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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에서

이처럼 추앙하사

품에서는 한달에 한 번 혹은 특별한 사안이 있을 때에 마다 GMF에 속한 가족들 그리고 이 공간을 찾아 주시는 선교 관심자 분들에게 보내는 일종의 대표 서신입니다.

 

곳곳에서 살고 또 사역하시는 사랑하는 선생님들,

 

태초부터 계신 영원한 말씀이 한계를 가진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다는 것 그리고 그 분에 대해 어휘가 부족한 인간의 언어로 표현한다는 것은 무한을 유한으로 표현하는 것이기에 그 유한을 보는 우리 인간은 어마 어마한 상상이 필요합니다. 나니아 연대기나 반지의 제왕 같은 환타지가 현실과는 멀어 보여도 어쩌면 무한이라는 실제와는 더 근접해 있을 것이라 추정해 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진리를 설명하기 위해 많은 상징들을 사용하신 것과 같이 사도들과 초대교회도 그리스도를 표현하기 위해 새로운 개념에 맞는 용어들을 만들어야 했기에 기존에 세상에서 사용되던 용어를 가져와 새로운 의미를 불어 넣었습니다. 앤드류 월스라는 학자는 이를 가르켜 상징 빼앗기(symbol theft)라고 불렀습니다. 대표적으로 '주 예수'라고 할 때 '주'에 해당하는 '퀴리오스'가 바로 세상의 용어이지만 그것을 가져와 예수 그리스도를 표현하는 데 사용했습니다. 왜냐하면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그리스도'가 유대인에게는 이해되는 용어이지만 이방인들에게는 특별한 의미를 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태국에서 사용했다면 마사지를 연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새로운 상황에서 상징 빼앗기를 통해 새로운 용어로 새로운 개념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 만들어진 용어들도 시간이 지나면 다시 오염이 되고 영원한 말씀, 그리고 그가 행하신 행동을 표현하기에 참 부족하고 답답함을 느끼게 됩니다.

 

 

박해영 작가는 작가의 예민함으로 그렇게 오염된 용어속에 가려진 의미를 되살립니다. 최근에 종영된 '나의 해방일지'라는 드라마에서 남녀의 단순한 멜로적 사랑이 아니라 아가페적이고 구도적인 의미를 담아 사랑이라는 용어대신 '추앙'이라는 용어를 꺼냈습니다.  어둠으로 가득찬 구씨라는 인물에게 '나를 추앙하라'고 말하는 주인공 미정은 어느 교주의 말이 아니라 '나를 사랑하라'고 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닮아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추앙의 전제는 자신이 먼저 구씨를 추앙하기 때문입니다. 추앙은 아무런 조건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구씨가 더 나아지지 않고 알코올 중독에 계속 있을지라도 그를 추앙해 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런 추앙을 받으면 결국 변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해서 드라마를 보는 내내 성경이 말하는 사랑을 이 드라마가 보여주는 추앙으로 바꾸어야 더 의미가 분명해 진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추앙을 확증하셨느니라'(롬5:8) 또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추앙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

 

 

'나의 해방일지'에서는 미정이라는 인물이 어둠 속에 있는 구씨를 향해 이렇게 무조건적인 추앙을 해 줍니다. 그리고 이 작가의 전작인 '나의 아저씨'에서는 40대의 박부장이 온갖 어려움 속에서 자라나 세상에 원한을 품은 20대 지안에게 이렇게 '내 편'이 되어줍니다. 공통점은 박부장이나 미정이 사회적 기준으로 볼 때 적응을 잘 하거나 유능한 사람은 아니라는 겁니다. 작가는 유능이 세상을 바꾸기 보다는 바르고 따뜻한 것이 세상을 조금씩이라도 변화시켜 간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 같습니다. 

 

우리가 몸 담고 있는 '선교' 역시 유능에 의해서가 아니라 바름과 따뜻함에 의해서 한 걸음씩 나아간다고 생각합니다. 계신 곳에서 조건에 상관없이 비록 변화의 조짐이 전혀 보이지 않을지라도 현지의 형제 자매들을 '추앙'해 주고 '편'이 되어주는 여러분 때문에 그들의 삶에 조금씩 꿈틀거림이 있으리라 믿습니다. 얼마전 한 선교사님으로 부터 받은 기도편지의 몇 문장이 현지에서 일상을 살며 만나는 이들에게 그 '추앙'을 보여주는 듯 해 인용하며 마칩니다. 하반기에도 여러분의 강건함을 빕니다. 샬롬.

'저는 요즘 일상의 작은 재래시장에서 흥정을 하지 않습니다. 심방을 하려니 과일이 필요해서  과일을 사러가면  그 옆에 아주 작은 난전 야채주인이 부러운 듯 바라보는 것이 미안해 다음날은 일부러라도 뭔가를 사주러 갑니다. 하루의 일용할 양식을 저들의 식탁에 허락해 주시길 바라는 마음으로... 모두가 하고 있는 일들에 대해 존중을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2022년 7월 1일

권성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