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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에서

질문

품에서는 한달에 한 번 혹은 특별한 사안이 있을 때에 마다 GMF에 속한 가족들 그리고 이 공간을 찾아 주시는 선교 관심자 분들에게 보내는 일종의 대표 서신입니다.

 

곳곳에서 살고 또 사역하시는 사랑하는 선생님들,


언제 또 기습적인 추위가 그리고 뿌연 황사가 덮칠지 모르지만 오늘은 그냥 '봄'입니다. 출근 길 주변 동산에는 벗꽃이 활짝 피어 있습니다. 날씨는 더워지기 시작하는데 얼굴에 쓴 마스크를 언제 벗을 수 있을지 아직은 막연합니다. 평안하셨는지요?

오늘은 질문에 대해 생각해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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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이라는 것은 아직 개념이 없어 무언가를 막 시작할 때 - 예를 들어 처음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조성하실 때 - 그리고 변화가 별로 일어나지 않는 시기에 제한적으로 필요합니다. 아기에게 '엄마' '엄마'라는 답을 반복해 주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시기를 벗어나면 '내가 누구?'라고 물어서 아이 스스로 '엄마'라는 말을 하도록 해야 합니다.

율법은 일종의 답입니다. 역할이 있지만 궁극적 목적은 아닙니다. '너는 어떻게 읽느냐?'라고 율법학자에게 물으신 예수님의 의도는 답을 외우려 하지말고 생각하며 살라, 더 정확히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살아 있어야 그 의미 파악이 가능함을 말씀하신 것이라 생각됩니다.

답은 시간이 지나면서 신화가 됩니다. 그것만 붙들면 백점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물이 동할 때 가장 먼저 이르면 병이 낫게 된다며 이루어 지지 않는 답을 붙들고 있으나 사실 그것은 답이 아니라 신화입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고 물으신 예수님의 질문 역시 우리가 무엇을 답으로 붙잡고 있는지 성찰해 보라고 요구합니다.

답이라는 형식이 오랜 시간 우리를 얽매이게 할 때 그것을 벗어나는 길은 역시 통찰력 있는 질문입니다. 완전히 새로운 시대를 열면서 주님은 늘 질문을 하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무엇을 구하느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예수님의 이 질문들은 단순한 답을 요구하기 보다는 스스로 성찰하도록 하는 반추적 질문입니다.

오늘날처럼 변화가 심하고 변화가 어디로 어떻게 튈지 모르는 시대에는 더욱 어설픈 답보다는 바른 질문이 절실합니다.

선교사란 섬기는 공동체에 우리가 만든 답을 주는 사람들이 아니라 바른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라 정의할 수 있습니다. 그들 스스로 하나님과 관계를 맺어가도록 돕는 자로서 답 보다는 질문을 해서 스스로 답을 찾고 그 답을 수정해 갈 수 있는 능력을 갖도록 도와야 합니다. 코로나와 관련해서도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라는 질문에 앞서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을 몇년 전에 알았더라면 그 때 내가 어떻게 남은 시간을 보냈을까라고 물어야 하고 그것이 바로 우리가 했어야 했던 그리고 이제부터라도 해야하는 방향이라고 생각됩니다. 계신 곳에서 바른 질문을 던지는 예수님의 제자이시길 빕니다. 사월도 강건하시길 빕니다. 샬롬.

 

2021년 4월 1일

권성찬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