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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반공/삼선교: 삼위일체적 선교와 교회

뉴비긴의 "오늘날의 선교를 위한 삼위일체 교리" 4

뉴비긴의 책 '오늘날의 선교를 위한 삼위일체 교리' 4장에 대한 반추입니다. 4장은 삼위일체 안에서 현재 선교 문제에 대한 대안적 답을 찾을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논의를 시작합니다. 길지 않은 내용이니 한종석 선생님이 번역해 준 아래의 전문을 꼭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4. 삼위일체 교리의 관련성 (The Relevance of Trinitarian Doctrine)

1) The purpose of the Chapters which follow is to show that there are resources for the meeting of these perplexities within the Christian understanding of God as Father, Son and Holy Spirit, to invite the missionary movement to bind to itself afresh the strong Name of the Trinity.

이제 앞서 지적한대로 선교가 당면하는 여러가지 문제들에 대해서 뉴비긴은 결국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이해 안에서 그 해결 방안이 있다고 말한다. 그것을 본격적으로 다루기 전에 이 장에서는 그 상관성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  

2) The church-centric view of missions has perhaps been too exclusively founded upon the person and work of Christ and has perhaps done less than justice to the whole trinitarian doctrine of God.

선교에 있어 삼위일체적 견해가 충분히 다루어 지지 않은 것에 대해 뉴비긴은 우리가 오늘날에도 익숙한 것처럼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초점을 맞추는 우리의 인식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물론 그런 강조가 틀린 것도 아니고 또 그를 통해 많은 열매가 있었다는 것도 인정한다. 옛날 사거리에 서서 전도지를 나누어 주는 것만으로도 열매를 거두던 시기가 있었다. 그렇지만 오늘날 전도지를 나누어 주는 것이 그러한 열매에도 불구하고 충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가 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중심으로 선교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고 열매를 맺지만 그것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기 전까지 무엇이 부족한지를 우리는 잘 깨닫지 못한다. 뉴비긴은 당시 당면한 문제에 대해 궁극적으로 삼위일체의 풍성한 이해가 답을 줄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이 문제를 다루어 나간다.

3) If one looks to the New Testament one certainly does not find a formally developed doctrine of the Trinity - any more than one finds other doctrines formally developed. But an attentive reader will note how constantly a trinitarian pattern underlies the language of St Paul, and how large a place is taken by the work of the Holy Spirit, and by the reference of all things finally to God the Father. And when the Church began to take the message of salvation through Jesus Christ out into the pagan world, it very soon found itself compelled to articulate a fully trinitarian doctrine of the God whom it proclaimed. It is indeed a significant fact that the great doctrinal struggles about the nature of the Trinity, especially about the mutual relations of the Son and the Church and the pagan world.

다른 교리들과 마찬가지로 삼위일체 교리도 신약성경에서 딱 부러지게 설명하고 있지 않지만 바울의 언어 속에 삼위일체가 녹아져 있다는 것을 주의 깊게 보면 알수 있다고 뉴비긴은 말한다. 요한복음 역시 비록 성부와 성자의 2위일체가 강조되고 있지만 그 역시 성령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삼위일체가 녹아져 있음을 볼 수 있다.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논의가 사변적으로 생각에 의해 시작된 것이 아니라 교회가 이방세계에 복음을 전하기 시작한 바로 그 시작점에 논의가 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교회와 이방 세계가 만나는 그 선교적 상황에서 교회는 복음을 바르게 전하기 위해 이 삼위일체 교리를 발전시켰다는 사실이다. 뉴비긴의 말을 좀더 보면.

The vehemence of the doctrinal struggles which centred on the formulation of the trinitarian doctrine, and especially on the question of the relation of the Son to the Father, is evidence of the centrality of this issue for the whole Christian witness to the pagan world of that time.

이방세계에 복음을 전함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소개할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어떻게 그 분의 정체성을 설명할지는 선교적 상황에서 가장 먼저해야 하는 중요한 문제였다는 것이다. 마치 새로운 언어로 성경을 번역하기 위해 '하나님'이라는 용어를 결정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이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함에 있어 그리스도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지가 복음 증거에 가장 우선되어야 하는 문제였다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가장 많은 내용을 알고 있었을 사도 요한이 그의 복음서를 시작하면서 '태초에' 다음에 '하나님이'가 나와야 하는 문장에 '말씀이' 계셨고 그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그 말씀이 곧 하나님이라고 선언하면서 복음서를 시작한 것은 가장 선교적인 복음서였다는 것을 입증한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4) By contrast, during the era of 'Christendom' the doctrine of the Trinity has not occupied a comparable place in the thought of Christians. Not that there has been any widespread tendency among devout Christians to deny the doctrine, but simply that it has usually been regarded as a venerable formulation handed down from the past, or perhaps - if we are in an apologetic situation - a troublesome piece of theological baggage which is best kept out of sight when trying to commend the faith to unbelievers. It is significant that during the great theological struggle to the Reformation, the doctrine of the Trinity was never in dispute.

