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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에서

아프간 소회 (2)

품에서는 한달에 한 번 혹은 특별한 사안이 있을 때에 마다 GMF에 속한 가족들 그리고 이 공간을 찾아 주시는 선교 관심자 분들에게 보내는 일종의 대표 서신입니다.

 

곳곳에서 살고 또 사역하시는 사랑하는 선생님들,

 

9월 '품에서'를 8월 중순에 긴급히 보냈지만 9월을 그냥 지나가기 보다는 아프간에 대한 관심이 생겼을 때 조금 더 소개하는 것이 좋을 듯 싶어 아프간 소회 (2)를 보냅니다. 지난 번 이야기가 현 상황에 대한 공시적인 관점에서 균형을 잡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쓴 글이라면 이번 소회는 통시적인 관점을 간추려 볼까합니다. 좀 긴 글이 되겠습니다.

 

선교운동의 관점에서 세계를 여러 창 (window)으로 구별하는데 아프가니스탄은 페르시아창에 속합니다. 중동은 모두 아랍 사람, 아랍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이 계시는데 크게 보면 아랍과 페르시아로 나누어집니다. 이라크를 포함하여 서쪽은 아랍 지역으로 옛 바벨론과 관련됩니다. 이란을 포함하여 아프가니스탄과 타지키스탄은 페르시아 지역으로 옛 바사-메디아 지역입니다. 바사 (페르시아)가 제국이었을 때는 지금의 파키스탄과 인도 지역을 포함했으니 아프가니스탄과 고대 기독교의 연관은 예수님의 제자 도마 그리고 동쪽으로 간 경교 (네스토리안)와도 관련을 가지고 있습니다. 동방 정교회가 확장되었을 때 아프가니스탄의 서쪽 중심도시인 헤랏 (Herat)에는 교구 본부가 있었을 정도로 기독교가 왕성하기도 했다고 전해집니다. 고대에 관심있는 분들은 관련 책들을 사서 공부하시면 되고요. 저는 개신교 선교와 관련된 부분을 정리하면서 통시적 시각에서 오늘 아프간은 어디쯤 있나를 나누어 보려고 합니다.

 

아프간을 위해 기도한 사람들

윌리엄 밀러 (William M. Miller)라는 미국 선교사가 있습니다. 아주 헌신된 분이고 1919년 부터 1962년까지 43년을 이란 선교사로 지낸 분입니다.

당시 막 문이 열린 이란 동부지역의 마샤드라는 곳으로 갔습니다. 이란 동부는 아프가니스탄 서부 지역과 접경한 지역입니다. 1921년 밀러 선교사는 아프간과 더 가까운 자볼이라는 곳으로 선교 사역을 갔다가 내친 김에 아프가니스탄 국경을 가게 됩니다. 당시 아프가니스탄에는 선교사가 한 사람도 없었고 완전히 닫힌 지역이었기 때문에 밀러 선교사가 늘 아프간을 위해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두 나라의 국경은 마치 우리나라 임진강처럼 헬만드 강으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아무도 지키는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밀러 선교사는 수영을 해서 아프간 땅을 밟았습니다. 가져갈 것이라곤 광야의 마른 풀 외에는 없어 풀을 한 줌 챙겨서 다시 건너왔습니다. 밀러 선교사는 동역자들에게 보내는 기도편지에 그 마른 풀 하나씩을 넣고는 이렇게 적었습니다. "이것이 아프가니스탄의 첫 열매입니다!". 밀러 선교사는 자신의 경험을 기록한 여러 책을 남겼는데 특히 어린이들을 위해 재미있는 '페르시아 이야기'를 남겼습니다. 우리 말로는 '살람! 페르시아'라는 제목으로 파이디온에서 출판되었습니다.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74122 )

 

윌리엄 밀러 선교사

 

밀러 선교사는 이란에 가기 전에 이미 많은 사람들에게 선교 도전을 했는데 그 영향을 받아 선교사가 된 분 중에 윌슨 선교사가 있었습니다. 윌슨 선교사도 이란으로 갔는데 밀러 선교사와는 반대쪽인 북서부의 타브리즈로 갔습니다. 밀러 선교사가 수영을 해서 아프간 땅을 다녀오던 1921년, 타브리즈에서 사역하던 윌슨 선교사가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크리스티 윌슨입니다. 윌슨 선교사네 집에서도 늘 아프간을 위해 기도했기에 어린 크리스티 윌슨은 아프간에 대해 듣고 기도하며 자랐습니다. 성장 후에는 미국으로 와서 대학을 다니고 선교사의 꿈을 꾸었습니다.

