례인데 잠시 쉬어갈 겸 (쉬게 될지 더 머리가 아플지 모르지만) 해서 OMF 선교사님이 쓰신 삼위일체 선교와 관계된 글 하나를 올립니다. 아래의 번역 본은 한종석, 이호연, 권성찬 등이 함께 묵상하며 번역하였음을 알려 드립니다. 중간 중간 빨간 글씨로 토를 답니다. 원문은 다음 링크로 가시면 읽을 수 있습니다. (http://www.worldevangelicals.org/resources/rfiles/res3_663_link_1347567468.pdf)

 

혼합된 연료 (Combined Fuel)

-       () 백성이 전() 하나님을 필요로 한다. (혹은 어떻게 하면 선교에서 삼위일체를 배반하지 않을 수 있나?) –

Rose Dowsett (OMF 선교사)

서론

 

당신은 삼위일체를 믿나요? 아마도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은 자신 있게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우리들 대부분은 삼위일체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를 포함하고 있는 교리적 원칙을 인정하는 교회나 선교단체에 속해 있습니다. 이 저널을 발간하고 있는 세계복음주의연맹의 선교위원회도 그와 같은 교리적 원칙에 동의하고 있습니다.

 

이 글은 삼위일체 교리의 성경적 근거를 제공하는데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교리는 교회 탄생 이래 정통 기독교와 고대 신조의 일부였기 때문입니다. 삼위일체 교리는 성경에 명시적으로 표현되어 있지는 않지만 분명히 내재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이 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문제는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가 실제로 믿는 것과 우리가 실제로 행동하는 것 그리고 선교가 무엇인지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어떻게 형성할 지와 선교의 정책과 전략을 우리가 어떻게 발전시켜 나갈지 등의 문제에 대해 삼위일체에 대한 믿음이 어떠한 영향을 주느냐는 것이지요. 이러한 질문 뒤에는 좀 더 근본적이 질문이 있습니다: 바로 왜 그리고 어떻게 복음주의 선교가 신학적으로 피상적이 되었는지에 대한 질문인데 이러한 복음주의 선교의 피상성은 주로 세속적 가치와 성경을 취사 선택함에 의해서 형성된 것입니다. 

 

여기서는 세속적 가치와 성경의 취사 선택이 가져 온 결과라는 지적에 대해 생각해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하고 있는 선교가 '잘 먹힌다'는 것과 '전략'이라는 미명하에 거룩한 선교를 세속적 가치로 도배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에 대한 반성 그리고 성경에 근거한다고 하지만 실제로 우리가 하는 일을 지지해 주는 것 처럼 보이는 몇몇 성경 구절을 취사 선택하는 소위 증거본문 찾기 (proof-text way)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에 대한 반성을 해 봐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천박함의 위기 (The crisis of our shallowness)

자동차의 연료계에 빨간 불이 들어오면 연료가 거의 바닥이 났다는 것과 만일 연료를 곧 주입하지 않으면 차가 곧 멈춰 설 것이라는 것을 당신은 알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복음주의 진영을 포함한 전세계의 교회가 신학적인 공허를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선교계도 예외가 아닙니다. 어떠한 경우에는 선교의 신학적 천박함은 심각한 문제를 야기해 왔습니다. 우리는 오염되고 흠이 있는 복음을 전달해 왔습니다. 

 

최근에 통찰력 있는 관찰자들이 우리의 신학적 천박함과 그것이 가져오는 결과에 대해 주의를 기울여 오고 있습니다. 데이비드 웰스는 그의 책 신학 실종’ (No Place for Truth, 부흥과 개혁사)에서 가슴 아픈 논평을 하고 있습니다. “신학은 문화 안에서 잘 지내고 있지 못하다. 왜냐하면 문화는 신학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신학은 교회 안에서도 잘 지내고 있지 못하다. 왜냐하면 교회는 신학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혹은 오스 기니스가 ‘No God but God’ (Moody, 1992)에서 말한 것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현재의 복음주의는 더 이상 진리의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 중 극소수만이 신학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 . . 전문화되고, 직업화되고, 무미건조한신학교 신학에 혐오감 느낀 복음주의자들은 관계적이며 치유적이고 은사주의적이며, 경영주의적인 (교회성장에서와 같이)면을 강조하면서 신학을 대치하고 있는 일련의 운동들에 매력을 느끼고 있다. 그것들의 덕목이 무엇이건 간에 이러한 강조점 어느 것도 진정한 제자의 삶과 사고에 요구되는 진리와 신학을 제공해 주지는 못한다”.   

 

신학이 문자 그대로 하나님의 속성과 지혜에 관한 학문이라면 진정한 제자도를 위해서 이것보다 더 기본이 되는 것이 있을까요? 그리고 선교의 실천과 선교지도자들의 책임에 있어서 하나님의 진리에 방향을 정렬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을까요? 이것은 우리가 입으로는 그럴 듯하게 교리를 말하고 실제로는 마치 교리가 없는 것처럼 행동하는 정신 분열적인 방식으로가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반하여 존재하고 행동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계속 측정하여, 우리 교회와 기관이 어떠해야 하는지, 결정은 어떻게 내려야 하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형성하는 진리와 원칙들을 위해서 그 불순물을 끊임없이 닦아내야 합니다.

