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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반공/삼선교: 삼위일체적 선교와 교회

뉴비긴의 "오늘날의 선교를 위한 삼위일체 교리" 3

뉴비긴의 책 '오늘날의 선교를 위한 삼위일체 교리' 3장에 대한 반추입니다. 3장이 좀 길기도 하지만 그 내용을 잘 소화하는 일이 쉽지 않아 시간 좀 걸렸습니다. 한 달에 한 장씩은 올려야 하는데 조금 늦었네요. 대신 좋은 반추의 시간이 되기를 빕니다. 이번에도 한종석 선생님이 어려운 내용을 잘 번역해 주셨으니 아래 첨부한 전문을 꼭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3. 오늘을 질문하는 이유들: 선교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Occasions for Questioning Today: Where are Missions Going?)

3장에서 뉴비긴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과 하나님께서 교회의 선교 활동 안에서 하시는 일과의 관계에 대해 다루고 있다. 아마도 당시 하나님의 선교라는 논의가 지나치게 치우치고 있던 상황, 즉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 자체가 하나님의 선교라는 주장에 근거하여 하나님> 세상> 교회 라는 도식을 한 쪽에서 주장하는 상황에서 뉴비긴  답게 균형적인 시각, 그리고 균형을 넘어서는 본질적인 관점을 잘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

1) The Christian world mission cannot command whole-hearted and continuing commitment unless through participation in it men and women are persuaded that they are participating significantly in what God is doing for mankind as a whole.

우리가 선교를 계속하는 혹은 그만두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한 개인이 선교를 이해하는 범위 안에서 결정될 것이다. 만일 교회를 세우는 것이 선교라고 이해한다면 교회를 세울 수 없는 아프가니스탄의 산지 무슬림 종족에서 사역을 하기는 어렵다. 우리가 선교를 그만 두는 혹은 지속하고 있는 이유는 그것이 내가 생각한 선교가 아니거나 혹은 내가 생각한 선교이기 때문일 것이다. 비록 개인이나 교회가 선교에 뜨겁게 헌신했을 지라도 그 헌신한 선교의 범위에 의해 선교의 지속성 여부가 결정된다는 말이다. 뉴비긴은 전심으로 그리고 지속적으로 선교에 헌신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참여하는 그 선교가 하나님께서 전 인류를 향해 하시고 있는 일에 참여하고 있다고 설득되어야 가능하다고 말한다. 만일 우리가 하는 일이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하나님께로 회복시키고 계시는 일의 일부라고 확신할 수 있다면 눈에 보이는 결과에 상관없이 혹은 어려운 상황에 상관없이 우리는 그 선교를 전심으로 지속할 것이다뉴비긴은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선교는 그저 우리 자신이 '잘 될 꺼야' 혹은 ' 이건 안되겠는데' 또는 '이건 영 불안한데' 혹은 '아주 희망이 보여'라고 판단하는 정도의 일이 아닐 뿐더라 '참 좋은 일 하시네요'라고 하면서 누군가 후원해 주는 정도의 일이 아니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역사 가운데 일하시는 전체의 계획 안에서 우리가 하는 일이 의미를 가질 수 있어야 지속적 헌신이 가능하다는 이야기다.

2) There cannot be sustained conviction in the prosecution of the missionary task if there is not some illumination - by faith, not by sight - of the way in which this task is related to God's whole purpose for the world. It is perhaps at this point that we may find the occasion for the present hesitancy in the missionary movement. For we have recently passed from a time when it seemed rather easy to interpret the place of the Christian world mission in the secular history of mankind to a time when it seems more difficult.

나는 개인적으로 선교의 위대한 세기라고 불리우는 19세기와 하나님의 선교 논의가 시작된 20세기의 선교를 잘 관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위대한 세기의 선교가 2번에 거친 세계 대전을 지나면서 축소되거나 사라진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위대한 세기의 선교에서 비본질적인 혹은 상황에 기댄 부분이 있었을 것이고 그것을 반추하여 오늘날 우리의 선교에서 그런 거품에 속한 부분을 다시 반복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뉴비긴은 2번의 대전 후 선교 운동이 '주저함'을 보이는 것에 대해 그 부분을 지적하고 있다. 선교의 위대한 세기에서는 세속 역사와 선교 역사가 마치 동일한 것처럼 발전을 거듭했다. 그러나 발전이 퇴보한 것 처럼 보이는 시대에 선교와 세상 역사는 어떻게 조화를 이룰 것인가? 조화를 이룰 수 없어 세상의 역사와 관련성을 포기하고 기독교 내부 복음으로 더욱 보수화되어 '복음화'라는 명분으로 축소된 복음을 전하면 우리가 하는 선교는 그 역할을 다하는 것인가? 우리가 하는 선교가 하나님의 전체적인 목적 - 세상의 역사를 포함하여 - 안에 의미를 찾지 못하면 선교의 지속성이 없어 뉴비긴이 지적한대로 '주저함'을 보이거나 - 적어도 주저함을 보이는 것은 선교를 그 전체적인 역사 안에서 찾아야 한다는 전제는 가지고 있는 것이다. - 혹은 주저하지 않고 선교를 세상과 결별하고 우리가 무언가를 선포하는 내부적인 것으로 범위를 축소하여 말그대로 '용감'해 질 것이다. 뉴비긴은 전자를 지적했고 나는 개인적으로 후자를 걱정한다.