크리스티 윌슨과 아프가니스탄

사실 밀러 선교사가 이란에 간 1919년은 우리나라에서 3.1 운동이 일어난 것 같이 아프간에서도 당시 지배하던 영국과 치열한 전투 끝에 독립을 얻어냈고 1933년에는 자히르 샤라는 젊은 왕이 즉위하게 됩니다. 이 젊은 왕으로 인해 나라가 개혁을 시작하게 됩니다.  1947년에는 인도에서 파키스탄이 독립을 하고 그 지역이 막 성장을 향해 나아가던 때입니다. 미국과도 외교관계를 열고 나라를 발전시키려 했던 자히르 샤 왕은 서방국가에 도움을 요청하였는데 그 목록에 영어 교사도 있었습니다. 대학을 마치고 신학을 공부한 크리스티 윌슨은 이 소식을 듣자 마자 지원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바로 승락이 안되어 영국으로 건너가 박사학위를 하고 1951년에 드디어 목사인 크리스티 윌슨은 영어교사로 아프가니스탄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텐트메이커', 즉 '자비량 선교사'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하여 전문인 선교사, 비지니스 선교사 등의 개념으로 확장되는 일에 초석을 놓게됩니다. 선교의 문이 닫힌 지역에 갔던 이 헌신된 선교사에게 많은 기적같은 일들이 일어나는데 여러 책을 통해 그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현대의 자비량선교사들'은 '텐트메이커'라는 제목으로 다시 출간되었고요 제가 가진 책은 more to be desired than gold인데 한국어로 번역되지 않았나봐요.)

 

 

카불에 살던 윌슨 선교사는 영어를 가르쳤지만 주말에는 자신의 집을 개방하여 카불에 와 있는 외국인들의 예배를 인도하였습니다. 목회 경험이 있었기에 외국인 모임의 인도자가 된 것이죠. 그런데 사람들이 많아져서 집으로는 부족하게 되었습니다. 마침 1959년에 미국의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아프가니스탄을 방문하게 됩니다. 당시 미국의 수도인 위싱톤에 무슬림 외교관들을 위해 모스크를 지었는데 윌슨 선교사는 대통령의 아프가니스탄 방문이 절호의 기회라고 여겨 대통령에게 세례를 준 목사님에게 편지를 씁니다. 아프간 방문 때 대통령이 자히르 샤 왕을 만나면 워싱톤에 모스크를 지었으니 대신 카불에 외국인들이 예배하도록 교회 건축을 허락해 달라고 요청하라는 부탁이었습니다. 그래서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카불을 방문했을 때 왕에게 허락을 얻었고 전 세계에서 모금하여 1970년에 첫 예배당을 카불에 아름답게 지었습니다. 역사적인 일입니다. 하지만 3년 후인 1973년에 왕정이 무너지면서 무슬림들이 몰려와 예배당을 부수어 버렸습니다. 제가 알기로 그 후로 아직까지 아프간에 그와 같이 공식적으로 교회가 세워진 적은 한번도 없었습니다.

 

 