 

신학을 무시하고 우리에게 이성이 아닌 계시로 알려져 성경에 계시되신 삼위일체 하나님을 중심에서 물러나게 하거나 아니면 주변에 계시게 함으로써 생기는 결과 몇 가지를 나열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ž   하나님이 중심에 계시지 않은 교회론은 사회학이 되어버립니다.

ž   하나님이 중심에 계시지 않은 다원론은 우상숭배가 되어버립니다.

ž   하나님이 중심에 계시지 않은 상황화는 문화인류학이 되어버립니다.

ž   하나님이 중심에 계시지 않은 해석학은 분파주의 (예를 들면 극단적 페미니즘) 혹은 철학이 되어버립니다.

ž   하나님이 중심에 계시지 않은 역사는 마르크스주의나 실존주의가 되어버립니다.

ž   하나님이 중심에 계시지 않은 전략은 행동주의가 되어버립니다.

ž   하나님이 중심에 계시지 않은 포스트모더니즘 혼돈이 되어버립니다.

 

사회학, 문화인류학, 철학 등이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하지만 예를 들어 사회학적 분석은 영적인 존재인 교회의 심오한 실재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교회는 단순히 사람들로 이루어진 기관이 아닙니다. 문화인류학은 인간에 대한 가장 중요한 진리 - 우리는 인격적인 하나님에 의해 그 분의 형상으로 그리고 살아 계신 하나님이 계획한 공동체적 교제를 위해서 창조되었다 -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 외에도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중심에서 밀어내는 것은 위험한 일이고 우리를 진리로부터 멀어지게 합니다.

 

물론 이러한 학문들과 사상들은 객관적이고 따라서 믿을 만하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것은 참된 객관적 실재에 대한 그릇된 이해에서 비롯됩니다. 참된 객관적 실재는 세속적인 구조가 아닌 성경적 구조 안에서 살아 숨쉬고 작동합니다. 그 어떤 것도 중립적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시스템은 어떤 전제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면에서 객관적 실재는 역설적으로 전념하고 있는 셈입니다. 자신들이 주장하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세속주의자들과 인문주의자들의 소위 객관적 실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성경적 객관적 실재가 중요한 이유는 이것이 세속적 구조가 하지도 할 수도 없는 방식으로 진정한 진리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실재는 이성 위에 있는 계시의 우선성을 강조합니다.

 

내가 반지성주의를 요구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오히려 완전 반대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소명을 완전한 지성의 열의와 정확함으로 추구함에 있어 우리의 전제들, 결정들, 정책과 실행을 말씀의 빛 아래서 끊임없이 면밀히 살피는 지속적이고 훈련된 습관 안에서 이루어져야 함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이것의 다른 편은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우리가 세속주의에 순응하는 것으로 이것은 복음을 완전히 배신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세계관 - 우리의 믿음, 가치, 목표, 방법 -의 모든 부분의 중심에 하나님이 계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세계관의 진정한 변화는 없습니다. 진정한 세계관의 변화가 없다면 한 두 세대 안에 복음의 전달도 사라질 것입니다. 

 

1980년에 열린 휘튼에 위치한 빌리 그래함 센터의 개관식에서 레바논 학자이자 외교관인 찰스 말릭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문제는 영혼만을 얻는 것이 아니라 지성을 구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온 세상을 얻고도 세상의 지성을 잃으면 당신은 곧 세상을 얻지 못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진실로 당신은 실제로는 세상을 잃은 것으로 판명될 것입니다.” 

 

교회 역사가인 라토렛은 기독교의 유례없는 지리학적 팽창으로 19세기를 그 유명한 위대한 세기로 불렀습니다. 그러한 맥락에서 20세기는더 위대한 세기로 불릴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20세기를불확실한 세기로 부르는 것이 더 정확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역적 확장은 깊이를 동반하지 못했고 전 세계 교회의 대부분은 범위는 넓지만 깊이는 없게 되었습니다. 깊이가 없는 교회는 우리가 이미 여러 곳의 교회의 붕괴에서 보았듯이 무너지기 쉽습니다. 같은 경향이 모든 대륙과 지난 50년간 교회가 급격히 성장한 많은 지역에서 명백하게 진행되고 있고, 다음 세대가 떠남에 따라 이제 심각한 손실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와, 굉장한 도전입니다. '신학 실종', 신학 보다는 운동에 근거한 선교. 생각해 보면 저 역시 1980년대 중반에 선교에 헌신하였는데요. 시간이 지나서 제가 선교에 헌신할 때 서 있던 시대적 자리가 어딘가하고 뒤돌아 보니 - 물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전적으로 믿습니다. - 선교 신학 혹은 성경적 통합성에 근거했다기 보다는  당시 한창 수입되던 선교 운동에 근거했음을 보게 됩니다. C. S. 루이스가 말하기를 우리가 보는 것은 우리가 어디에 서 있는지에 따라 그리고 우리가 어떤 사람인가에 따라 달라진다고 했습니다. 전자는 위치를 말하는 것이고 후자는 보고 싶은 것만 골라보는 자기 중심성을 지적하는 문장이라 생각합니다. 운동은 중요한 부분이긴 하지만 운동에 휩쓸리면 '무뇌' 현상이 벌어지고 '어? 내가 여기 왜 있지?'라고 할 때는 이미 많이 온 후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우리의 근거가 '신학' 즉 온전한 의미에서의 '성경적'이 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근대 선교 운동 역사에 대한 반성 (Some reflections on the history of the modern mission movement)

 

역사는 유익하며 우리가 현재를 이해하도록 도와줍니다. 여전히 우리 그 일부인 근대 선교 운동은 대부분 18세기의 경건운동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 아래서 이 운동은 새로워진 생명을 교회로 인도하는 도구로 크게 사용되었는데 당시 교회는 공식적인 교회였고 현대 합리주의, 이신론 (자연신론) 그리고 인문주의에 의해 형성된 교회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한 반작용으로 이 운동은 개인의 믿음과 경건을 강조하였으나 신학의 넓은 폭은 대부분 무시하였습니다.  