3) 뉴비긴이 이 글 안에서 간단하게 정리한 선교 대회와 논의

뉴비긴은 이 장에서 다루는 주제와 관련하여 선교 대회에서 어떻게 그 논의가 변천되어 왔는지 소개한다. 우선 1910년의 에딘버러 대회에서는 세계 복음화를 '당장' 이루자는 분위기였고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한다는 것이 주요 주제였다. 1928년 예루살렘 대회에서 여전히 하나님의 나라를 강조하면서 그 하나님의 나라는 '그리스도를 닮은 세상'이기 보다 '새로운 하늘과 새로운 땅'이라는 관점에서 이해되었다. 1938년의 탐바람 대회는 교회의 세계 선교라는 주제가 강조되었다. '교회 중심의 선교'라는 인식이 강조된 대회였다. 1952년 윌링겐 대회에서 선교에 대한 이런 교회 중심적 이해에 비판이 제기 되었다. 이러면서 제기된 질문은 '하나님께서 우리 시대의 사건 안에서 행하시는 일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하는 것이었다. 1961년의 뉴델리 대회에서는 이 부분에 대한 논쟁이 있었다. 타종교와의 진정한 대화를 해야한다는 주장이 있었고 다른 한편에서는 이런 주장이 혼합주의의 위험을 가져 온다고 보았다.

한 마디로 정리하면 선교를 교회가 끝낼 수 있다는 인간 중심의 교만한 시각과 그 반대 방향에서 하나님 선교와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을 동일시여기는 지나친 극단 사이에서 이리저리 오가는 방황의 시기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4) It must be confessed that in some of our thinking about the task of missions we have taken a wholly unbiblical view of the world. We have spoken as though the affairs of secular history concerned us only when they either assisted or impeded the work of the Church. . . . But if we avoid the errorof denying God's work in the world outside the Church, we have also to avoid the opposite error, which is so to identify the dynamic movements of secular history with the work of God that one judges the 'relevance' of the work of the Church by the measure in which it relates itself to these movements.

우리는 세상의 역사를 이해할 때 우리의 기준에서 기독교에 혹은 더 축소해서 말하자면 선교에 도움이 되는 영역에 대해서만 '하나님의 역사'라고 취사선택해 왔다. 한류가 동남아를 휩쓸 때 우리는 한류가 선교를 위해 하나님께서 일으키신 운동으로 말하는 것을 서슴지 않았다. 역사를 취사 선택하여 하나님의 선교를 말하는 것은 취사선택하지 않은 부분에 대해 하나님이 하신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암묵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뉴비긴은 그것이 완전히 비성경적이라고 지적한다. 반대로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하나님의 일하심이라고 동일화 시켜 버리는 것에 대해서도 뉴비긴은 경고한다. 그럴경우 교회가 하는 사역이 적절한가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운동에 적실한가로 판가름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 두 극단을 어떻게 벗어 날 수 있는가?

5) In the older Churches of the West it may well be that syncretism is the real danger; . . . But this kind of syncretism is not a living danger in the Churches of Asia. Here the danger, as their leaders have often pointed out, is 'ghettoism' - a practical withdrawal into the position of a tolerated and static minority, a cultural and religious enclave within the majority community. Correspondingly the great need is to find ways of breaking out of this isolation and of entering into real dialogue with the men of other faiths who are wrestling with the problems of the mordern world and who are seeking resources to meet its demands.

그 두 극단의 문제는 소위 '대화'라는 주제까지 이어진다. 하나님의 선교를 세상과 동일시하는 입장을 따라가다보면 대화는 우리가 가진 믿음의 포기라는 지점까지 열게 된다. 반대로 역사를 취사선택하고 '선포'만을 강조하는 소극적 입장에 서게 되면 대화는 '혼합주의'를 낳게 된다고 비판한다. 이 문제를 평면에 놓고 이것이 옳으냐 저것이 옳으냐의 문제로 접근하는 대신 뉴비긴은 서로 다른 상황에서 이 문제를 바라보도록 도와준다. 뉴비긴은 분명 그리스도까지 양보하는 대화를 거부한다. 그리스도의 유일성은 뉴비긴의 흔들림없는 기초이다. 그 동안 기독교 문화를 구축하고 기독교가 주류였던 서양 세계에서 이러한 타종교와의 대화를 용납하기 어려운 이유는 그러한 새로운 사상으로 인해 자칫 혼합주의 신앙이 만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역으로 말하면 기존 기독교 국가의 교회들은 새로운 사상을 염려해야 하는 수동적 상황에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런 면에서 한국 교회는 서양 교회가 아니면서 서양 교회가 처한 패러다임을 닮아 있다. 다가오는 상황에 대해 상당히 보수적이고 수동적이다. 하지만 선교지의 교회들의 상황은 혼합주의를 염려해야 할 상황이 아니라고 뉴비긴은 설명한다. 기독교가 소수 종교인 선교지의 상황에서 다른 종교와의 대화는  필수적이다. 적극적으로 격려해야 할 상황이다. 왜냐하면 소수이고 심지어 핍박을 받는 상황이다 보니 안으로 더 훔츠려 들어 게토화가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혼합주의라는 신학적 토론이 아니라 나가지 않고 머물러 있는 교회가 교리를 지키다가 선교적 상황을 상실하는 율법 중심의 유대인처럼 될 수 있다.  