윌슨 선교사는 우연한 기회에 시각 장애를 가진 소년을 알게 됩니다. 참고로 아프가니스탄에는 장애우들이 많습니다. 제가 속했던 단체에도 시각 장애, 청각 장애 등 선천적인 장애우 대상 사역이 큰 사역이었습니다. 물론 전쟁으로 인해서 지뢰 등 사고를 당해 후천적으로 장애를 가진이들도 많이 있습니다. 아프가니스탄 여러 종족들은 마치 구약에 나오는 것 처럼 4촌간 결혼을 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것이 선천적 장애의 원인이 되는지는 모르겠으나 여하간 장애우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소년과의 만남이 결국 시각장애인 사역으로 확장되었고 후에 안과 병원등이 세워집니다. 이를 계기로 하여 1966년에 국제 아프간 선교회 (International Afghan Mission)가 세워집니다. 이 이름은 '나는 세상의 빛이니' (요8:12)에서 영어 시작인 'I am' (IAM)을 가지고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IAM 사역자들은 시각 장애인들 뿐만이 아니라 다양한 사역을 하였고 어려운 상황에서 아프간 사람들을 진심으로 섬기는 귀한 사역을 감당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많은 희생을 치르기도 했습니다. 지금까지 55여년간 쫒겨나기도 하고 다시 들어가기도 하면서 특히 의료 부분에 많은 헌신을 하였습니다. IAM 이후에 여러 기독교 구호 기관들이 세워졌습니다. 저희 가정도 아프간에서는 한 기독교 구호 기관을 통해 사역을 하였습니다.

1970년대에 안과 사역을 위해 아프간으로 들어간 IAM 소속 선교사 중에 톰과 리비 리틀 선교사 (Tom & Libby Little)가 있습니다. 소련이 침공했을 때도, 탈레반이 카불을 점령했을 때도, 아프간을 떠나지 않고 남아 현지인들을 섬기던 헌신된 선교사입니다. 그런 환경에서 3명의 딸도 키웠습니다. 2010년, 톰은 아프간에서도 가장 험한 북쪽의 누리스탄에서 안과 사역을 하고 있었고 아내인 리비는 남아공에서 열린 2010 로잔대회에 참석했습니다. 대회에서 리비는 사역에는 고통이 따른다는 (Embracing Suffering In Service) 페르난도 목사의 발제에 응답을 맡았습니다. 리비 리틀 선교사는 아프간에서의 경험을 나누면서 어려운 순간에 그곳을 떠나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던 순간이 있었는데 한번은 남을 수 밖에 없었고 또 한번은 남기로 결정했으며 그 결과 현지인들과 어떤 유대감과 복음의 결과를 가져 왔는지 나누었습니다. 그 응답을 마치고 얼마 후에 누리스탄에서 안과 사역을 마치고 돌아 오던 남편 톰 선교사와 그 일행이 탈레반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가장 큰 고통을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검안사인 톰 선교사

 

30여년을 성실하게 섬기고 주님의 부름을 받은 톰 선교사와 그의 가정을 통해 많은 씨가 뿌려졌고 지금도 열매를 거두고 있다고 믿습니다. 지금은 아프간을 마지막으로 떠난 미군 장성의 사진이 세상에 감동을 주지만 세월이 지나면 이번 아프간 사태에도 그곳을 떠나지 않고 남아서 조용히 어려운 사람들을 섬긴 사역자들의 이야기가 발견되어 하나님의 나라를 빛나게 할 것으로 믿습니다.

 

혼란의 시작과 소련의 침공

1970년대는 아프간으로서도 근대화의 길을 걷고 있었고 현대식 교육이 진행되었고 비교적 선교사들도 다양한 모습으로 들어갈 수 있던 때 였습니다. 위클리프도 이 때 사역자들이 들어갔습니다.

 

70년대 카불의 모습

 

아프간 안에는 약 50여개의 언어들이 있고 성경번역이 필요한 언어들도 여러 언어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73년에 한 사건이 발생되어 그 때부터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전쟁의 원인됩니다. 당시 자히르 샤 왕이 신병치료차 이태리에 가 있었는데 총리를 맡고 있던 왕의 사촌 다우드가 군주제가 아닌 공화국을 세우겠다고 쿠데타를 일으켜 나라가 뒤집힙니다. 독립 전에 영국과 갈등이 있던 아프간은 지리적으로 가까운 소련과 비교적 좋은 관계를 가지고 여러 젊은이들이 유학을 가서 공부하고 돌아 왔는데 그러다보니 사회주의 사상을 가진 지식인들이 많았습니다. 다우드의 공화정은 결국 사회주의 세력에게 정권을 넘겨주게 됩니다. 하지만 사회주의 세력과 손잡고 다우드 정권을 물리친 전통 이슬람 세력은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다라키 대통령이 소련과 너무 친밀해지는 것에도 반대를 하면서 갈등이 일어납니다. 소련은 늘 부동항을 찾아 남쪽으로 세력을 확장하는 것이 (물론 아프간은 내륙이라 항구가 없지만 아프간을 통과해야 그 다음 목표를 이룰 수 있으니까요) 목적이었고 게다가 아프간에 이슬람 세력이 득세하면 지금의 중앙아시아 지역에 이슬람 운동이 일어날까 염려하여 1979년에 급기야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게 됩니다. 미국을 중심으로 많은 서방국가들이 1980년에 열린 모스코바 올림픽을 보이콧한 원인이 되었고 우리나라도 참가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소련의 침공은 당시 선교의 주요 세력인 서구 선교사들이 아프간을 떠나야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 이후로 선교회의 이름으로 들어가는 것은 용납되지 않았고 기독교 구호기관이 세워져 기독교 사역자들이 다양한 모습으로 합류하여 조심스럽게 사역을 이어갔습니다. 