 

결과적으로 새롭게 일어난 복음주의 그리고 특별히 우리의 관심사인 새로운 복음주의 선교는 공통적으로 엄청난 헌신과 활동력, 현저한 행동주의를 보여주었으나 상대적으로 사상가나 선교신학자 (몇몇 위대한 예외를 제외하고)는 거의 배출하지 않았고 선교의 기초는 몇몇 성경구절에 국한되는 경향을 보였습니다. 또한 부분적으로는 단일신론에 대한 반발로 강한 기독론의 경향을 띠었으나 충분한 삼위일체론은 거의 없었습니다. 

 

더 나아가, 19세기의 대부분과 20세기의 선교는 신앙 부흥 운동에 기초하였습니다. 이것은 많은 사람들이 최소한 기독교의 믿음과 관행 그리고 자신들의 문화에 대한 기독교의 영향에 친숙한 기독교 국가(Christendom)의 상황에서는 아마 적절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완전한 이교도 혹은 또다른 세계 종교의 상황으로 옮겨졌을 때에는 세계관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하거나 서양 문화와 복음을 혼합해버리는 재앙을 낳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공동체적이기 보다는 개인주의적이었고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확실히 드러냈음에도 충분히 삼위일체적이지 않았습니다. 

 

주 예수에 대한 사랑으로 살았던 많은 앞선 선교사들의 헌신을 존경하고 경의를 표하기 때문에 나는 지나치게 비판적이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긍정적인 면은 보지 않고 그저 비판만 하는 것은 유행을 따르는 것일 수는 있으나 옳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에 대한 강조, 즉각적인 개종과 믿음의 고백, 그리고 복음 전파의 시급성에 대한 전적인 몰두는 지적 확장을 용인하지 않았고 삶의 모든 영역에서의 전생애에 걸친 점진적인 제자도를 무시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세계관의 대부분 영역이 성경적 진리와는 조화되지 못한 채 도전을 받지 않고 남아 있게 되었습니다. 대부분의 진지한 신학은 비복음주의 진영의 것이 되었습니다. 결국 너무나 자주 신학은 그리스도인의 제자도 그리고 실제로 성경으로 부터도 분리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자신을 복음주의자로 여기는 사람들의 스펙트럼이 너무나 넓어져서 더 이상 그 용어가 정확히 무슨 의미를 갖는지 알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전통적인 교리적 원칙에 최소한 이론적이나마 동의하는 사람들 가운데에서조차 신학적인 명확함이 비탄할 정도로 결여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20세기 중반 무렵과 그 이후에 선교에 있어 신학적인 모호함에 영향을 주는 두 가지 주요 요소가 추가되었습니다. 

 

먼저, 많은 복음주의 선교계 안에서 행동 과학 - 문화인류학, 방법과 전략, 측정가능한 결과에 주안점을 두는 것, 리더십의 비즈니스 경영 이론 등 -이 점점 정책과 실천을 결정하는 주체로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것들이 신학을 제치고 지배적이 되었습니다. 이 중 어떤 것들은 도구로 유용할지 모르지만 그것들이 성경적 선교학의 자리를 차지하고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할 지를 결정을 하게 될 때 매우 혼란스럽게 됩니다. 그러한 것들은 또한 끊임없는 (그리고 소모적인) 유행을 만들어 냅니다 - 미전도종족, 10/40, AD 2000운동, 동질집단 원리 등이 그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이 유용한 통찰을 제공하지만 그것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그 사례들을 과장하고 그 잣대를 통해서 모든 것을 보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두번째는 은사주의 운동입니다. 많은 은혜를 불러왔음에도 불구하고 이 운동은 많은 복음주의자들 사이에서 객관적인 진리와 주관적인 경험 간에 상관관계가 거의 없는 기능적인 이원론을 만들었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이 확장되는 오늘날의 상황에서, 최소한 영국에서는, 이 운동은 교회와 선교에 심각한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영성에 대한 관심이 확산되고 있는 가운데 심지어 공공연히 믿음을 고백하는 기독교인 가운데서도 이런 현상은 그 현장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분리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되게 되었습니다. 은사주의는 아마도 삼위일체 하나님의 객관적 실재보다 자신과 자신의 만족을 더 중요시 여기는 현대 후기 계몽주의의 전제와 더 관련이 있어 보입니다.  