6) 뉴비긴은 마지막으로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과 하나님이 교회의 선교적 활동 안에서 하고 있는 일과의 관계에 대해 몇가지 질문을 하며 3장을 매듭짓는다. 기독교인이 줄고, 기독교가 영향을 미치는 영역이 줄고 그나마 존재하는 기독교인들도 서구에서 도움을 받으며 살아가는 별로 위협이 되지 않는 소수의 사람들로 인식되는 상황에서 선교는 어떠해야 하는가?를 묻고 있다. 선교는 이제 한 두 사람을 공동체에서 빼내면서 첫 열매로 보고하는 방식대신 무언가 근본적인 변화를 해야 할 상황을 맞이 하고 있다고 느끼게 되는 것은 뉴비긴 시대와 우리 시대가 닮은 꼴 이기 때문일까? 

뉴비긴의 책 3장의 번역 전문을 여기에 올립니다. 번역은 한종석 선생님이 수고해 주셨습니다.

3장 오늘을 질문하는 이유들: 선교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신앙의 전파를 설명하는 요소들은 확실히 복잡하고 신비롭다. 그 안에는 사회학적 확률의 계산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 보다 더 많은 것이 담겨있다. 그러나 확실한 요소들 중의 하나는 신앙이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들의 경험한 것을 이해 할 수 있도록 돕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유일한 요소도 아니고 더 많은 요소가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오랜 기간에 걸쳐 하나의 신앙이 지속적인 생명력과 개종시키는 힘을 갖기 위해서는 이것은 없어서는 안될 요소이다.

 

성경을 근거로 하는 신앙은 내적이고 개인적인 영적 경험 뿐 아니라 역사 속에서 인간의 사회적이고 공동체적인 삶에 대한 그리고 자연세계에 대한 이해를 분명히 제공한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창조하였고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한다는 교리 안에 내포되어 있다. 기독교 세계 선교는 그것에 참여 함으로써 하나님이 인류 전체를 위하여 하고 있는 일에 의미 있게 동참하고 있는 것이라고 사람들을 설득하지 않는 한 온 마음을 다하는 지속적인 헌신을 이끌어 낼 수 없다. 이는 안일한 실용주의 즉 단순히 일만 되면 된다는 것에 대한 믿음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기독교가 세상을 이해하는 상징은 십자가의 상징이다. 그러나 우리가 선교의 과업이 세속 역사에서 하나님이 일하고 있는 전체의 계획에 어떻게 맞아 들어가는지를 보지 못한다면 우리 자신도 선교의 과업에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헌신할 수 없고 다른 이들에게 헌신하도록 요구할 수도 없다. 단순히 우리의 노력인 선교, 즉 그것에 대해서 우리가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일 수 있고 염려하거나 희망을 가질 수도 있는 그런 종류의 일 혹은 누군가가 지지할 수 있는 그저 다양한 대의명분들 중의 하나인 그런 선교는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선교가 아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산업 근로자를 그 근로자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자리에서 만나서 기독교 신앙이 그의 세계에 빛을 비추고 그 안에서 건설적인 역할을 하도록 힘을 준다는 것을 어느 정도 보여 줄 수 없다면 그는 현대 산업계에서 진정한 선교사가 될 수 없다. 산업계에서 일하는 선교사는 하나님의 목적 안에서 산업이 가지는 의미가 무엇이고 그 안에서 하나님이 무엇을 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우리가 그 안에서 그의 동역자가 되도록 하는지에 대한, 불확실하고 명확하지는 않더라도, 어느 정도의 이해는 가지고 있어야만 한다. 관련 있는 다른 예를 들자면, 비슷하게 어떤 사람이 나라의 어려움에 동참하고 있는 현대 힌두교인을 그 힌두교인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자리에서 만나지 않는다면 그는 현대 힌두교를 향한 진정한 선교사가 될 수 없다. 그 사람은 그 힌두교인이 싸우고 있는 것들과 싸울 의지가 있어야 하고 어떻게 기독교 신앙이 그로 하여금 하나님이 인도와 힌두교를 향해서 하는 일들을 이해할 수 있게 하고  시대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방편들을 찾도록 하는지 보여주어야만 한다. 이렇게 다가가지 않으면 그 선교사는 자신의 의도와 생각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찾아서 개종이나 시키려고 하는 자로 보이거나, 그 세계를 밝힐 수 있는 빛과 그 세계 안에서 올바르게 걸어 갈 수 있도록 돕는 영적 힘을 가지고 그 안으로 들어가는 대신에 사람들을 그들의 세계에서 자신의 세계로 단순히 빼내 가려고 하는 자로 보일 것이다.