 

소련과 맞선 무자헤딘

 

소련이 나라를 점령하자 수 많은 이슬람 전사들이 곳곳에서 일어나 독립운동을 하게 됩니다. 이들을 '이슬람 전사들'이라는 뜻의 '무자헤딘'이라 부릅니다. 무자헤딘은 주로 종족별, 정파별, 지역별로 일어났습니다. 소련이 워낙 강력했기 때문에 각 무자헤딘 그룹의 리더들은 주로 주변 국가로 망명을 가서 지도를 했습니다. 일제시대 때 만주 등으로 옮겨간 것과 비슷합니다. 유일하게 그 나라 안에서 끝까지 싸운 지도자가 있었는데 아흐마드 샤 마수드 장군 (Ahmad Shah Massoud )이라 부릅니다. 마수드 장군의 고향은 '다섯마리의 사자'라는 이름을 가진 빠인쉐르 (Panjsher, 요즘 보도에 판지시르라고 표기하는데 발음이 좀 이상합니다)인데 그곳을 중심으로 저항하면서 끝까지 버틴 분으로 아프간 사람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입니다. 

 

소련의 철수와 반복되는 혼란

많은 댓가를 치르고 소련은 결국 1989년에 철수합니다. 소련 붕괴에는 여러 요인이 있었겠지만 아프간에서의 철수가 큰 원인이 되었다고 평가 됩니다. 소련은 1991년에 붕괴됩니다. 이 때 부터  모든 정파, 종파, 종족들이 모여 연합을 해서 나라를 재건했어야 하는데 소련이라는 공동의 적을 상실하자 권력을 잡기 위한 무자헤딘 서로간의 전투가 벌어집니다. 이번에는 꼭 연합할 수 있기를 기대해 봅니다. 수도인 카불을 누가 차지하는가가 매우 중요한데 그러다 보니 카불에서 계속 전투가 있었고 패배한 세력은 퇴각하면서 도시 안에 지뢰를 묻어 카불은 그야말로 황폐한 도시가 되었습니다. 인구가 2000만 일때 지뢰가 1000만개 묻혀있었습니다. 마수드 장군은 권력도 사양하고 연합을 위해 노력했는데 당시 전쟁 때는 망명해 있고 기회가 오면 늘 연합하지 않고 방해를 하던 자들이 이번에도 탈리반과의 회담 장소에 있다는 소식을 들으니 참 답답하기만 합니다. 여하간 이들의 전쟁이 계속되었습니다. 

