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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에서

샤스탕 - 그가 건너던 냇가에서

품에서는 한달에 한 번 혹은 특별한 사안이 있을 때에 마다 GMF에 속한 가족들 그리고 이 공간을 찾아 주시는 선교 관심자 분들에게 보내는 일종의 대표 서신입니다. 서신이라는 말 대신 엽서라고 표현했지만 거의 편지에 가까울 것이라 생각합니다.

 

곳곳에서 살고 또 사역하시는 사랑하는 선교사님들

 

오늘은 프랑스 선교사 샤스탕을 생각해 보려합니다. 본질에 대한 갈증이 있는 요즘 시대에 비록 작은 수원지라도 찾아 내어 막힌 흙을 덜어내 몇 방울 안되는 물줄기라도 터 주어야 그것들이 모여 모여 후에 강을 그리고 바다를 이루리라 믿습니다. 하여 샤스탕 신부의 이야기로 거슬러 올라가 몇 방울의 물줄기를 흘려 보고자 합니다.

 

조선에 복음 공동체가 생기고 (이 부분은 후에 다시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서양 교회에 알려지면서 조선 선교에 헌신한 선교회는 프랑스 해외 선교 단체 (파리 외방 전교회) 였습니다. 물론 그 전에 이웃나라인 중국에서 주문모 선교사가 먼저 왔고 시간이 한참 걸린 프랑스 선교사들은 조금 늦게 조선에 들어 오게 됩니다. 해서 모방 선교사, 샤스탕 선교사 그리고 앵베르 선교사까지 1836년과 1837년에 거쳐 들어 와 세 명의 프랑스 선교사가 활동하게 됩니다. 당시 서양 종교인 기독교를 믿는 것이 금지되어 있는 터라 눈에 금방 띄게 되는 이 서양 선교사들은 상을 당한 것 같이 상복을 입고 얼굴을 가리고 다녔다고 하니 오늘날 창의적인 접근지역에서 사역하는 것과도 비교하기 어려울 만큼 힘든 사역이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결국 잡혀서 1839년 9월에 새남터에서 참수 되었으니 1803년 10월생인 샤스탕은 만 36세를 1개월 앞두고 순교한 것입니다. 사실 앵베르 선교사가 주교로서 젊은 두 선교사를 아끼는 마음에 중국으로 피신하라 하였으나 그들은 성도를 두고 피신할 수 없다하여 서해안 쪽에 몸을 숨기고 주교인 앵베르 선교사만 잡혔는데 자꾸 눈 앞에서 조선 성도를 죽이는 것을 볼 수 없었던 앵베르 선교사의 자수 권면에 결국 남은 두 선교사도 자수하여 참수 당하게 되었다 합니다.

 

샤스탕은 프랑스 동남부에 있는 작은 마을 마르쿠가 고향인데 1826년 성탄절에 마르쿠 마을의 성당에서 첫 예배를 인도하게 되니 고향의 부모가 무척 자랑스러워 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며칠 지나 새해가 되자 선교사로 자신을 드렸다며 어머니에게 작별을 고하니 그 어머니가 받아 들이기 힘들었겠죠. 절대 허락할 수 없다고 아무리 말려도 듣지 않는 아들이 집을 떠나 냇가를 향하자 마음 다급해진 어머니가 그 뒤를 따라갔고 냇가를 다 건넌 20대의 샤스탕이 뒤를 돌아 보자 냇가 건너편 자갈 밭에 어머니가 쓰러져 계셨다고 합니다. 샤스탕은 다시 건너가 어머니를 부축하여 일으켜 세우고 모시지 못하는 용서를 구하고 다시 냇가를 건너 선교사의 길을 갔다고 전해 집니다. 선교사의 여정이 오래 걸렸고 중국을 거쳐 결국 1836년 말에 조선에 밀입국하여 최선을 다해 복음을 전했다고 합니다. 그 당시 조선의 상황에서 복음을 전한다는 것이 어떤 일이었는지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자수 전에 고향에 계신 부모님께 편지를 부쳤다고 합니다. 몇 해전 아내와 함께 프랑스에 갔던 참에 샤스탕의 고향 집을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샤스탕이 건넜던 그 냇가를 가 보고 싶었습니다. 지인의 도움으로 그 고향 집의 후손까지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 후손은 그 마지막 편지의 사본을 액자에 담아 보관하고 있었습니다. 편지 말미에 샤스탕은 이렇게 적었습니다. "제 영혼은 주님을 향해 있습니다" 그 집을 나서 아직도 흐르고 있는 그 냇가에 들어가 한참을 서 있었습니다. 성숙하진 못했을지 몰라도 불순물은 없었을 그 20대의 헌신을 기억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조그만 지하 예배실에서 눈물 흘리며 헌신했던 저의 20대를 기억하고 싶었습니다.

 

복음은 우리에게 그렇게 몇 방울의 물로 그리고 피로 흘러 흘러 왔습니다. 계신 곳에서 여러분의 발원지를 기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늘 주 안에서 승리하시기를 빕니다.

 

2019년 7월을 보내며

권성찬 드림

 

추신: 샤스탕 집에서 지인 부부와 샤스탕의 후손과 찍은 사진 그리고 그 집 앞을 흐르는 시내 사진을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