 

이런 사람들의 특정한 상황에 적용되는 것은 전체적인 관점에서의 선교적 과업에도 적용된다. 만약에 하나님의 전체적인 목적에 관련되어 진행되는 선교 과업의 여정에 - 보이는 것이 아닌 믿음에 의한- 어떠한 빛도 비추어지지 않는다면 선교 과업의 수행에 있어서 지속적인 확신은 있을 수 없다. 아마도 이 시점에서 우리는 선교 운동에서 발견되는 현재의 주저함의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인류의 세속 역사 안에서 기독교 세계선교의 위치를 이해하는 것이 비교적 쉬었던 시대를 지나서 더 어려운 시대로 우리가 이제 막 들어왔기 때문이다. 1914년 이전의 세기에는 서구 기독교인들에게 세계사의 움직임이 기독교 선교 운동과 동일한 방향으로 가는 것처럼 보였다. 즉 더 정의롭고, 인간적이고 평화로운 세계질서의 방향으로 말이다. 그들은 기독교 선교 과업과 함께 전진함으로 세계사를 움직이는 힘들과 더불어 더 나은 미래를 향해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믿을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 날 이것은 더 이상 사실이 아니다. 총체적이고 보편적인 진보에 대한 이상은 마르크스주의 혹은 다른 형태의 이상주의적 광신이나 회의론과 절망을 남기고 무너졌다. 절망에 굴복하지 않은 사람들과 역사의 마르크스주의적 해석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에게 일련의 사건들을 이해하기 위해 널리 받아들여지는 대안적 준거 틀이 없어 보인다. 상황이 점진적으로 나아져야 한다거나 기독교 선교활동이 이러한 개선에 기여해야 한다는 모호한 느낌은 있다. 기독교 선교활동이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다른 곳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도 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내적 경험을 갖는 것은 아주 좋은 것일 수 있으나 같은 사랑의 동기가 세상에서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이 어떠한 신앙과도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면 그 경험은 선교적 증언을 위한 지속적인 기초를 제공하지 않는다. 선교활동들이 중국에서 일어났던 것과 같은 충격적인 후퇴를 만나거나 세계의 다른 지역에서 일어나는 사건들도 비슷한 방향을 향해서 가는 것처럼 보일 때, 세속 역사의 교훈이 없는 선교활동의 교리는 붕괴한다.

 

 대규모 세계선교대회들이 자신들의 과업에 접근하는 다양한 방법을 주의 깊게 관찰하는 것은 이와 관련해서 의미 있는 일이다. 복음화를 위한 시기적 성숙과 하나님 나라 도래의 긴박성에 대한 세계 전체의 인식은 1910년 에딘버러에서 최고조였다. 대회의 시작과 끝에 모두 우리 주님의 수수께끼 같은 말씀이 인용되었다.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는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대회의 막바지에 모트는 다음의 말을 인용했다. “수 세기 동안 일어났던 일들은 일몰을 향해가는 것이 분명합니다.”지금의 세계 복음화와 하나님 나라의 도래가 바로 에딘버러의 절정을 이루는 발언들의 핵심이었다.

 