저희 가정이 아프가니스탄에 들어간 때가 바로 이 혼란의 때였습니다. 나라 안에 경제적으로 생산 되는 것이 없다보니 각 무자헤딘 그룹들이 지역마다 이권을 차지하였습니다. 10명을 데리고 있는 무자헤딘 지도자가 있으면 자신의 병사들을 데리고 100명을 거느린 지도자에게 붙습니다. 그런 방식으로 수 많은 그룹이 있었는데 그러면 병사들을 먹여 살리도록 이권 하나를 줍니다. 가장 흔한 것이 검문소 였습니다. 흙과 돌로 길턱을 만들어 차가 서게 만들고 돈을 뜯어내는 방식입니다. 저희는 잘랄라바드라는 도시에 살았는데 아프간-파키스탄 국경에서 그리 멀지 않습니다. 그 길에 돈을 뜯는 검문소가 몇 개 있었는지 기억이 안 날 정도입니다. 물론 조금 재산이 있는 집에는 무자헤딘이 총들고 들어와서 물건을 들어내가는 일도 빈번했습니다. 자고 나면 누구네 집에서 가져갔다, 누구네가 털렸다하는 말들을 자주 들었습니다. 심지어 아이를 납치해서 돈을 빼앗기도 했습니다. 제대로 된 정권도 아니지만 정권의 말기를 보여주는 상황이었습니다. 탈레반이 급속도로 나라를 점령할 수 있었던 것은 이 무자헤딘 그룹의 부패였습니다. 나라가 혼란하다보니 선교적으로는 기회가 더 있었던 면이 있습니다. 드러내 놓고 하지는 못해도 여러 구호, 개발, 의료 등의 사역을 통해 사람들에게 접근할 기회는 많았습니다. 

 

탈레반 정권 

지난 번 소회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96년에도 탈레반의 점령이 생각보다 빠르게 이루어졌습니다. 

'딸립' (Talib)이라는 말은 '학생'혹은 '구도자'라는 뜻입니다. 거기에 복수형어미인 '안'을 붙여 탈레반은 학생들 혹은 구도자들입니다. 주로 오랜 전쟁으로 고아가 되어 이슬람 학교인 마드라사에서 성장한 젊은이들이 구성원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들의 지도자는 물라 오마르라는 사람이었는데 드러나지 않던 인물입니다. 당시 듣기로 탈레반이 정복한 수도 카불에는 2인자를 보내 통치하게 하고 자신은 본거지인 칸다하르 (알렉산더가 인도까지 원정을 했었는데 여러 지역에 자신의 이름을 남겼습니다. 알렉산드리아 처럼 칸다하르는 알레산더의 이름에서 나왔습니다)에 남아 실제적인 통치를 했다고 들었습니다. 이번에도 2인자가 수도 카불에 있고 지도자로 알려진 물라 하이바툴라 아쿤드자다는 칸다하르에 있다고 보도됩니다.

당시 탈레반이 급속도로 나라를 장악한 것은 수도 카불외 지역에서 탈레반에 대한 저항이 크지 않고 이전 정권에 대한 실망이 컸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무자헤딘은 카불만 지키면 되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 다른 지역의 점령을 크게 개의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결국 1996년 9월 카불마저 함락이 됩니다. 다만 그 때도 여러 지역의 군벌들이 자신의 지역을 빼앗기지는 않았는데 북쪽 우즈베키스탄과 붙은 마자리샤리프에는 아프간 우즈벡족의 지도자 도스탐이 세를 지키고 있고 마수드 장군은 빠인쉐르에서 역시 지키고 있었습니다. 

탈레반이 정권을 잡자 나라의 보안은 이전보다 좋아졌습니다. 탈레반이라는 한 세력이 통치하니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의 삶은 강한 율법을 지켜야 하는 생활이 되었습니다. 여자 학교는 폐쇄되고 교육을 장려하지 않으니 남자 학교도 크게 기능을 하지 못했습니다. 시간에 맞춰 기도하는 것을 강제로 요구하니 그 시간이 되면 길에서 채찍으로 때리며 모스크에 가도록 했습니다. 저도 여러번 걸렸습니다만 맞지는 않았습니다. 자연스럽게 자라나는 수염에 손을 대지 말아야 했습니다. 수염을 길게 기르지 않던 사람들에게는 아주 갑갑한 일입니다. 수염을 검사하는 탈레반 요원들이 길에 있다가 티가 나게 수염에 손 댄 사람들은 일정한 기간 감옥에 보내서 수염이 자란 뒤에 풀어 주곤 했습니다.

저희는 탈레반 정권 아래에서 구호와 개발 사역을 진행할 수 있었고 그들이 사용하는 파쉬투어 교육 사역도 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사는 곳에서 제가 섬기는 종족이 있는 산지까지 가는 길에도 많은 탈리반 검문소가 있었는데 자주 검문하는 탈레반 요원들이 바뀌다보니 검문때 마다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한번은 탈레반 도지사를 만나도록 지인이 주선을 해서 당시 탈레반 서열 3인자쯤 되는 도지사를 만났습니다. 제가 하려는 사역을 설명하고 어려움을 이야기 했더니 허락한다는 간단한 증명서를 하나 써 주었습니다. 그것을 코팅해서 검문소 마다 보여주고 자유롭게 다니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래도 검문소에서 걸립니다.