 

근대 선교 운동의 배경을 보면서 그것이 공헌한 부분은 그대로 평가하더라도 그것이 가져 온 빈 공간에 대한 적절한 지적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선교가 부흥으로 부터 시작되는 것은 당연한 시작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부흥이 없다면 선교라는 거룩한 사역에 헌신하는 일 조차 없을 테니까요. 저 개인적으로도 개인적인 부흥이 있었기에 삶을 선교사로 드리기로 헌신한 것이니까요. 하지만 그것이 시작은 될 수 있어도 모든 것을 정당화 하는 근거로 작용하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시작된 것이지 그것이 끝이 아니니까요. 시작한 이 후 치열하게 하나님의 말씀 (성경적, 신학적, 선교적)을 온전하게 이해하고 반추하는 소위 '반추하는 실천가'의 길을 걸었어야 했는데 '하나님께서 선교사로 부르셨어'라는 하는 확신이 지나쳐 이러한 묵상과 숙고 보다는 사역과 행위와 과업에 치우친 것이 아니었는지 반성하게 됩니다. 개인적으로야 혹 그럴 수도 있겠지만 선교계 전반에 거쳐 이런 운동과 은사 중심으로 치우쳤다면 시간이 지나 곳곳에서 문제가 발생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됩니다.

 

초대교회로 부터의 교훈 (Some lessons from the early church)

 

우리가 삼위일체의 진리로 부터 멀어지는 이유들 중의 하나는 비교 불가능한 오직 하나뿐인 카테고리를 우리가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삼위일체에 대한 거의 대부분은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범위 너머에 있고 물 공기 얼음과 같은 비유는 거의 가치가 없습니다. 삼위일체를 논하는 것은 사람들을 복음으로 부터 멀어지게 하고 특히 무슬림들에게는 너무 불쾌하게 들려 아예 이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 것이 좋다는 주장이 자주 제기됩니다. 

 

그렇다면 초대교회가 어떻게 대처했는지 보는 것으로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한 복잡한 문제로부터 도망가는 대신 신약성경의 많은 부분은 성부 하나님과 함께 계시는 성자 성령 하나님의 거룩한 정체성을 확증하는 것이 중심 논증이었습니다. 만약 성자께서 영원히 완전한 하나님이 아니시고 성육신 하신 완전한 인간이 아니시라면 대속은 없었을 것이고 십자가는 다른 많은 죽음들 사이의 또 다른 후회스러운 죽음이었을 것이고 부활은 공허한 넌센스였을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완전한 하나님이 아니시라면 이전 삶을 벗어 버리고 창조된 새로운 삶은 가능하지 않을 것이며 지금 여기에서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은 존재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초대교회가 유대인들을 격노하게 한 것은 분명히 예수와 성령에 관련된 주장이며 같은 삼위일체에 대한 주장으로 이교도와 다원주의 이방 세계를 도전하였습니다. 비록 복음을 나누기 위해 접촉점을 만들기 위한 방법이 이따금 다양화 되고 상황화 되었다고 해도 말이지요. 서로 다른 다양한 세계관으로 인해 교회의 초기 공회들은 삼위일체 교리를 명확히 하는 것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삼위일체는 필요한 때만 인정되는, 우리를 당황케 하는 문제가 아니라 복음의 기초였습니다. 예수와 성령의 완전한 신성의 확증이 없이는, 세 개의 인격으로 이루어진 하나되신 하나님을 주장하지 않고서는 - 이 신비와 난해함을 이해하기 힘들다고 해도 -, 이러한 진리를 인정하지 않고서는, 서로 다른 신들과 영들의 존재를 경쟁적으로 주장하는 세계에서 예수와 성령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습니다. 

 

신약 성경에서 가장 어렵고 복잡한 기독론 구절들이 골로새서 1장에 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골로새 교회는 단일신론자인 옛 유대인과 다신론자인 이방인들이 모인 작은 교회로 두 부류 모두 삼위일체의 진리를 이해하기에 상당한 어려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의 영원한 신성과 그의 사역에 관한 심오한 선언을 대담하게 채워 넣었고 각각 하나님이신 성부 성자 성령을 조화시켰습니다.

 

초대교회가 그러했던 것 같이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놀랄 만큼 다양한 종교와 신념, 철학을 마주하고 있는 이 때에 삼위일체의 진리는 우리가 잊어야 할 것이 아니라 복음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무슬림들, 불교도들, 힌두교도들, 이교도들, 세속주의자들 혹은 그 누구와 더불어 살고 일하던지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원한 삼위일체 하나님 가운데 한 인격으로 꼭 붙들고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그의 정체성의 기초입니다. 초대교회와 교부들은 그리스도가 성부보다 낮은 존재이고 성령은 더 낮은 존재라는 계층적이고 예속적인 이론에 저항하는데 자신들의 정열을 쏟아 부었습니다. 이것은 괜한 트집잡기가 아닙니다. 그들은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 복음에 대한 완전한 배반이고 교회를 이방종교의 한 형태로 변형시킬 것을 너무나 잘 알았습니다. 너무나 중대한 문제였습니다.

 

기독교제국(Christendom)의 붕괴 그리고 세계가 비 진리의 포로가 된 이 때에 우리는 다시 한번 가장 시급하게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계시의 토대인 이 진리를 움켜 잡을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 일에 더 대담해 진다면 우리의 증언은 더 신실하고 날카로워 질 것입니다.

