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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반공/삼선교: 삼위일체적 선교와 교회

뉴비긴의 "오늘날의 선교를 위한 삼위일체 교리" 2

뉴비긴의 책 '오늘날의 선교를 위한 삼위일체 교리' 2장에 대한 반추입니다. 앞에 올린 서론을 읽으신 분들은 엘리노어 잭슨이 말한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이 책이 1963년에 나왔는데 그 안에 뉴비긴이 1980년대에 출간한 저서들에 등장하는 주제들이 이미 보인다고 했습니다. 지금 다루고 있는 이 책이 비록 작은 책이지만 그 안에 담긴 생각들은 뉴비긴 생각의 원형 같은 것을 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2장은 분량이 길기도 하거니와 줄여서 반추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모든 내용들이 다 보석 같습니다

2. 교회 일치의 경계 - 진리의 문제 (The Limits of Ecumenicity - the Question of Truth)

앞서 밝힌대로 지금 뉴비긴이 이 글을 쓰고 있는 상황은 선교계와 교계가 통합을 이루는 시점입니다. 교계라 함은 주로 서양 중심의 교회에서 선교의 결과로 서구 외 지역에 교회들이 성장하면서 교회의 지형이 달라졌음을 말합니다. 일방적 구도에서 쌍방 혹은 다방향으로 지형과 구도가 변한 상황에 대한 통찰을 가지고 이 글을 쓴 것입니다. 2장에서는 그런 교회 일치가 가지고 있는 경계가 어디인가? 일종의 한계를 명확히 하는 것을 다룹니다.

 

1) But behind these questions of pattern there are deeper questions of substance, and these are questions which must now be faced. Why is there not more vigour in the missionary work of the Churches which share in the ecumenical movement? Why does the call to foreign missionary service not evoke a response from more of the ablest students in the universities? Let it be granted that part of the answer lies in the field of relationships, in the fact that the patterns of missionary action do not conform to the facts of the Gospel or of the world today; the question has still to be asked: 'Is there not a deeper reason? Is there not a deep uncertainty in the Churches concerning the uniqueness and finality of the Gospel itself?

선교계와 교계가 통합된 것은 관계의 영역에서 일어난 일이고 그로 인해서 분리된 채로 진행되던 선교보다는 통합 이후의 선교가 좀더 선교의 속성에 더 일치되는 방향으로 변화될 것이라고 뉴비긴은 보고 있습니 다. 예를 들어 선교지에서 선교사 중심의 선교가 진행되고 현지 교회나 현지인들은 선교의 대상으로만 여겨지다가 어떤 변화가 일어나 선교사와 현지 교회가 한 마음으로 같이 선교를 하게 되었다면 분명 이전보다 복음의 속성에 가까운 방식으로 선교가 진행되겠죠. 아마 그런 변화가 통합 이후에 관계적 측면에서 일어날 변화라고 본 것 같습니다. 그런데 뉴비긴은 우리가 물어야 할 좀 더 심오한 질문이 있지 않겠는가? 라고 반문합니다. 교회 일치 운동에 참여하는 교회들이 왜 선교 운동에 더 적극적이지 않은지, 왜 젊은이들이 이러한 선교 운동에 더 헌신하지 않는지? 단순히 관계의 영역을 너머 물어야 할 질문들이 있다는 겁니다. 50년도 더 된 옛날의 상황이 꼭 오늘의 상황을 말하는 것 처럼 느껴지는 것은 '기분' 탓일까요? 우선 뉴비긴은 이렇게 질문합니다. 복음의 독특성과 최종성 자체에 대해 교회 안에 깊은 불확실성이 있는 것은 아닌가? 저는 이렇게 해석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정말 복음을 아는가? 우리는 정말 하나님을 아는가? 우리는 정말 예수 그리스도의 의미를 아는가? 우리는 정말 성령을 바르게 알고 있는가?