1928년도 예루살렘대회의 주된 관심사는 여전히 하나님의 나라였지만 새로운 방향으로 인식되었다. “우리의 목적은 살아있는 구세주인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그와의 교제 그리고 하나님의 공동체안에서 삶의 공동체적 나눔으로 말미암아 개인, 사회, 국가들이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바로 이것이다.” 모임의 근본적인 관심사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과 그 것을 기독교적 관점에서 이해하려고 시도하는 것이었다. 그 모임은 세속주의의 발흥과 기독교에 주는 의미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또한 그 모임은 나중에 교회, 공동체, 국가를 주제로 한 옥스포드 대회까지 연결된 동일한 생각에 대해 성찰했다. 모임의 폐회사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나라의 희망과 기대”였다. 그러나 전체적인 상황은 대표진 중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그리스도를 닮은 세상”의 관점이 아니라 “새로운 하늘과 새로운 땅”의 관점에서 이해한 것으로 추론하게 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1938년 탐바람대회는 교회에 더 많은 관심을 두었다. 이 대회의 주제는 “교회의 세계선교”였다. 모트 박사는 그의 개회사에서 “우리들의 생각과 이 독창적인 시대를 변화시키는 중심은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실현시키기 위해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에 의해서 세워진 하나님의 공동체인 교회라는 것에 주목하자”라고 말했다. 또한 그렇게 실현되었다. 탐바람 모임은 몹시 필요하기도 했고 풍족한 결실도 내는 시기를 시작하는 표지가 되었는데 그 시기 동안의 선교적 사고는 자주 반복되는 표현을 사용하자면“교회중심적”이었다. 우리는 선교와 일치에 대한 그 “합의”에 대하여 탐바람 회의에서 일어난 실질적인 발전에 크게 빚을 지고 있는데 그 합의를 가지고 이 에세이가 시작되었고 1952년 윌링겐 모임도 그 발전에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윌링겐에서는 선교활동의 배타적 “교회중심적”이해에 대한 강한 비판도 있었다.  그 모임은 교회의 선교 안에서 하나님의 일함과 세속 역사에서 하나님의 일함의 관계에 대한 질문을 가지고 씨름했지만 합의를 도출하는데 실패했다.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어떠한 설명도 받아들여지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바로 지금이 당혹감이나 실망감을 가지고 물어보는지 아니면 저항할 수 없는 세속적 희망을 가지고 물어보든지 간에 인류가 “이 시대에 우리에게 어떠한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하는 시점이다. 이어지는 십년 동안 기독교인들은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 시대의 사건 안에서 하는 일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라는 질문을 가지고 씨름해 왔다. 그리고 그들은 이 질문이 선교 과업을 이해하는 중심 질문 임을 깨달았다.

 

뉴델리집회에서 합의를 이루기 가장 어려운 부분이 바로 이 쟁점이었다는 것이 중요하다. 한편에서는, 그리스도가 역사의 주인이므로 그가 우리시대의 사건 안에서 일하고 있고, 우리는 그 곳에서 그가 일하고 있는 것을 분별할 수 있어야하고, 우리가 그를 찾아야 하는 곳은 세상 안에서 평범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 안에서 이고, 그가 다른 종교 혹은 종교가 없는 사람 안에서 우리를 만나러 오기 때문에 우리는 독백이 아니라 진정한 대화에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다른 한편에서는, 이런 종류의 말들이 복음의 유일성을 타협하는 혼합주의로 이끌어 갈 수 있다고 두려워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 집회에서는 토론을 더 깊게 진행하거나 심지어 이 토론에 대한 다양한 의견들 간의 진정한 대화를 이루어 낼 시간이 없었다. 이 토론을 진행해 나가는 것은 긴급하고 필요한 과업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주권과 세속 역사의 사건과의 관계를 조명하지 않는 그리스도의 권위의 확증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은 매우 분명하기 때문이다.

 

선교활동의 “교회중심적”이해에 의해서 지배되었던 선교 역사의 기간에는 열매가 아주 많았음을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이 것이 교회의 일치와 선교에 대한 우리의 현재 합의로 우리를 이끌었고 세계교회협의회(WCC)와 국제선교협의회(IMC)의 통합을 이루어 낸 사건들의 전제조건이었다. 그러나 교회중심적 교리와 선교의 실행은 또한 오해의 원인이었다. 교회가 진정 하나님의 선교의 대리인이고 하나님이 인류를 대하는 방식에 대한 단서가 되기는 한다. 그러나 이것이 세상에서의 하나님의 일함이 단순히 선교와 일치에서의 교회의 진전과 동일시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또한 세속 역사의 사건들이 단순히 교회의 이야기의 배경이거나 구원의 드라마의 단순한 무대장치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성경은 분명히 우리로 하여금 이 문제를 이러한 방식으로 보도록 허락하지 않는다. 신구약 모두의 관심사인 하나님의 복음은 인류 문화사의 많은 지류 중 어떤 하나를 단순히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것의 시작과 끝을 가리키며 따라서 일어나는 모든 일의 진정한 의미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속의 역사와 신구약의 신성한 이야기가 그리고 교회의 이야기와 인류 전체의 이야기가 완전히 구별 될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하다. 성경은 그러한 구분을 하지 않는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요점은 단순히 이스라엘의 이야기가 주변의 이방민족들의 이야기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당연한 것 만은 아니다. 요점은 이 이방 민족들의 모든 이야기가 하나님의 손안에 있고 하나님이 그의 백성에게 드러낸 마지막을 향해서 하나님에 의해서 앞으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너희는 나의 증인이다.(예를 들면 이사야서 44:8)라는 말은 들을 때 이스라엘이 하나님 스스로는 감당할 수 없는 이방 제국들의 힘에 맞서는 것을 돕기 위해서 혹은 그 제국들의 무신론적인 목적과 대비되는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어떤 운동을 조직하기 위해 호출되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이러한 일들은 하나님의 손에서는 너무나 사소한 것들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뜻대로 그들을 일으키거나 던져버린다. 정확히 이스라엘의 역할은 하나님의 목적을 이러한 방법이 아니면 이해하지 못하는 이방 민족들에게 증거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하고 있는 일을 알거나 혹은 알아야만 한다. 그러나 다른 민족들은 알지 못한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자신의 본성과 의지의 계시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이 하고 있는 일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한다.