 

초대교회가 삼위일체라는 진리를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했는지 역설하고 있습니다. 선교와 삼위일체라는 주제와 관련하여 여러 주장이 있겠으나 우선 당장 두 가지의 입장이 삼위일체를 약화시킨다고 봅니다. 하나는 삼위일체가 서방교회에서 만들어진 개념이기 때문에 원래 - 유대적 기독교 -는 없던 것이고 그래서 이러한 후대에 생긴 개념을 이슬람과 같이 오히려 유대적 기독교와 더 가까운 종교 공동체에서 강조할 필요가 있는가 하는 주장 (한스큉이 이런 주장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런 강조가 필요없다라는 의견이기 보다는 좀 더 대화의 문을 열자라는 취지에서 그런 주장을 한다고 봅니다.) 또 한 주장은 아주 실천적인 의미에서 수용자 중심으로 생각할 때 그들이 이해하기 어렵다면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쉬운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 하지 않은가? 라는 주장입니다. 진리를 다소 손상하더라도 말입니다. 하지만 오늘날과 같이 다양한 사고가 상대적 관점으로 존재하는 시대에 명확한 진리가 아니고서 어떻게 복음이 증거될 수 있을까요? 수용자 중심?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수용자 중심으로 접근하셨다면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그런 '신성모독적'인 표현을 굳이 사용하실 필요가 있었을까요? 위에 필자의 지적처럼 초대교회가 그런 생존의 상황에서 이런 어려운 교리를 붙들어야 할 필요가 있었을까요? 좋은게 좋은거 라면 말입니다. 여기 데럴 존슨의 말을 인용합니다. "물의를 일으키고 기상천외한 교리인 '삼위일체 교리'는 신학자들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평범한 그리스도인들의 삶과 사역에서 나온 것입니다. 물론 '교부'라 불리는 이들은 당시의 철학적 언어와 개념을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사색만을 위한 사색으로 그 일에 매달렸던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신실하게 전하려고 노력한 목회자였고 장로였습니다. 맡겨진 양들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충만한 삶으로 인도하려고 애쓴 집사였고  소그룹 인도자 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 안에서 알게 된 살아 계신 하나님께 합당한 방법으로 기도하고 예배하기 원했습니다. 삼위일체론을 만들게 된 사람들은 평범한 예수님의 제자로서 복음을 이해하고 전하는데 힘쓴 사람들입니다." 말하자면 삼위일체는 새로운 문화에서 진리를 소통하고자 하는 선교적 상황에서 얻게 된 결과라는 말입니다.

 

선교적 하나님이신 삼위일체 하나님 (Triune God as the Missionary God)

 

하나님을 삼위일체로 바르게 이해하는 것은 하나님은 늘 선교적 하나님이셨고 또 세상 끝날까지 그러실 것임을 보도록 밝히 조명해 주는 방법입니다. 기쁨과 자신과의 교제를 위해 우주와 세상을 창조하신 창세기의 시작부터 하나님은 그 인격의 복수성을 나타내셨습니다: “우리가 (복수) … 만들자.” 그리고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실 때 남성과 여성의 성별의 구분보다 더 근본적인 사실은 모든 피조물 중에 인간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 졌다는 것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의 형상대로 우리가 창조되었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성격, 존재, 행하심, 말씀하심 등을 하나의 거울처럼 비추어 내도록 창조되었습니다. 또한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선교적 마음을 보여주는데 그의 지속적인 갈망은 사람들을 하나님과의 교제로 이끌고, 그 형상을 온전히 회복하는데 있습니다. 더 나아가 우리가 선교에 참여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엄밀하게는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존재라는 것에 있습니다.  선교는 근본적으로 마쳐야 하는 과업이 아니고 심지어 수행해야 할 과업도 아닙니다. 오히려 선교는 삼위 모든 존재로 선교적이신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자로서 우리의 DNA에 내재된 것입니다.  

 

이것의 중요성은 과장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만일 우리가 선교를 기본적으로 수행해야 하는 어떤 과업으로 보게 된다면 우리는 전략이나 시간 계획에 초점을 둘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대부분의 해야 할 일들 생각하는 방식입니다. . 과업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훨씬 더 근본적인 어떤 것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으로서의 바로 그 정체성 -의 외부 작업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우리가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우리가 무엇이며 누구냐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의 시선은 삼위일체 하나님에게 있어야 합니다. 그 분은 세상이 자신과 다시 연합하도록 이르시고 보내시면서 태초부터 종말 때까지 선교에 관여하셨습니다. 우리가 이런 방식으로 이해할 때, 우리는 전략과 계획을 좀더 신중하게 세우게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단순히 가장 짧은 시간에 모든 세상에 도달할지 논리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본질에 우리를 일치시켜야 하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우리의 본질에 대한 이해가 선교의 중심에 놓여 있는 것이 전도인가 아니면 사회참여인가 라고 묻는 진부하고 곤란한 질문에 대한 해결이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창조주이고, 지탱자이고, 심판자이시고, 생명을 주시는 자시며 또한 구원자이신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면, 그 모든 것이 우리가 드러내야 할 온전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그의 성격 (어떤 분이신지)과 행함 (그가 하시는 활동) 그리고 말씀 (그가 말씀하시는 것)을 완전하게 조화시키며 통합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말과 행동과 성격을 통합해야 합니다: 그것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와 행함과 말씀에서 솟아나는 진정한 총체성입니다. 