 

이 기간은 아주 조심스럽게 사역을 하던 기간이라 기독교 구호 기관을 중심으로 교육, 보건, 의료, 장애우, 임업, 지역사회 개발 등의 사역을 통해 현지인들을 섬겼습니다. 말로 복음을 전할 수 없는 지역에서 모든 삶으로 사랑하며 섬기며 복음을 살아내야 하는 시간이었고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저의 선교 개념이 과업에서 관계로 전환되는 시기였습니다. 제가 했던 사역은 여기 소개하지 않겠습니다. 

탈레반은 아프간의 주 종족인 파쉬툰족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어 상대적으로 가장 고통을 겪는 소수 민족이 하자라족입니다. 징기스칸이 점령했을 때 남겨진 몽골족의 후손이며 하자라족은 저희와 얼굴이 비슷합니다. 카불 가까운 버미안이 주요 지역이지만 카불에도 많이 살고 있습니다. 카불에는 하자라족이 운영하는 식당들이 있는데 가끔 카불에 가면 그 식당에 가서 '만투'라고 부르는 음식을 먹곤 했습니다. 우리의 왕만두와 비슷하고 거기에 요거트를 뿌려줍니다. 언젠가 다시 '만투'를 먹게 되는 좋은 시절이 오기를 바랍니다. 하자라족은 파쉬툰족에 의해 무시 당하는 민족입니다. 탈레반 시절의 파쉬툰과 하자라의 이야기를 알려면 최초의 아프간 영어 소설로 알려진 할레드 후세이니의 '연을 쫒는 아이'를 읽어보시거나 영화를 찾아서 보시면 됩니다. 후세이니는 탈레반 시절 아프간에 살지도 않았는데 그 기간을 온전히 아프간에서 산 저보다 훨씬 세밀하고 정확하게 그 때의 모습을 그렸습니다.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7939553)

 

9.11과 아프간의 봄

아시다시피 탈레반이 아닌 외국 그룹이 이때 아프간 안에 들어 와 있었는데 오사마 빈 라덴이 이끄는 알카에다 였습니다. 제가 살고 있던 작은 도시 변두리에 그들의 캠프가 있었습니다. 알카에다 요원들은 저희가 사는 읍내에서 장을 보곤 했는데 저희 단체의 사역자들, 특히 서양 사역자들은 상점에서 그들에게 위협을 당하는 일들이 빈번해 졌습니다. 기본적으로 외국 사람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아프간 사람들은 그들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여하간 그들이 더욱 활개치며 다니기 시작하는 것이 눈에 띌 정도 였습니다. 그럴 즈음 저희 가정은 2001년 국내 사역을 하게 되어 7월에 아프간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8월부터 좋지 않은 소식이 들려 왔습니다. 당시 제가 속하지는 않았지만 가까이 지내던 기독교 구호 단체가 있었는데 그 당시 기준으로 볼 때 조금은 활발하게 전도를 하는 기관이었습니다. 그 기관 소속 단기 사역자들이 '예수영화'를 카불에서 상영하다 탈레반에게 걸려 잡혀들어가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여러 명이 들어갔는데 특히 미국과 호주에서 온 두 여성 사역자가 가장 핵심이어서 형식적인 재판 과정에 있었고 미국과 호주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사형이 예상되어 많은 사람들이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만일 사형이 집행된다면 사역이 크게 위축될 위기에 놓여 있었습니다. 9월에는 또 다른 소식이 들려 왔습니다. 북쪽에서 버티던 우즈벡족의 도스탐 장군도 패배하고 이제 겨우 남은 세력은 아프간 사람들이 가장 존경하는 마수드 장군 뿐으로 그 때까지도 고향인 빠인쉐르 지역을 중심으로 버티고 있었습니다. 탈레반으로서는 그곳을 점령하는 것이 불가능하자 알카에다가 나섰습니다. 마수드 장군을 저격할 목적으로 외국 인터뷰를 가장하여 폭탄이 설치된 비디오 카메라를 들고 가서는 자폭하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그 때가 2001년 9월 9입니다. 지금도 반 탈레반 세력이 그 지역에 모여 있고 탈레반과 대치하고 있다는 보도가 있는데 아버지 마수드 장군과 같은 깊은 헌신이 그 아들 마수드에게도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대게 세습은 이전의 정신을 따르지 못하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여하간 당시 탈레반이 나라를 모두 장악할 시간을 코 앞에 두고 있었습니다.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만일 그랬다면 오늘날 20세까지 혹은 당시 10세까지를 생각하면 오늘날 30세까지 탈레반을 경험하지 않은 새로운 세대의 출현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이틀 뒤 지금도 충격이 가시지 않는 9.11 테러가 발생했고 미국은 아프간 침공을 결정했습니다. 탈레반이 카불을 떠난 것이죠.

