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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에서

삼류 배우

품에서는 한달에 한 번 혹은 특별한 사안이 있을 때에 마다 GMF에 속한 가족들 그리고 이 공간을 찾아 주시는 선교 관심자 분들에게 보내는 일종의 대표 서신입니다.

 

곳곳에서 살고 또 사역하시는 사랑하는 선생님들,

 

GMF 내에서 몇몇 분들과 독서 모임을 하고 있습니다. 올해는 밴후저 교수가 쓴 이해를 이야기하는 믿음 (Faith Speaking Understanding)이라는 책으로 하고 있는데 관심 있는 분들은 저희 홈피 선반공 안에 있는 선무당 21을 가 보시면 발제 동영상을 올려 놓았습니다. 물론 아직 초반이라 좀 더 공부를 해 봐야겠지만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성경이 상연용'이라는 겁니다. 성경을 조직신학의 관점에서 보면 그 나름의 유익이 있고, 요즘 유행하는 내러티브, 즉 이야기 관점에서 보면 또 그 나름의 유익이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희곡'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겁니다. 즉, 상연을 전제로한 글이라는 거죠. 해서 오늘은 '삼류배우'라는 연극 한편을 이야기 해보려고 합니다. 이 연극도 실제 희곡 대본은 63쪽 정도의 적은 분량이기 때문에 이 글을 상연용으로 보지 않으면 그리 재미있지 않으며 만일 상연이 아닌 소설로 쓰려면 더 많은 분량이 필요합니다. 그러고 보면 요한의 말대로 예수님의 모든 것을 낱낱이 기록한 책을 쓰면 세상도 공간이 부족하다 했으니 우리에게 주신 얇은 (?) 성경은 상연용 희곡이 맞습니다. '삼류배우'는 아주 오래전 가족이 함께 본 연극입니다. 저를 형이라 부르는 한 집사님이 글을 짧게 써야 한다고 충고해 주어서 '품에서'를 가급적 짧게 쓰려고 하는데 오늘은 긴 글이 되는 것을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영진은 30년을 단역만 맡아 온 소위 삼류배우입니다. 그래도 꿈은 언젠가 햄릿을 해 보는 것입니다. 여담인데 저도 80년 5월에 봄 축제 정기공연으로 햄릿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햄릿역은 아니고 대학 1학년인 저는 사신 두명 중 한 사람이었는데 둘 중 한 사람은 '예, 알겠습니다'라는 대사가 한 줄 있었지만 옆에 있는 사신은 그냥 같이 인사만 하는 역할이었습니다. 연출 선배는 누가 대사를 할지 최종 결정은 하지 않고 나중에 잘 하는 사람에게 대사를 주겠다 하여 연습 내내 '예 알겠습니다'를 여러 톤으로 연습하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당시 민주화 항쟁으로 학교가 강제 휴교되어 연극을 올리지는 못했습니다. 다시 삼류배우로 돌아오면, 어느날 극단에서 다음 작품으로 햄릿을 하겠다고 정하는 바람에 영진에게 기회가 옵니다. 햄릿을 해보는 것이 평생의 꿈이라는 사실을 극단의 선후배들이 알고 있기에 영진에게 기회를 주자고 추천한 것입니다. 영진은 이미 햄릿의 대사만이 아니라 햄릿에 나오는 모든 역할의 대사를 줄줄 외우고 있었습니다. 30년을 혼자 연습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암초를 만납니다. 그 연극의 제작자가 반대하고 나선겁니다. 그렇게 했다가는 소위 '흥행'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말입니다. '흥행', 우리는 이 단어를 늘 주목해야 할 듯 싶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가치를 망가뜨리니까요. 제작자는 영진과 함께 연극을 시작한 친구이자 소위 연극계에서는 배신자로 부르는 TV 스타 성일을 주인공으로 발탁합니다. 물론 영진은 또 단역이고요.