뉴비긴은 기독교 제국 시대에서는 오히려 삼위일체에 대한 논의가 중심을 차지하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이 교리에 대한 거부감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특별히 이것을 강조해야 할 상황이 없었거나 전도할 때 괜히 이야기해서 문제를 만들 필요가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종교 개혁 때의 신학적 논쟁에서도 삼위일체 교리가 논쟁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이 뉴비긴의 지적은 곰곰히 생각해 볼 여지가 많다. 초대교회에서 이방세계에 복음을 전할 때 삼위일체 논의가 중심이었으나 기독교 제국 시대에는 별로 그렇지 않았다는 것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다. 오늘날도 선교적 상황에서 이 삼위일체 문제가 특별히 다루어야 할 중심에 있지 않다면 우리는 진정한 '선교적' 상황에 있지 않거나 혹은 여전히 우리가 기독교 제국의 패러다임 안에 있거나 그 패러다임이 가능한 곳에서 선교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시사점이다. 최근 자카르타에서 무슬림 개종자 목사님이 인도하는 교회에서 말씀을 나누고 예배 후에 그 목사님과 식사하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역시 그 분의 선교 신학의 핵심도 삼위일체였다. 무슬림이 가지고 있는 준거틀 안에서 삼위일체신학을 발전시킨 그 분은 선교적 상황에서 그 필요가 있기에 그 선교 신학을 발전시킨 것이었다. 무슬림 선교하는 많은 지역에서 선교사들이 굳이 논쟁이 되는 것을 피하려는 것과는 사뭇 대조적이었다. 우리는 진정한 선교적 상황 속에 있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5) I have sometimes heard the Gospel preached in such a way that the hearers - accustomed to many gods - were led to think that the name  of Jesus represented yet another god, this time more powerful and beneficent than those they already knew. Clearly that would not be the Christian faith as the New Testament understands it. I have always found, in talking to such village groups, that they had already in their minds the consciousness, however vague, of one God behind all the gods, One who was their creator and judge. If this consciousness is present, how does one relate the name of Jesus to it? Does one say that 'Jesus' is the name of that one God? Clearly, again, this would not be the New Testament faith. The truth is that one cannot preach Jesus even in the simplest terms without preaching him as the Son.

뉴비긴은 선교적 상황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증거되는 두 가지의 오류를 지적한다. 하나는 인도와 같이 수 많은 신을 믿고 있는 사람들이 예수를 그 많은 신에 더하여 또 하나의 신 정도로, 심지어 조금 더 능력있는 신 정도로 이해되는 경우이다. 성경은 이러한 생각을 지지하지 않는다. 다른 하나는 사람들이 비록 복음을 듣지 않았어도 모든 신들 보다 위에 계신 가장 높으신 창조자에 대한 인식을 가지고 있는데 예수가 바로 그 신이라고 말하는 것이 옳은가? 뉴비긴은 그 역시 성경이 말하는 바가 아니라고 지적한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성부와 관련하여 성자라는 정체성을 설명하지 않고 복음을 전할 길은 없다는 것이다.

6) This is not to suggest that an explicit trinitarian theology will be the substance either of the preacher's talk or of the new converts' understanding. We have already said that even in the New Testament itself such an explicit trinitarian thelogy is not found. But it is to say that a true understanding of the questions which God raises for us in our time, and a true restatement of the meaning of the missionary task will rest, as the New Testament rests, upon the revelation of God as Father, Son and Spirit.

앤드류 월스는 아프리카에 선교사로 가르치러 갔다가 그곳 상황이 오히려 초대교회의 상황과 비슷하기 때문에 자신이 잘 배워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많은 것을 실제로 배우고 알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뉴비긴 역시 우리가 말하기 전에 선교지에서 잘 듣는 다면 성령이 이미 그 곳에서 일하고 계셨음을 알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다. 선교는 선교사에 의해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역사하고 계시는 성삼위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역사에 기록을 남기지 않는 많은 현지인들이 실제로 선교사 이전에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준비되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선교사가 이러 저러한 이유로 떠나도 그 작게 뿌려진 씨앗이 자라도록 지속적으로 역사하시는 분도 성삼위 하나님 이심을 고백해야 한다. 따라서 삼위일체 교리는 숨겨 두었다가 믿게 된 다음에 살짝 소개해야 하는 장식품이 아니라 복음의 기초요 핵심이라고 뉴비긴은 강조한다. 그는 이렇게 4장을 맺고 있다. 삼위일체 신학이 설교나 개종자가 이해해야 하는 본질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시대에 하나님께서 보게 하시는 여러 질문들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선교의 의미를 재고하기 위해서는 삼위일체로 계시된 하나님의 기초 위에서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