 

너무 많은 복음주의자들은 여전히 전도와 교회 개척에 모든 초점을 맞추는 것과 다른 쪽에 긍휼과 정의, 환경 문제에 대한 관심 갖는 것으로 양극화 시킵니다. 세계적인 선교 네트워크들도 상대방에 대해서 여전히 의심하면서 양극화된 의제들을 내세웁니다. 하지만 만일 우리가 삼위일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다는 것을 신실하게 받아들인다면 나뉘지 않을 것입니다. 만일 우리의 주요 초점이 선포와 교회 개척이라면 우리는 또한 기아와 불의, 물질적 필요를 돌보고 성도들을 단편적이고 일부분의 영적 훈련이 아니라 삶의 모든 영역에 관심을 갖도록 훈련함으로써 우리 스스로 삶의 모든 부분에 참여하여 진실함에 자신을 드려야 합니다. 그 두 부분을 나누는 것은 이원론이고 이것은 삼위일체를 배반하는 일입니다. 하지만 동일하게 만일 우리의 열정이 의료적 돌봄, 환경 보호, 혹은 거리의 아이들을 구하는 것 등에 있다면, 우리는 동시에 복음이 무엇인지를 말로 설명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섬기는 그 사람들은 그들을 사랑하시고 그들과의 연합을 고대하고 계시는 하나님에 대한 진리 보다는 그저 일정의 휴머니즘 정도만 알게 될 것입니다. 본질적인 선교는 (그리고 진정한 교회 생활은) 명확하게 설명해야 하며, 명확하게 보여주어야 하고, 명확하게 행동하고 살아내야 합니다. 모든 것을 분리하지 않고 함께 묶어내야 합니다. 

 

그리고 본질적인 선교는 개별적인 동시에 공동체적 인데 그것이 삼위일체의 본보기이기 때문입니다. 삼위일체의 각 위격 간에는 구별이 있지만 동시에 분리될 수 없는 공동체가 존재합니다. 그리스도 몸의 속한 자들로서 우리는 서로 연합되어 있습니다. 독립군이 설 자리는 없습니다. 우리는 장기적인 헌신에 우리 자신을 드릴 것인데 왜냐하면 단기에 사로잡힌 이 세상은 세계관과 마음 속 관심사에 대한 진정한 통찰이 가능한 유일한 장소에 깊게 연관하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 자신도 3년의 공생에 이전에 30년의 시간을 준비하셨습니다. 단기주의와 그 뒤에 놓여 있는 성급함은 표피적인 것을 양산하고 이어서 그것은 비록 순간의 짧은 효과가 있는 듯 보이지만 길게 볼 때 큰 피해를 줍니다. 

 

삼위일체의 공동체는 우리에게 또 다른 고약한 논쟁, 즉 지역 교회와 선교 단체 중 무엇이 우월한가에 관한 논쟁에 해결책을 제공해 줍니다. 삼위일체는 우리에게 구별성과 더불어 사랑의 연합과 상호의존적인 관계, 하나의 영원한 목적을 보여줍니다. 수년 동안 나는 모달리티와 소달리티, 지역교회와 소위 파라처치 (선교단체)에 대한 많은 논쟁을 들어왔으며 그 대부분이 말도 안되는 소리라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교회를 오직 지역 회중들로만 정의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교회는 하나, 오직 단 하나의 에클레시아, 즉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백성의 모습입니다. 교회 (구약의 하나님의 백성과 연속성 및 불연속성을 동시에 가진)가 탄생된 오순절 이후 가정들과 군중 그리고 거주자와 방문자들도 있었고 예수님과 수년간 지낸 사람들과 새로 들어온 사람도 있었으며 예수님을 별로 보지 못한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신자들 두 세명이 가정에서 만나던지, 혹은 군중이 모이던지, 그들이 집에 있던지 혹은 성전에 오던지, 사도들이 함께 있던지 혹은 없던지, 그들은 여전히 교회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우주적 몸의 일부였고, 성령에 의해서 살아 있었습니다. 강조점은 유기체에 있지 조직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후에 교회가 제도화 되고 나서, 조직과 계급, 구조 등이 유기체의 본질적인 생명보다 더 중요하게 되어 버렸습니다. 

 

종교개혁자들 스스로도 기독교 제국의 오래된 전제들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는데 그 안에서는 특정한 조직과 계급의 정점에 있는 사람들에게 명령체계가 귀속되는 것을 교회를 포함하여 사람들을 조직하는 방식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전반적으로 사회가 조직되는 방식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만인제사장론과 교황이나 교황의 대리인이 아닌 말씀과 말씀의 주님의 최종적 권위는 계급이 배제되고 상호보완이 규범이 되는 훨씬 평평한 구조를 불가피하게 도출하게 된다. 이러한 구조는 진정 삼위일체의 양식이며, 우리는 그 삼위일체의 형상안에 있습니다. 

지역 회중은 아마도 우리가 경험하는 가장 일반적이고 익숙한 교회의 외형적인 모습일 것입니다. 그리고 분명히 주님은 우리가 헌신된 지역 공동체의 일부가 되길 의도하십니다. 지역 공동체의 일부가 되지 않고서 우리는 어떻게 믿지 않는 이웃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까요? 그러나 선교단체도 동일하게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동적인 삶을 함께 재현하는데 헌신된 사람들의 공동체로서 동일하게 교회의 하나의 표현이 될 수 있습니다. 그 안에서 선교단체의 회원들은 하나님을 중심에 두는 의미 있는 삶과 봉사 그리고 상호보완적인 은사를 통해 서로를 풍부하게 하도록 함께 묶여 있습니다.