 

20년 후, 이제 무엇을 기도할까?

저는 아프간의 지난 20년을 평가할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아프간을 떠나고 수년 후에 카불과 제가 사역했던 곳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는데 당시 좀 혼란스러웠습니다. 탈레반 정권 아래에서 사역했던 경험에 비추어보면 9.11 이후 새롭게 들어 온 사역자들의 사역 형태는 저희 상상을 넘어서는 것이었습니다. 후에 한국교회는 안타까운 일을 경험했고 한국 여권으로는 입국이 안되는 상황을 지금까지 맞고 있습니다. 그 기간 외국 국적을 가진 분들이 사역을 했고 정부 차원에서, 국제 기관 차원에서, 그리고 민간 차원에서 많은 씨앗을 뿌렸습니다. 

성경번역선교회 (GBT)에 최숙희라는 선교사님이 계셨습니다. 미국에서 학위를 받고 한동대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교수셨는데 성경번역 사역을 알게 되어 늦게 선교사로 지원하였습니다. 그 때 저는 아프간에서 들어와 대표를 맡고 있었는데 저와 비슷한 나이의 최선교사님은 대표가 친구같아 좋다고 하시며 자주 대화를 했습니다. 사역지를 추천해 달라고 하길래 '제가 떠나면서 아프간에 한국 사역자를 보내겠다고 약속했는데 아무도 안가네요, 가실래요?' 했더니 정말 가셨습니다. 몇 년이 지나고 카불에 다시 갔을 때 최선교사님이 가르치고 있던 카불교육대학 강의실을 방문했습니다.

 

카불의 최숙희 선교사

 

탈레반 정권하에서 상상할 수 없는 일, 즉 한 강의실에 아프간 남녀 대학생들이 있고 최선교사님이 가르치고 있는 기적을 제 생애에 볼 줄 몰랐습니다. 그렇게 시대는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안타깝게도 최선교사님은 암을 얻어 몇 년의 투병끝에 먼저 소천하셨지만 아프간을 생각할 때 늘 마음에 있습니다. 최선교사님이 투병 중에 하신 말씀이 기억납니다. 여성 사역자로 혼자 살면서 늘 '나 다움'을 가치로 여기고 씩씩하게 살아야만 했는데 투병 기간이 길어지면서 자신의 몸을, 심지어 맡기기 싫은 일까지도 누군가에게 의존해야 하는 상황이 생기면서 '나 다움'이 아닌 '나 됨'을 경험하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나의 나 다운 것'이 아니라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 (고전15:10)라는 말씀을 새롭게 깨닫는다는 이야기를 남기셨습니다. 수 많은 최선교사님들에 의해 지난 20년간 변한 아프가니스탄, 특히 카불은 상상 초월입니다. 

몇 장의 사진으로 대신합니다.

 

탈리반 시대
지난 20년 사이
지난 20년 사이
지난 20년 사이

 

아주 큰 변화가 있었습니다. 탈레반을 경험하지 않은 세대가 가진 잠재력은 놀랍습니다. 이들도 기회만 주어지면 당연히 놀라운 일들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카불 외 지역은 좀 더디겠지만 모든 것이 응집된 카불은 놀라운 일들이 가능했을 것입니다. 