 

2) For it must be frankly admitted that - whatever might be said from the pulpit about the true basis of missions in the Gospel itself - the motives with which they have been supported have been mixed. The very word 'mission' has come to suggest an operation in which one reaches down in pity and sympathy to the less fortunate, the unenlightened, the underprivileged. The picture of 'the heathen' to which Christians have responded with the devotion of their prayer and substance in the work of missions has too often been picture of the poor, the ignorant, the diseased. To the extent that this has been so, it is not surprising that now, when one has a chance to meet 'the heathen' in the persons of the highly competent and cultured participants in the life of modern international society, there is a shaking of the traditional foundations.

이 문장들 앞에서 뉴비긴은 세상, 특히 서구 기독교의 관점에서 볼 때의 세상이 얼마나 변했는지를 이야기 합니다. 기독교가 서구의 모든 가치를 지배하던 소위 기독교 제국 시절에 기독교는 다른 종교에 대해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세계의 다른 종교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서구 기독교에 영향을 미치지는 못한 것이죠. 그런데 세상이 변하고 마태오 리치 같은 가톨릭 선교사들이 중국에 가서 놀란 것처럼 굉장히 수준 높은 종교 철학이 다른 곳에서 이미 있는 것에 충격을 받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날 영적 상대주의가 기승을 부리고 이제 종교가 다르고 모든 면에서 다른 사람들이 한 자리에서 자신의 생각을 나누는 일이 일상이 되어버린 그런 세계 속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 현재의 상황에서 이전에 해 오던 선교를 뒤돌아 보면서 위의 문장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강단에서 선교에 대해 뭐라고 아름답게 말하던지 간에 상관없이 - 예를 들어 우리는 그들을 형제로 여겨야 합니다. 등등 - 실제 선교의 현장에서 '선교'라는 단어는 뭔가 우리보다 열악한 상황에 놓인 사람들에게, 뭔가 미개하고 불쌍하고 병 걸리고 어려운 상황에 있는 미전도 지역과 종족에 기도와 헌신으로 응답하는 그런 일과 연관되어 있었다고 말합니다. 오늘 우리의 상황이 이러한 진단과 멀지 않게 보이는 이유 역시 '기분' 탓일까요? 그렇게 선교를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믿지 않는 그리고 저 가난하다고 여겨지는 나라의 피부색 검은 사람들이 국제 무대에서 놀라운 모습을 보일때 '이건 뭐지'라고 놀라는 일이 놀랍지 않다는 겁니다.

 

3) We have discovered many times in these years of inter-church discussion that even those who seemed to be contradicting us had something to teach us about Christ. . . . 'Should not this process be extended further? May we not find that if we extend this kind of discussion we shall have yet more to learn, yet more enrichment of our fellowship? Is not the logical development of this whole movement something like a world fellowship of religions?'.

뉴비긴은 이렇게 변한 상황에서 교회 일치 운동을 통해 대화의 가치와 중요성을 교회들이 배우게 된 것에 대해 언급합니다. 교회 일치 운동을 통해 교회들은 이전에 서로 이상하다고 여긴 다른 교단들과 대화하면서 그 안에도 그리스도에 대해 배울 것이 있음을 깨닫게 되고 우리 교단만이 진리를 수호하고 있다는 보수적인 생각으로 부터 대화와 교제의 중요성을 배우게 된 것입니다. 그런 경험을 바탕으로 조금 더 열린 혹은 진보적인 사람들은 그런 대화의 경험이 더 확장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라고 주장하고 그런 생각은 기독교 내의 교단 간 대화를 너머 '종교간의 대화'라는 자리까지 나아가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뉴비긴은 교회일치운동의 경계라는 제목을 붙인 겁니다. 그런 자리까지 나아가야 하는가? 아니면 문을 닫고 대화를 하지 말하야 하는가? 이상하게 사람들은 이런 표면적인 것으로 논의를 해 나갑니다. 전도냐 사회참여냐, 대화냐 선포냐 등등 이런 식으로 늘 표면의 싸움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분위기에서 교회일치운동을 신봉하는 뉴비긴이 어떻게 이야기를 풀어가는지 좀더 이어가 보죠.

 

4) And now, having reached this point, we are compelled to recognize that we are confronted in a new way with one single question: the question of the uniqueness, sufficiency and finality of Jesus Christ as the one Lord and Saviour of the world.