 

신약성경은 동일한 가르침을 이어나간다. 기독교인들은 이교도의 힘에 대항하기 위한 운동을 조직하기 위해서 부름을 받지 않았다. 그들은 하나님을 증거하기 위해 부르심을 받았는데 그는 품성과 의지가 드러나게 될 역사의 주관자이고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인류의 종말을 재촉할 일들을 이룬 분이다. 기독교인들은 이 시대의 징조 즉 예수의 초림 후에 일어나는 마지막 때의 징조들과 재림을 가리키는 징조들을 분별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예수가 한 일에 비추어 그들은 전쟁, 폭동, 핍박과 고난, 거짓 메시아의 나타남과 기만적인 힘을 가진 적그리스도의 등장이 그리스도인의 신념이 패배한 증거가 아니고 ‘반드시 지나가야 하는’ 일들 중에 하나임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이 일들과 주님이 자신의 고난에 관해서 한 말들 사이에는 유사함이 있다. 이말들에도 “반드시”라는 어구가 붙어있다. 그 것들은 새로운 질서의 탄생에 필요한 부분이다. 그리고 세상의 고난도 마찬가지이다. 메시아의 도래는 인류 역사의 위기를 재촉한다. 메시아 안에서 하나님은 모든 인간 그리고 인류 전체에게 모든 것을 창조한 그 목적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할 수 있는 선택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그리스도의 초림 후와 재림까지의 인간 역사 전체는 종말에 이르기 까지 이 선택을 하도록 압박하는 것이다. 그리고 교회는 이것을 이해하는 몸인데 우리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의 진정한 의미를 민족들에게 증거하기 위해서 그리고 순종이나 거부의 구체적인 선택의 기회를 모든 인류와 민족들에게 제시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선교활동의 과업에 대한 우리의 생각에 있어서 어떤 부분에서는 우리가 세상에 대해 완전히 비성경적인 시각을 취해왔음을 고백해야 한다 우리는 세속 역사의 일들이 마치 교회의 활동을 돕거나 방해할 때만 관련이 있는 것처럼 말해왔다. 우리는 자주 종교적인 질문들에만 관심이 있는 하나님을 믿는 것처럼 보이도록 해왔다. 따라서 우리는 예술가와 과학자 그리고 인류애를 가진 사람들을 복음으로부터 멀리 몰아냈는데 그 이유는 우리가 그들이 도처에서 발견한 아름다움과 진리 그리고 선함에 둔감한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고 우리가 창조물과 인간의 정신 안에 있는 하나님의 솜씨의 화려함을 부인함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주장하려고 애쓰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교회에서 전임으로 사역하는 사람들에 비해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자신을 드리는 사람 그리고 정치나 사회봉사 혹은 연구의 영역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하나님의 목적 안에서 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처럼 보이도록 했다. 선교활동의 운영에 있어서 선교병원에서 일하는 의사는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반면 정부병원에서 일하는 의사는 그렇지 않은 것처럼 보이도록 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교회 밖 세상에서의 하나님의 일함을 부인하는 잘못을 피해야 한다면 우리는 동시에 반대되는 잘못도 피해야 하는데 그 잘못은 세속 역사의 역동적인 운동들을 하나님의 일함과 동일시하고 교회의 활동의 ‘적절성”을 그 운동들과 관련된 정도로 판단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세속의 일들, 예를 들면 우리시대의 혁명적 운동들, 안에서 일한다는 것을 단순히 확언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모든 것들에 대한 주권적 다스림을 믿는다면, 그리고 모든 좋은 것은 그로부터 온다는 것을 믿는 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의미에서는 이러한  운동들 즉 국가 독립, 과학적 발견, 문예 부흥의 운동들, 그리고 분명히 비기독교 종교들의 재탄생과 개혁 운동 안에서 일한다는 것에 동의해야 한다. 그러나 이 문제를 여기서 마무리 짓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더 나아가서 “그럼 어떤 의미에서 인가?”라는 질문을 해야 한다. 만약 우리가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머지 않아 ‘하나님이 이 운동들 안에서 일한다’라고 말하는 것에서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기 위해서 이러한 운동들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라고 말하는 것으로 옮겨가게 될 것이다. 어떤 운동이 더 매력적이고 인상적일수록 이것은 더 쉽게 일어나게 될 것이다. 

