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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에서

고 김영미선교사님을 추모하며

품에서는 한달에 한 번 혹은 특별한 사안이 있을 때에 마다 GMF에 속한 가족들 그리고 이 공간을 찾아 주시는 선교 관심자 분들에게 보내는 일종의 대표 서신입니다. 서신이라는 말 대신 엽서라고 표현했지만 거의 편지에 가까울 것이라 생각합니다.

 오늘 월초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서신을 드리는 이유는 지난 주에 소천하신 고 김영미 선교사님을 추모하기 위함입니다. '품에서'의 첫 서신에 김선교사님을 추모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GMF에 속한 선교 단체 중 GBT 소속 선교사로서 N국에서 오랫동안 사역하신 선교사님은 54년의 삶을 하나님께 온전히 드리고 주님의 품에 안기셨습니다. 남편 이성우 선교사님 그리고 두 아들 하람과 여람을 세상에 남겨 두었습니다. 그 분과의 몇 가지 에피소드를 중심으로 선교사님을 기억해 보고자 합니다.

 

선교사님을 처음 만난 것은 1989년 쯤으로 생각됩니다. 당시 남편 이성우 선교사님이 성경번역 오리엔테이션 과정의 리더를 하고 있었고 저는 훈련생이었는데 어느 날 함께 1박을 하며 리트릿을 하는 날 이성우 선교사님이 새색시 김영미 선교사님을 그 모임에서 소개하였고 다소 수줍어 하던 모습이 기억납니다. 결혼하고도 서울과 대구로 떨어져 살고 있었기에 그 날 처음 소개를 한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 해 12월말부터 90년 1월까지 한 달간의 성경번역 캠프가 열렸는데 저와 아내는 훈련생으로 이성우 선교사님과 김영미 선교사님은 스텝으로 참석하였습니다. 그 때 김영미 선교사님은 만삭이었는데 캠프 도중 통증이 와서 차를 가지고 있던 제가 공식적(?)으로 수업을 빼 먹고 급히 평소 다니시던 신림동 산부인과로 차를 몰고 갔고 곧 하람이가 태어났습니다. 90년 1월로 기억합니다.

그 이후 선교사님 가정은 저희 가정보다 2년 앞서 싱가폴로 가서 성경번역 훈련을 받고 N국으로 갔고 2년후 우리 가정도 역시 싱가폴로 가서 언어학 훈련을 받았는데 그 때 이성우 선교사님이 훈련 조교로 와서 다시 만나게 되었고 선교지 비자가 나오지 않아 기다리고 있던 저는 선교사님 가정과 약 한 달간 N국 여행을 같이 하게 되었습니다. 아주 깊은 산 속에서 함께 몇 주간 지내며 그 산 속에서 사역하시는 외국 선교사님의 사역을 함께 지켜 보았고 그 곳에서 김영미 선교사님이 문해교육 프로그램 행사를 맡아 하게 되었는데 제가 그것을 돕게 되어 같이 열심히 준비하던 기억이 납니다. 그 때 여행 도중 제가 김영미 선교사님에 대해 느낀 것을 말했던 기억이 납니다. 본인은 싫어 했는지 모르지만 사람들은 김영미 선교사님을 여장부라고 불렀습니다. 하지만 함께 다니며 제가 느낀 것은 첫 인상은 다소 딱딱해 보이는지 모르지만 깊은 속을 가진 사람인 것을 보게 되어서 '선교사님은 보석을 품은 얼음 같다'고 말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 걸 도끼로 깨자고 덤비면 안되고 따뜻하게 녹여야 될 것이라고 했더니 '잘 보셨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이 후 저는 A국으로 갔고 이 후에 GBT 대표가 되어 귀국하였습니다. 한 번은 영남 IVF 여름 수련회 강사로 섬기게 되었는데 그 수련회 리더 간사들이 제가 GBT 선교사임을 알고 김영미 선교사님이 자기들 선배라고 했습니다. 선교사님은 경북대 영어교육학과를 졸업했습니다. 그 때 그 후배들이 제게 '김영미 선교사님은 영남 IVF에 전설'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뭐가 전설인지 물었더니 '김영미 선교사님이 학교 다닐 때 경북대 영어교육학과에 예수 믿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는 전설이 내려 오고 있다'고 했습니다. 전설이 과장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후배들이 그렇게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김영미 선교사님이 평소에 어떤 삶을 살았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제가 대표 2기를 맞으면서 이성우 선교사님과 김영미 선교사님에게 본부 사역을 도와 달라고 부탁했고 결국 우리는 본부에서 함께 3년간 사역을 같이 했습니다. 김영미 선교사님은 단기 선교 파트를 맡았는데 그 때까지 어려움을 겪고 있던 그 사역이 선교사님이 맡고 나자 현지와의 소통 그리고 단기 선교사 훈련 및 관리를 통해 체계를 잡았던 것, 그래서 선교사님을 보면 늘 신뢰가 갔던 기억이 있습니다.

후에 저는 위클리프 아시아-태평양 지역을 섬기게 되어 어느 해인가 아내와 N국에 가서 그 나라의 교단 및 선교 단체 지도자들과 논의를 하기 위해 한 달간 살게 되었는데 선교사님 도움으로  선교사님 집 앞에 있는 게스트 하우스에 머물면서 오랫만에 다시 만나 여러 이야기를 나누며 한 달을 지냈던 추억이 있습니다.

소천하시기 며칠 전 광주 병원으로 찾아 뵈었는데 같이 가신 분들이 저 보고 기도를 하라고 하여 맨 발로 계신 선교사님께 발을 좀 잡고 기도해도 되겠느냐고 해서 허락을 받고 선교사님의 발을 붙들고 기도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기도의 내용이 다 기억이 나진 않지만 이런 기도를 드렸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 제게 김영미 선교사님은 '천하의 김영미' 입니다. 그런데 그 천하의 김영미가 여기 이렇게 아픕니다' 그 뒤에는 눈물이 나서 뭐라고 아룄는지 기억이 안납니다.

그리고 영미 선교사님은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세상에서 주신 소명 성실하게 잘 감당하다가 모든 이에게 큰 감동을 주고 하나님 품으로 가게 되었으니 그 소망과 기쁨이 컸으리라 생각되지만 사랑하는 두 아들, 곧 결혼을 앞둔 하람과 이제 홀로서기를 시작하는 여람을 두고 가는 심정은 너무 아팠을 것 같습니다.

너무 아름다운 사람 고 김영미 선교사님, 주님의 품 안에서 편히 쉬세요.

 

2019년 7월 21일 권성찬 드림

 

추신: 여성 선교사님들의 투병 소식을 너무 자주 듣게 됩니다. 본격적인 한국 교회의 선교 시대가 80년대 말 혹은 90년대 초에 시작되었으니 당시 20대 혹은 30대의 나이로 선교에 헌신했던 분들이 이제 60에 가까워지는 나이이고 자연스레 아픈 분들이 많아지는 것이 이해가 되긴 하지만 특별히 여성 선교사님들의 건강이 문제 되는 것 같습니다. 세계 곳곳에서 사역하시는 여성 선교사님들께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가 함께 하시길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