 

 

하지만 인생에 반전이 있듯이 영진에게 기회가 옵니다. 연극이 계속되는 어느 날 성일이 중요한 TV 프로그램과 일정이 겹쳐 하루를 대신해야 하는 상황이 온겁니다. 딱 하루. 물론 자존심이 있는 영진은 선뜻 나서지 않죠. 그런데 영진을 반대했던 그 제작자가 영진에게 사정 사정합니다. 갑자기 하루 대역할 사람을 찾을 수 없다고, 대사를 이미 외우고 있는 당신 밖에 없다고... 그래서 영진은 수락을 합니다. 대신 조건을 겁니다. 조건은 그 동안 단역으로 살아 온 자신을 대신하여 미용실을 운영하며 가족의 생계를 책임 진 아내, 그리고 이런 아빠를 늘 자랑스러워 하는 막내 진호, 그리고 사춘기라 다소 시크한 딸 진경, 이 세 사람을 위해 소위 '1열'에 자리 세 개를 마련하라는 조건이었습니다. 아빠가 햄릿을 맡아 좋아하다가 갑자기 배역을 맡지 않게 되었다고 하여 실망한 가족에게 그나마 하루 공연이라도 보여주고 싶었던 거죠.

 

떨립니다. 물론 대사는 이미 다 외우고 있지만 그래도 엄청 떨립니다. 무대 뒤 대기실에서 분장과 의상을 다 갖추고 이제 곧 무대로 나가려 마지막 중요한 대사를 다시 한번 연습합니다. 단 하루의 공연이, 1열에 있는 가족을 두고 곧 펼쳐질 예정입니다.

 

그런데^^ 그 때, 방송국이 일정을 배려해 주었다고 하면서 원래 햄릿인 성일이 나타난 겁니다. 5분을 앞두고 말입니다. 당시 아직 어렸던 우리 두 아들을 포함하여 모든 관객이 '에이 씨'하며 진심 그 연극에 몰입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결국 햄릿은 그렇게 끝이나고 배우들은 모두 식당으로 갑니다. 분장실에 남아 분장을 닦는건지 눈물을 닦는건지 애초롭게 남아 있던 영진에게 기다리던 가족들이 준비한 꽃다발을 들고 찾아 들어 옵니다. 딸 진경은 이미 얼굴에 실망과 분노가 가득합니다. 분위기 만회해 보려고 오랫만에 고기 먹자고 제안해도 딸은 그냥 집에 가겠다고 합니다. 그 때 막내 진호가 아빠의 햄릿을 보고 싶다고 말합니다. 잠시 망설인 끝에 영진은 결심하고 무대 한편에 세 식구를 앉히고 세 명을 위해 모노드라마 햄릿을 시작합니다. 햄릿, 오필리어 등등 1인 다역으로 줄줄줄 모노 드라마를 해 나갑니다. (그 때 다른 배우들이 등장하는 경우도 있다고 하는데 저희가 본 연극은 끝까지 모노드라마로 하는 연극이었습니다.)

 

영진은 딸 진경에게 말합니다. 세상에 일류 배우, 삼류 배우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역할에 최선을 다하면 그것이 무슨 역할이든지 일류배우이고 그렇지 않다면 삼류이다. 아마 이것이 그 연극의 메시지 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밴후저의 책을 잡으면서 오래 전에 보았던 이 연극을 조금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 보게 됩니다. 성경이 희곡의 성격을 가지고 있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즉,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세상에서 진심 그 내용을 이해하고 상연해야 하는 (저는 개인적으로 구현이라는 말을 좋아합니다) 것이라면 모든 성도는 자신이 동의하던 안 하던 모두 세상이라는 무대에 선 배우들입니다. 역할의 크기에 관계없이 말입니다. 그러니 자신을 청중이라고 생각한다면 그야 말로 삼류배우입니다. 자신을 배우로 인식하는 성도야 말로, 그리고 역할에 관계없이 최선을 다하는 소위 '선교적' 상연 성도야 말로 일류입니다. 코로나 상황에도 계신 곳에서 최선을 다하고 계시는 여러 선생님들이야 말로 일류 배우들입니다 (엄지척). 샬롬.

 

2021년 7월 1일

권성찬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