이제 다시 위기가 왔습니다. 1979년 소련의 침공 때 그러했고 1996년 탈레반의 점령 때 그러했고 2001년 잠시 철수했을 때 그러했듯이 아프간을 위한 일에 잠시 제동이 걸렸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때도 그러셨듯이 계속 우리가 알 수 없는 그 분의 일들을 진행하실 것입니다. 흩어진 아프간 난민들이 새로운 환경을 맞을 것입니다. 우리나라에도 일부가 온 것은 감사한 일입니다. 정부가 일을 진행하고 있으니 너무 덤비지 말고 차분히 지켜보다가 실제로 그들과 함께 해야 할 일들이 생길 때를 준비하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모두가 남지는 않겠죠. 그리고 다른 형식 (예를 들어 난민, 불법체류자)으로 사람들이 더 들어 올 수 있습니다. 모두를 공평하게 섬겨야 할 것입니다. 떠나지 못하고 남아 있는 사람들 중 위험에 처한 사람들을 위해 계속 기도를 해야겠습니다. 특히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너무 위험한 상황일테니까요. 

 

떠나야만 하는 사람들

 

탈레반이 96년 같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한번 물러갔던 경험이 있으니 이제 국제 사회의 일원이 되도록 도와야 할 것입니다. 특히 최고 지도자는 율법학자입니다. 그가 율법을 유연하게 해석한다면 바로 적용될 수 있습니다. 기도가 필요한 지점입니다. 이제 차분히 기도로 모든 상황을 주님께서 다스려 주시도록 기도할 때입니다. 윌리엄 밀러의 그 풀들이 수 많은 사람들로 변하여 열매를 거둘 수 있도록 말입니다.

긴 글이 되었습니다. 아프간에 관심이 생겼을 때 그나마 이 정도의 글을 남겨야 하지 않을까 하여 다소 길게 적었습니다. 하지만 역사에 비해 상대적으로 짧은 이 글에 담지 못한 여러 이야기를이 있습니다. 아프간 땅에 자신의 삶을 바친 모든 분들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특별히 지난 20년간 자신의 삶과 죽음을 바친 모든 아프간 사역자들에게 깊이 고개를 숙입니다. 샬롬.

 

2021년 9월 1일

권성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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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홍선영 2021.09.01 15:1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대표님 좋은 글 너무나 감사합니다.
    아프간을 위해서 요새 기도하고 있었는데 그동안 아프간을 위해 헌신하신 선교사님들의 수고와 희생을 생각하니 고개가 숙여집니다.
    여러모양으로 뿔뿔히 흩어진 아프간인들이 복음을듣고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회복되어지고 고향 땅의 가족과 친지.친구를 위해 기도하는 날이 속히 오도록 기도가 되어집니다 .

  • 이정미 2021.09.02 00:4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생명을 내어주셨듯이 자신의 생명을 기꺼이 내어주며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한 이들을 통해 아프칸의 과거와 현재의 모습에서 하나님의 히스토리를 보게 됩니다. 다만, 미래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게 될지 지금으로선 예측할 수 없지만, 소망해보기는 아프칸의 미래도 하나님의 히스토리로 쓰여지기를 기대해봅니다.

    첨언: 글을 읽으며 제가 가게 될 미얀마에서 하나님은 지금까지 어떤 이야기들을 남겨놓으셨는지 무척 궁금해서 공부하고 싶어집니다. 히스토리를 알면 하나님의 현재 일하시는 모습이 조금은 잘 보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 강광석 2021.10.01 10:2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랫만에 ‘품’에 들어왔다가
    아프카니스탄 소회(1),(2)를 읽으며
    그간의 선교사님의 헌신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지며
    제 자신의 삶이 부끄러워지네요.
    참회하는 마음으로 불러봅니다.
    …..
    Forbid it, Lord, that I should boast,
    Save in the Death of Christ my God:
    All the vain Things that charm me most,
    I sacrifice them to his Blood.

    See from his Head, his Hands, his Feet,
    Sorrow and Love flow mingled down!
    Did e'er such Love and Sorrow meet?
    Or Thorns compose so rich a Crow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