이 지점에서 중요한 질문을 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 질문은 '세상의 주요 구세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독특성, 충분성, 최종성에 대한 질문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그는 교회일치 운동의 경험에 비추어 이 질문을 두 가지의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 두 가지란.

 

5) 

(a) When the task is placed in a fully ecumenical setting, every other question except the question about Christ is in principle excluded. Every motive for missions to which one appeals must be one which is valid (in priciple) equally for the Asian and for the European, equally for the Russian and for the American. Any open or covert suggestion, for instance, that missions are valuable as an insurance against Communism, or as an agency of technical aid to backward areas, is ruled out. By placing missions in a world-wide setting one commits oneself to the belief that the one essential question for all mankind is the question concerning Jesus Christ and that every other question which missions may raise is secondary.

누군가 그런 이야기를 했던 것 같습니다. 이 세상에 꾸밈 혹은 수식에 속한 것을 제거한다면, 마치 건물에 인테리어 한 것을 다 제거한다면 무엇이 남을까? 프랑스의 화가 폴 세잔은 자신의 집 뒤 언덕에서 주로 그림을 그렸는데 그 언덕에서 멀리 바라보면 쌩 빅투아르라고 하는 돌산이 보입니다. 그 돌산을 계속해서 그렸습니다. 내가 보는 저 산 말고 산의 본래 본질은 무엇일까 라는 질문을 하면서 말입니다. 그래서 초기 작품에는 더러 집과 나무들이 알아 볼 수 있도록 그려진 반면 점점 뒤로 갈 수록 그리고 후반부로 갈 수록 산인지도 잘 모를만큼 그림에 남는 것이 적습니다. 제 방에 그 후기에 속한 작품이 걸려 있는데 본질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만듭니다. 뉴비긴의 질문이 그것과 동일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완전한 일치의 상황에 접어 든다면, 우리가 학교를 하고 있는데 그들 스스로 학교를 할 충분한 역량이 갖춰지고 우리가 병원 사역을 하는데 그들도 그 만큼의 의료 수준이 되고 우리가 사업 선교를 하는데 그들도 그 정도는 할 수 있게 된다면 결국에 다 같아지는 혹은 서로 서로 보완하여 그것이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 그런 상황을 가정한다면 결국에 남는 그 핵심은 무엇일까? 그리고 그 핵심은 그렇게 모든 것이 같아진 상황이 온 다음에야 생각해도 되는 문제인가? 아니면 지금 그런 주변 문제에 신경쓰느라 혹은 그 주변 문제가 핵심이라고 보기 때문에 보지 못하는 그런 중요한 문제일까? 뉴비긴은 우리가 가정하는 그런 상황이 오면 이론상 혹은 원리상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질문을 제외한 다른 질문은 모두 배제된다고 핵심을 찌르고 있습니다.

(b) When the movement for unity is understood in missionary terms, then every other potential centre for human unity except Jesus Christ is ruled out. This means that we have to face the negative as well as the positive implication of the confession of Jesus as Lord. . . . The words, 'I came not to bring peace but a sword,' will have to be accepted. If he is the one appointed by God to be the king of men, then all other claims to provide a final basis for human unity will have to be denounced as disobedience.

연합이라는 말을 선교적인 관점에서 말할 때 예수 그리스도 밖에서의 연합을 수용할 여지는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대화와 일치가 가진 한계 혹은 경계가 있습니다. 대화와 일치 자체가 궁극적 가치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궁극적 가치입니다. 대화와 일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의미를 가집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모든 인류의 왕으로 지명하셨다면 그를 배제하고 다른 것에서 궁극적 연합의 기초를 찾는 일은 모두 불순종이라고 지적합니다.

We have indeed to learn to enter into real conversation with men of other religions if they are to apprehend Jesus Christ as Saviour and if we are to learn all the manifold wisdom of God which he set forth in Jesus. But the ecumenical movement remains missionary through and through because it is a movement not for any kind of unity, but for that unity which is God's creation through lifting up of Jesus Christ upon the Cross and through the continuing work of his Spirit. 