 

지역 회중을 지칭하는 교회와 선교단체 중 무엇이 선교를 행하기에 더 적합한지에 대해 논쟁하기 보다는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상황안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고 두 세사람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 교회가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훨씬 더 유익합니다. 더 나아가서, 지역 회중에 속하였든 혹은 선교단체에 속하였든 신실한 그리스도인의 삶의 본질적인 표지는 하나님을 닮는 것인데 그 안에는 그 분의 선교적인 마음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양함 속에서의 일치를 기뻐하고 서로의 유익을 위해서 그리고 공통적인 목적안에서 화합하고 협력하며 일하도록 노력합시다. 우리는 하나의 몸 안에서 서로 단단히 연결된 공동체로 설계되었습니다. 그렇게 살아갑시다.

 

필자의 통찰이 부럽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형상 등 우리의 선교를 예수님의 부활 이후나, 심지어 아브라함, 아니 타락 이후의 구원에서 부터 시작하는 것과 우리를 자신의 형상으로 만드신 삼위일체 하나님에서 시작하는 것이 시작의 차이가 미미한 것 같이 보이나 오늘날 선교의 실천에까지 이르면 그 사이가 얼마나 벌어지는 지를 잘 지적하고 있습니다. 전도내 사회 참여냐, 소달리티 (선교단체)냐 모달리티 (지역교회)냐, 개인이냐 공동체냐 등 표면적이 논의를 가지고 까칠하게 굴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 속에 보여주신 하나님의 깊은 진리 그리고 우리를 그 형상으로 만드시어 그 교제 속으로 부르시고 교제가 가능한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들로 빚어가시는 하나님에게 복음의 근거를 둔다면 바로 그 총체적이고 통합적인 복음에 기반한 전도, 그 복음에 기반한 사회참여, 그 복음에 기반한 지역교회, 그 복음에 기반한 선교 단체, 그 복음에 기반한 개인, 그 복음에 기반한 공동체 인가를 점검할 일이지 표면을 가지고 싸울 일을 아니라고 봅니다. 우리가 말하는 복음이라는 단어에는 무엇이 담겨 있는지 성찰해 볼 일입니다.

 

하나님의 섭리 (The providence of God)

 

삼위일체 신학이 우리의 생각을 올바르게 변화시키는 하나의 방법은 그것이 보편적 교회와 지역교회를 위해서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뛰어넘는 세상을 위해서 개인들의 삶 안에 하나님의 섭리와 주권을 전면에 내세운다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섭리를 서투르게 표현하는 운명론이나 혹은 자유의지의 부재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전 우주를 유지하시고 사랑하신다는,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동일하게 비를 내리신다는, 생명을 가져다 주시는 성령께서 우리가 만나기 이전부터 사람들 안에서 일하시고 성자에 관한 더 많은 계시를 위해 그들을 준비시키시고 그리스도인들의 개입 없이도 꿈과 환상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진정한 정체성에 대한 확신을 가져다 주신다는, 역사가 걷잡을 수 없이 요동치는 것처럼 보일 때에도 하나님께서 여전히 왕이시고 인간이 아니고 그분이 시간이 언제 종말을 맞이 할지 결정하실 것이라는, 하나님의 사랑이 현재의 인간의 고통과 모순되지 않고 그리스도인들이 타락한 세상의 신음과 무관하지 않으며 우리가 새로운 하늘과 땅과 하나님의 나라의 완전한 회복에 대한 확실한 소망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아마도 내 삶 속에서 혹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삶 속에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다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나는 울며 애통해 하는 사람들과 함께 울거나,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로 인해 마음이 아프고 곤혹해 하거나, 전쟁과 불의 그리고 타락과 죄의 모든 파괴적인 결과로 인해 무기력함을 느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부께서 보좌에서 물러나지 않으셨고, 성자께서 중재하기를 멈추지 않으셨고, 성령께서 세상으로부터 물러나지 않으셨으며, 어느 날 우리가 알아야 하는 모든 것을 알게 되고 하나님의 영광과 사랑을 직접 보게 될 것이라는 것은 확실히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가져오거나 세우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도래한 그러나 완전히 도래하지 않은 하나님의 나라를 증거하고 말과 행동 그리고 품성으로 왕을 묘사하고 우리의 사회적 관계와 머뭇거리는 말들을 통해서 언젠가 모든 창조물에게 확연히 드러날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통치의 맛보기를 보여주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는 세우지는 않지만 우리는 당신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라고 갈망과 믿음안에서 기도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공공의 일들과 장소에서 그리고 믿지 않는 자들의 세상에서 담대히 말할 수 있는 자신감과 권리와 의무를 주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 하나님의 주권, 그리고 성부, 성자, 성령의 모든 창조세계안에서의 총체적인 일하심입니다. 우리의 살아계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은 그리스도인들의 하나님만이 아니십니다. 인간들이 인정하든지 안하든지 그분은 모든 인류에 대한 주권을 가지신 유일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이러한 배경으로 인해,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고 우리가 이룰 수 있는 것들에 대한 우쭐한 생각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고 우리가 하지 못하는 것들로부터 오는 죄책감으로 인해 우리 자신을 마비시키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는 강렬한 희망과 믿음으로 가득한 기대를 가지고 우리보다 훨씬 먼저 일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기를 바랄 것이며 그분이 이끄시는 대로 따를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동일한 활동이 어떤 이들에게는 빛을 추구하도록 하고 동시에 다른 이들에게는 어둠을 선호하고 빛을 거부하도록 이끈다는 것을 인정할 것입니다. 우리는 공허한 의식으로서가 아닌 하나님의 뜻과 마음에 우리 자신을 일치시키고자 하는 심오한 갈망으로부터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과 우리의 이로움을 위해서 우리의 삶을 인도하시기에 충분한 능력을 가지고 계신다는 믿음 안에서 기도할 것입니다.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추상적이거나 아니면 멀리 떨어져 있는 하나님이 아닌 이 땅의 현재의 삶의 실제안에 들어와 계신 진정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로서 살 것입니다. 우리는 그 안에서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삼위일체가 우리 존재를 통합하는 지점이며 근거가 되는 길을 찾을 것입니다. 우리는 역사와 시간 그리고 공간이 확실한 목적지가 있다는 사실을 담대히 증거할 것입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시간표를 알고 있다고 주장하지 않을 것이지만 그 때가 올 때 까지 바울이 빌립보서 312절에서 말하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것 그것을 잡기 위해 달려갈 것입니다.