 

그러한 방법은 전적인 이교주의다. 그것은 결국 모든 종류의 생명력은 하나님의 현시로 받아들여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역사의 장에서 그것은 성공의 신격화로 이어진다. 찰스 코크레인은 어떻게 역사 철학을 형성하기 위한 고전적인 시도가 ‘부’의 개념과 함께 종말을 맞이하게 되었는지를 보여주었다. 부의 상징인 로마가 무너졌을 때 철학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인류역사에는 성공이 자신들이 필요한 유일한 정당성이라는 주장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주도되는 운동들이 아마도 언제나 있을 것이다. ‘역사의 논리’와 같이 높은 소리를 내는 문구들은 로마의 ‘부’와 같은 동일하고 진부한 이교주의를 쉽게 보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인은 하나님의 목적을 현재 성공적인 정치적 방향- 제국주의, 반식민주의 혹은 어느 것이라도-과 도저히 동일시 할 수 없다. 교회는 ‘그 시류에 거슬러’ 일하는 것이 정상적이라는 것을 지금쯤은 배웠어야 한다.

 

그러나  “그 시류”라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도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 있지 않는가? 그것도 그리스도안으로 귀결되는 모든 것에 속하지 않는가? 그것도 그리스도를 통한 모든 창조물의 일부가 아닌가? 신학자들이 복음을 인류역사안에서의 하나님의 ‘개입’으로 말하는 것을 듣는 것은 일반적인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개입이외에는 하나님은 인류의 역사 안에 존재하지 않는가? 교회 밖의 세상은 우주의 무신론적인 조각인가?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고백하는 몸의 경계 밖에 있는 세상 일 안에서는 일하지 않는가? 성경은 하나님이 일한다는 것에 의심을 품도록 하지 않는다. 그러나 어떻게 하는가? 어떠한 용어를 사용해서 우리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일함의 실재를 부정하거나 그가 모든 인간으로 하여금 선택하도록 한 그 질문의 날카로움을 무디게 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유일성, 충분성 그리고 최종성을 확언할 수 있는가?

 

다른 신앙을 가지고 있거나 아니면 신앙이 없는 사람들에게 복음이 받아 들여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살아있는 대화를 새롭게 시작하려고 노력하는 아시아 교회의 사람들 앞에 실제적인 어려움이 놓여 있는 곳이 바로 이 지점이라고 나는 믿는다. 더 오래된 서구 교회안에서는 혼합주의가 진짜 위험이지도 모른다. 종교적 협력의 일반적인 목록-로마 카톨릭, 개신교 그리고 유대교-이 상황에 따라 힌두교인, 무슬림 그리고 불교인도 포함되도록 확장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많아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혼합주의는 아시아 교회들 안에서는 실제적인 위험이 아니다. 그들의 지도자들이 자주 지적하는 것처럼, 이곳에서의 위험은 용납되지만 활력이 없는 소수집단의 지위로의 실질적인 후퇴 그리고 다수 공동체안에서의 종교 문화적 고립인 ‘게토화’이다. 따라서 가장 큰 필요는 이 고립을 깨쳐 나가는 방법 그리고 현대세계의 문제들과 씨름하고 그 요구들을 충족시킬 수단들을 찾고 있는 다른 신앙을 가진 사람들과의 진정한 대화로 들어가는 방법을 찾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인류의 종교들과 복음의 연속성 혹은 비연속성의 관계에 대한 유명한 논쟁을 새롭게 시작하는 것은 아시아 교회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복음의 유일성과 타자성에 대한 크래머의 유명하고도 단호한 선포를 야기한 그런 종류의 생각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유혹은 거의 없다.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과의 살아있는 대화를 위해서 지금 필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유일한 구원의 자기 계시가 어떻게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에게 일어나는 일을 이해하도록 하고 세상의 삶의 한 가운데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도록 하는지를 우리가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대로의 불연속성에 대한 단순한 확언은 특정한 상황에서는 있는 그대로 필요하기도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 필요한 말은 아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유일하게 그리고 최종적으로 한 일과 전체 인류의 삶 안에서 하고 있는 일과의 관계에 대한 이해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삶에서 하나님이 하는 일과 사람들을 불러서 하도록 하는 일에 합당한 말과 삶의 양식을 통해서 복음을 소통할 수 있도록 만드는 이해이다.

 

이 짧은 글 안에서 이 질문을 전체적으로 다루는 것은 분명히 불가능하다. 이것은 어떤 한 사람의 능력을 벗어나는 과업이다. 이 일은 삶의 다양한 영역에 있는 기독교인들의 협력을 요구한다. 여기서는 특별히 선교활동에 책임이 있는 사람들에게 야기되는 질문들을 직시하려는 노력 외에는 시도되지 않았다. 그 질문들은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과 하나님이 교회의 선교적 활동 안에서 하고 있는 일과의 관계에 대한 것이다. 물론 선택할 수 있는 다른 질문들이 있을 수 있겠지만 나는 실질적인 예로 세가지 질문을 제안한다.