이건 뭐 별도의 설명이 필요 없을 것 같네요. 한종석 선생님의 번역을 그대로 올립니다.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가 구주시라는 것을 깨닫고 우리가 하나님께서 예수 안에 두신 온갖 지혜를 배우고자 한다면 우리는 진실로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과 진정한 대화를 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일치운동은 지속적으로 끊임없이 선교적이다. 왜냐하면 이 운동은 임의적인 일치를 위한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성령의 지속적인 사역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만드시는 일치이기 때문이다."

 

6)  One can put the same double point by making the following affirmations:

(a) The ecumenical movement remains open to all who confess Jesus Christ as God and Saviour.

(b) The ecumenical movement remains open only to those who confess Jesus, Christ as God and Saviour.

위에 설명한 두 가지 포인트를 쉽게 다음과 같이 정리합니다. 모두 (all)와 오직 (only)을 대비했습니다. 교회일치운동은 예수를 하나님이요 구세주로 고백하는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지만 그 말은 동시에 그렇게 고백하는 사람에게만 열려 있다는 말입니다.

7) The truth is that it is the very essence of this movement that the limits of its comprehensiveness are set, not by men by God, because he has provided in Jesus Christ the one who is the only king and head of the human race.

교회일치 운동의 경계는 사람이 정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유일한 왕이요 머리로 보내신 하나님에 의해 정해졌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것이 이 일치 운동의 핵심이라는 겁니다. 오늘날 에큐메니칼 운동이 이 핵심을 여전히 이해하고 있는지 아니 복음주의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이해하고 있는지? 계속 지지 거리게 됩니다.

There was a time when it was possible to support the work of missions without having seriously faced this question of religious truth. That time is past. There can be no recovery of vigour and directness in the work of missions so long as that question is not faced.

아프리카 어느 지역에 상황화 이슬람이 들어 왔다고 합니다. 이슬람은 사실 상황화라는 것이 어려운 종교입니다. 코란이라는 형식을 변개하면 안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건 600년대 시점이고 지금은 그것의 원리를 시대에 맞게 따르면 된다는 그런 상황화 이슬람 주장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아마 어려운 지역이니까 물질적인 것도 잘 지원해 주었나 봅니다. 그러자 기독교인들이 그곳으로 몰려 갔다고 합니다. 쉽게 말해서 이슬람에서 쌀 두 포대를 주니 교회에서 쌀 한 포대 받던 사람들이 떠난 겁니다. 그 때서야 비로소 교회는 알게 되었습니다. 그 동안 복음에 의해서가 아니라 쌀 한 포대로 그들을 붙잡아 두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서구적 식민지 상황에서 오로지 기독교만이 모든 권력을 가지고 있을 때는 진리에 천착하지 않고도 권력으로 문화로 사람들을 교회에 붙들어 두는 것이 가능한 시대가 있었다는 겁니다. 그러나 이제 다원주의 사회 속에서 교회보다 재미있는 일들이 많아 진 사회에서 무엇이 문제인가라고 할 때 그것은 진리의 문제라는 겁니다. 아직 그런 권력과 문화가 통하는 곳에서 선교 사역을 진행하고 있는 경우 혹 우리가 '부흥'이라고 말하는 것이 진리에 바탕을 둔 것인지 아니면 아직 거기는 다른 것으로도 통하기 때문인지 물어야 할 것입니다. 한국에서 옛날에는 교회만 가도 좋았는데 라고 꼰대같은 소리를 반복할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가 이 진리 문제에 봉착해 있다는 사실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2장에 대한 반추를 하면서 문장을 떼어 내기가 어려웠습니다. 누군가 그런 말을 했습니다. 요한복음에는 구약의 직접 인용보다 그 배경 혹은 분위기에 구약적인 것이 많이 있는데 만일 요한복음의 구약이 어디에서 왔나 찾으려면 구약 성경 전체를 갖다 놓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2장이 좀 그랬습니다. 다행한 것은 2장이 구약만큼 두껍지 않다는 겁니다. 사진은 남프랑스 액상 프로방스에 있는 쌩 빅투아르 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