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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에서

죄인과 배교자

품에서는 한달에 한 번 혹은 특별한 사안이 있을 때마다 GMF에 속한 가족들 그리고 이 공간을 찾아 주시는 선교 관심자 분들께 보내는 일종의 대표 서신입니다.

 

곳곳에서 살고 또 사역하시는 사랑하는 선생님들,

 

11월입니다. 엊그제 이태원에서 안타깝게 숨진 젊은 자식들의 명복을 빕니다. 자식을 잃은 부모들의 눈물과 친구를 잃은 젊은이들의 눈물이 섞여 가슴 아픈 시월을 떠나 보냈습니다. 새로운 달에 치유와 회복이 있기를 바래봅니다.

  

얼마전 영국 출장 길에 김훈 작가의 장편소설 하얼빈을 읽었습니다. 암울했던 시대를 살아야 했던 누군가의 자식, 서른 한 살 청년 안중근의 고뇌가 작가의 손을 통해 마음에 전해졌습니다. 그 내용을 다 전하기는 어렵습니다. 소설 말미에 작가의 후기가 있었는데 소설을 마친 작가의 후기대신 김훈 선생은 자신이 소설을 준비하며 발견한 역사적 사실 몇가지를 기록해 두었습니다. 소설로 마쳤다면 궁금했던 내용이 사실인지 작가의 상상력인지 구분되지 않아 인용하기 어려웠을텐데 그 배려가 고마웠습니다.

 

(사진=비욘드이엔티) 출처 :  데일리팝(http://www.dailypop.kr)

 

저는 전에 조선에서 순교한 3인의 첫 프랑스 선교사 중 앵베르 주교와 샤스탕 신부의 생가를 방문했을만큼 우리나라에 복음을 전해 준 프랑스 선교사들에 대해 존경의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 부분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안중근의 의거 당시 우리나라의 주교였던 뮈텔 주교는 명동 대성당 완공 등 구한말 천주교회를 위해 애를 많이 쓴 선교사입니다. 하지만 그는 안중근의 대의를 인정하지 않았고 도마라는 세례명을 가진 천주교 신자 안중근을 교인이 아니라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어긴 죄인으로 단정했습니다. 안중근 고향의 사제였던 또 다른 프랑스 신부가 여순 감옥의 안중근을 방문하자 그를 중징계하였습니다. 1910년 교회로부터 죄인으로 단정된 안중근의 명예가 회복된 것은 그로부터 83년이 지난 1993년 처음으로 공식적인 안중근 추모 미사가 진행되었을 때였습니다. 그 미사를 집전한 사람은 프랑스 사람이 아니라 김수환 추기경이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조선의 첫 교회 지도자였던 이벽을 배교자로 만든 사람도 사료를 애매하게 기록한 다블뤼 주교와 한국에 한번도 오지 않고 그 사료를 모아 조선천주교회사를 쓴 달레 신부에 의해서였습니다. 그들 모두 외부인인 프랑스 신부들입니다. 그리고 그 주장을 뒤엎은 사람은 프랑스로 유학가서 그 주제로 박사논문을 쓴 이성배 신부였습니다. 달레의 책은 1874년이고 이성배 신부의 책은 1977년이니 이 역시 100년 후입니다. 

 

외부인인 선교사의 판단이 얼마나 조심스러워야 하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내부자의 시각을 갖는 일은 내부자가 아니니 불가능하다고 보아야 하고 따라서 내부자의 몫은 내부자에게 맡겨두어야 합니다. 선교사의 판단이 한 세기 동안이나 누군가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면 차라리 판단을 하지 않는 것이 옳은 일이라 생각됩니다.

내부인 김수환 추기경과 이성배 신부의 용기가 자랑스럽습니다.

 

여담입니다만, 수년전 조선의 첫 프랑스 주교였고 순교한 앵베르 주교의 생가를 방문했을 때 생긴 일입니다. 지금 천주교인들이 방문하는 주교의 생가는 사실 그의 본래 집이 아니라 그의 어머니가 잠시 몸 풀던 숙소입니다. 그의 본래 집은 거기서 좀 떨어진 곳에 있는데 아주 우연히 그 본래 집 앞에 사는 한 프랑스 교수를 만나게 되어 폐허가 된 앵베르 주교의 집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그 프랑스 교수가 제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주 오래전에 한국 사람 한 명이 다녀 갔는데 그 때 내가 안내했다. 그리고 당신이 두번째 방문자다". 제가 물었습니다. "그 때 누가 왔는지 기억하시나요?" 그 교수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카디날 킴"(김수환 추기경).

 

여러분이 섬기는 선교지에도 민족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사람 안중근과 같은 청년, 그리고 역사를 바로잡는 김수환 추기경처럼 용기있는 현지인이 세워지기를 기도합니다. 샬롬.

 

2022년 11월 1일

권성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