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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에서

아! 게일

품에서는 한달에 한 번 혹은 특별한 사안이 있을 때에 마다 GMF에 속한 가족들 그리고 이 공간을 찾아 주시는 선교 관심자 분들에게 보내는 일종의 대표 서신입니다.

 

곳곳에서 살고 또 사역하시는 사랑하는 선생님들,

 

무더위가 기승입니다. 강건하시길 빕니다.

지난 달 영국 출장 중에 지인을 만났는데 한국 선교사 제임스 게일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 주었습니다. 캐나다 출신의 청년으로 25세인 1888년에 우리나라에 선교사로 왔고 몇 년후 친구였던 헤론 선교사가 전염병 치료 중 사망하자 미망인인 헤리엇 선교사와 결혼했고 헤리엇이 사망한 후에는 영국 출신 여성과 결혼했기에  40년간의 한국 선교 사역 후에 아내의 고향인 영국 바스(Bath)로 돌아가 10년간 남은 여생을 보냈는데 바스 근처에 있는 그의 무덤을 근래에 알게되어 한국성서공회, 연동교회 등이 새롭게 묘비를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해서 시간을 내어 그 무덤을 방문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런 훌륭한 선교사가 있었다는 사실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아마 인터넷에서 쉽게 자료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기에 제가 감동받은 몇 가지 지점만 나누려고 합니다.

 

바스(Bath) 인근 공원묘지에 있는 선교사 게일의 무덤에는 성경책 모양의 낮은 묘비 하나가 있을 뿐이다.

 

1. 언어 - 선교사가 현지어를 배우는 것은 가장 기본입니다. 근래에 언어를 배우지 않고도 사역하는 선교사들이 있다는 이야기를 여기저기에서 듣습니다. 선교가 단순히 하나의 일로 축소된 까닭입니다. 게일은 도시를 떠나 시골로 들어간 첫 선교사입니다. 미혼이라 운신의 폭이 유연했던 이유도 있었겠지만 그는 황해도 해주와 장연으로 가서 한국어를 배우고 사역 기간동안 수십 차례 한반도를 여행하며 사역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재능과 노력이 모여 한국어를 여러 면에서 가장 잘 이해하는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당시 황해도로 간 것은 무모한 행동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게다가 그가 머문 방의 문 창호지를 뚫고 "구멍 뒷면엔 단 한번의 깜빡임도 없이 나(게일)를 주시하던 검은 눈동자들이" 많았다고 하니 유리창 속에 사는 삶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노력으로 인해 천로역정을 한국어로 번역했고 구운몽 등 한국 소설을 영어로 번역하여 세계에 알리는 놀라운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2. 성경번역 - 언어를 잘해서 였는지 당시 목사가 아니고 젊은 청년 선교사임에도 성경번역위원회에 포함되어 많은 부분을 감당했습니다. 만주에서 번역한 존로스 역의 성경이 있었지만 북쪽 방언이 강한 번역이라 언더우드, 아펜젤러 등 선교사들은 성경을 새롭게 번역하기로 결정하고 번역 위원회를 구성하였습니다. 그리고 게일 선교사는 번역의 많은 부분을 감당하였습니다. 성서번역 위원으로 일했기에 이번 묘비 제작에 한국성서공회가 함께 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성경번역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가 하나님이라는 용어를 무엇으로 정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여러 의견이 있었겠지만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하나님'이라는 용어로 결정된 것은 게일 선교사의 공헌이 크다고 합니다. 수 많은 문학작품과도 관련되어 있지만 게일 선교사의 가장 큰 관심은 역시 성경번역이었다고 믿습니다. 물론 게일의 한국어 공부와 성경번역 등 그의 깊은 사역에는 성실하고 깊이 있는 이창직이라는 한국인이 있었음을 동시에 기억해야 합니다. 현지인을 존중하고 함께 동역하며 큰 역할을 감당하도록 도운 게일 선교사의 혜안이 빛납니다. 

 

게일 선교사

 

3. 사람에게로

마지막으로 게일은 사람을 보았습니다. 당시 우리 나라는 양반, 상놈 등 신분의 차이가 여전히 심하던 시대입니다. 하지만 게일은 문화에 의해 사람에게 씌어져 있는 굴레가 아니라 그 너머의 사람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그 사람 말입니다. 종로에 있는 연동교회가 묘비 제작에 참여하는 이유는 게일 선교사가 연동교회의 1대 담임 목사였기 때문입니다. 게일 선교사는 서울로 오기 전 지금은 북한에 속한 원산에서 사역을 하였는데 그곳에서 천민 갖바치 출신인 고씨를 전도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름이 없던 그에게 찬익이라는 이름을 지어줍니다. 서울로 올 때 게일선교사는 고찬익과 함께 와서 연동교회의 담임을 맡게 됩니다. 1905년 연동교회는 처음으로 장로 선출을 하게 되었는데 천민 출신 고찬익이 선출되었다고 합니다. 이 일로 일부 양반 출신들이 교회를 떠나기도 했고요. 고찬익은 이후 평양신학교 첫 학생으로 들어갔으나 졸업 전에 소천했습니다. 살았다면 아마도 게일 선교사는 연동교회의 목회를 그가 잇도록 했을 것입니다. 그 후에도 이명혁, 임공진 등 천민 출신이 이어서 장로가 되어 이명혁 장로는 후에 평양 신학교를 마치고 게일 선교사에 이어 연동교회의 2대 담임목사가 되었다고 합니다. 오늘날 정신여고, 경신고등학교 등도 게일 선교사의 사역 결과라 할 수 있습니다. 

 

40년의 사역을 이 짧은 지면에 쓴다는 것 자체가 오히려 그 분의 사역을 축소하는 결과가 될 것 같아 이만 줄입니다. 

 

올해 안에 새로운 묘비가 세워질 것으로 기대하고 있는데 현재 있는 성경책 모양의 낮은 묘비에는 짧은 비문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왼쪽에는 마지막 살았던 주소와 사망일시 그리고 가족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른쪽이 그가 살아 온 삶에 대한 40년 사역의 함축적인 기록입니다. 아주 절제되고 간결한 그 기록을 읽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신실한 성도이며 1888년부터 1927년까지 40년간 한국에서 선교사였던 그를 추모하며..

한국 사람들에게 거룩한 성경을 전해 주려고 번역과 온 힘을 다한 박사.."

짧은 기록에 오로지 한국, 한국인이 적혀 있었습니다. 풀이 무성한 공원묘지 한 곳에 찾기도 힘들게 놓여 있는 작은 성경책 모양의 비문이지만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그의 사랑만큼은 그가 전해 주려고 했던 말씀의 깊이 만큼이나 마음 속 깊이 전해졌습니다. 이런 수고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왔고 오늘 여러분의 수고로 그 말씀이 여러분들이 섬기는 그 사람들에게 전해집니다. 게일 선교사의 수고와 여러분의 수고에 깊이 감사를 드립니다. 샬롬.

 

2022년 8월 1일

권성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