 

기독교적 정치적 공정함이라는 약간의 겉치레는 별도로 하고 우리의 교회들과 선교단체들은 세상의 사업체들과 구별되지 않아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실행하고 말하고 결정하고 계획하는 모든 것에서 우리는 마음을 새롭게 하고 삶을 변화시키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진리와 은혜안에 잠겨 있어야 합니다.

 

좋은 경영 능력은 우리의 지도자들에게 매우 귀중한 것일 수 있으며 지도자들에게 그것이 없을 때 우리는 고통을 당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진리에 기초한 영적인 역량과 지혜이며 정책과 결정들이 하나님의 마음과 일치하도록 신학적으로 성경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우리가 누구를 동원하고 누구와 함께 일할 것이며 그들이 무엇을 하게 될 지를 형성할 것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하시고 말씀하시는 모든 것에 비추어 2007년을 자세히 관찰하면서, 우리는 우리가 올바른 방법으로 올바른 일들을 하도록 올바른 사람들을 모으고 훈련시키는지, 우리의 사명선언문이 모든 면에서 진정으로 성경적인지, 우리의 일하는 소중한 방법들이 우리를 만족시키는 대로 주님도 만족시키는지 우리 자신에게 물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것이 교회안에서 그리고 기독교 공동체안에서 우리가 어떻게 설교하고 제자화 할지를 형성할 것입니다. 이 것이 우리의 최우선사항과 비전을 형성할 것입니다. 이 것이 우리의 텅 빈 물통을 e다시 채울 것입니다. 이 것이 온 세계를 천박함으로 부터 깊음으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그 어떤 것보다, 이 것은 살아 계신 하나님 - 성부, 성자, 그리고 성령 -을 즐거워하고 영광과 기쁨을 그분께 드리도록 우리로 하여금 새롭게 되도록 도울 것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고후 13:14)

 

우리가 우리를 보내신 곳에서 최선을 다해 충성되이 사역을 감당하고 최선을 다해 삶을 살아가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과 사역의 근거가 선교지의 열악한 상황이나 세상에 복음 없음에 기반하는 것이 아님도 동시에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가 살고 사역하는 근거의 가장 깊숙한 곳에는 삼위일체 하나님, 그 분들의 존재와 관계를 통해 그리고 우리를 그 형상으로 지으시고 초대하시는 그 의지를 통해 모든 것을 보여 주시는 그 진리에 기반하고 있음을 늘 기억하고 반추해야 합니다. 그래서 실천에서 약간 빗나가려고 할 때 속히 그 진리에 근거하여 바로 잡고 또 바로 잡아 멀리까지 가면서도 늘 그 궤도에 있는 그런 삶과 사역이 되어야 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위 글과 관련하여 몇 가지 질문을 올립니다.  

1. 위 글의 지적처럼 우리의 선교가 천박해졌다는 징후를 혹 자신의 사역 혹은 주변의 사역을 통해 감지되는 것이 있나요?

 

2. 위의 글은 오늘 우리가 속해 있는 선교 운동 혹은 선교 사역의 기초를 형성하고 있는 것으로 과학과 은사를 말하고 있는데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나요? 그리고 그에 대한 대안 혹은 회복으로 삼위일체에 근거한 선교를 역설하고 있는데 이에 대해서도 생각을 정리해 보시기 바랍니다.

 

3. 삼위일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존재라는 사실이 선교와 어떤 상관성을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우리가 수행하고 있는 선교에 그런 것이 반영되어 있는지 반추해 볼 수 있나요?

 

4. 하나님의 주권 혹은 섭리를 인정한다면 지금 우리의 자리에서 어떤 변화가 가능할까요?

 

5. 위의 질문 외에 글을 통해 새롭게 얻은 생각을 정리해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