 

(A) 선교적 노력의 결과로 인해 더욱 더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에게로 인도되고 민족들의 삶이 더욱 더 복음의 능력 아래로 인도될 것이라고 믿는 것이 가능하게 보이는 때가 있었다. 만약 기독교제국의 모든 힘들이 그 과업을 위해서 제대로 동원되어진다면 이 방향으로의 아주 거대한 진전이 이루어 질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과 함께 이런 종류의 기대가 1910년의 위대한 선교대회에서 언급되어진 많은 것들의 저류에 깔려 있는 듯 하다. 그것은 그 시대의 상황에서는 타당한 희망이었다.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기독교의 광범위한 확장이 일어났던 ‘위대한 세기’의 경험이 희망의 단단한 근거로 제시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최근에 일어났던 사건들은 그 근거를 흔들어 놓은 것처럼 보인다.  근대선교에 있어서 가장 큰 노력이 집중되었던 단일 지역인 중국의 문이 갑자기 닫혀버렸다. 서구지배하에서의 아시아의 경험을 연구한인도 역사학자 K. M.  파니카르는 “기독교 선교의 실패”라는 제목을 가진 장으로 그의 연구를 마무리했다. 이전 ‘기독교’ 영토의 많은 부분이 이제 교회를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파괴하려는 공산주의 정부에 의해서 견고하게 지배되고 있다. 기독교의 확장이 지속되고 있는 곳에서 조차도 인구성장률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인류전체에 비례해서 기독교인들은 숫자가 줄고 있는 소수집단이다. 기독교가 인류의 미래에 대한 단서를 제공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B) 소수로 줄어들고 있는 것은 기독교인들의 숫자만이 아니다. 기독교가 권위를 가지고 있는 인간 삶의 영역 또한 축소되고 있는 듯 하다. 더욱 더 많은 삶의 영역이 어떠한 종교적인 질문도 고려하지 않는 사상의 체계나 조직으로 넘어간 듯하다. 거대한 현대적인 공장에서 일하는 열심있는 기독교인 조차도 그가 예수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것과 관련이 있는 영역이 어디인지 포착하는 것을 어렵게 생각한다. 과거에는 교구 사제에게 주저없이 가지고 갔던 가정 문제들도 이제는 지역 기관에 의해서 제공되는 정신의학 사회복지사에게 가지고 갈 가능성이 높다.  교회가 공동체 생활의 중심인 마을에서 다이아몬드나 구리 광산의 갱도들과 분탄 무더기가 가득한 지역으로 이주한 아프리카인은 교회가 자신에게 가르친 것이 아무런 길잡이도 되지 못하는 문제들의 소용돌이로 던져진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공산주의 ‘해방’의 물결에 갑작스럽게 휩쓸린 중국 학생들은 세상 안에서의 힘의 진정한 성격에 대해 자신들을 속여 왔다는 이유로 자신들의 선교사 선생들을 격렬히 비판한다. 기독교인들이 상대적으로 축소하고 있는 소수집단이라는 것만이 아니라 기독교가 권위를 가지고 있는 인간 경험의 영역도 축소되고 있다는 것이다.

 

(C) 게다가 선교활동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은 그들이 맺은 열매의 양면적인 성격에 대해 가장 잘 인식하고 있다. 생명과 자원의 엄청난 소비를 통해서 교회는 세계의 거의 대부분의 지역에 개척되었다. 그러나 교회는 대단히 많은 지역에서 작고 명백히 주변적인 공동체로 남아있다. 아시아의 거대한 군중들은 복음의 호소에 명백히 둔감한 상태로 남아있다. 겉으로 보기에 교회들은 주로 오래된 신앙에 위협적인 신호를 보여주지 않는 다는 이유로 묵인된 오래된 사회의 언저리에 불안정하게 위치한 서구적 문화 거주지들과 같다. 그들은 영적으로 그리고 재정적으로 서구로부터 오는 지속적인 도움에 의지한다. 그들은 서구 유럽의 역사 문화적 분열에 따라 분열되고 일치를 향한 몇몇 운동들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속한 국가의 문화적 삶 안에서 강하게 연합된 그리고 연합시키는 몸이 될 가능성을 보여주지 못한다. 그들은 즉각적인 성장을 위한 힘을 보여주지 못하고 현재 그들의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외부로부터 오는 자원의 지속적인 유입에 오히려 의존한다. 믿음의 눈으로 보면 그들은 아시아와 아프리카 사람들의 첫 열매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비신앙의 눈으로 보면 그들은 기독교의 첫번째 위대한 선교시대의 끝자락과 이슬람 세력의 출현에서 살아남은 동방 기독교인들의 작은 공동체와 비교될 수 있는 서구 지배 시대의 무능력한 잔재로 간주되기가 쉬울 것이다.

 

나는 이 질문들이 교회의 선교 사역을 염려하는 사람들 안에 있는 주저함의 근거에 대한 실질적인 예 그 이상이라고 제안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질문들은 실제적이고 중요하다. 이 질문들은 어떻게 응답되어져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