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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반공/삼선교: 삼위일체적 선교와 교회

뉴비긴의 "오늘날의 선교를 위한 삼위일체 교리" 2

뉴비긴의 책 '오늘날의 선교를 위한 삼위일체 교리' 2장에 대한 반추입니다. 앞에 올린 서론을 읽으신 분들은 엘리노어 잭슨이 말한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이 책이 1963년에 나왔는데 그 안에 뉴비긴이 1980년대에 출간한 저서들에 등장하는 주제들이 이미 보인다고 했습니다. 지금 다루고 있는 이 책이 비록 작은 책이지만 그 안에 담긴 생각들은 뉴비긴 생각의 원형 같은 것을 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2장은 분량이 길기도 하거니와 줄여서 반추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모든 내용들이 다 보석 같습니다. 아래에 첨부한 전문을 꼭 읽어 보시기를 권합니다.

2. 교회 일치의 경계 - 진리의 문제 (The Limits of Ecumenicity - the Question of Truth)

앞서 밝힌대로 지금 뉴비긴이 이 글을 쓰고 있는 상황은 선교계와 교계가 통합을 이루는 시점입니다. 교계라 함은 주로 서양 중심의 교회에서 선교의 결과로 서구 외 지역에 교회들이 성장하면서 교회의 지형이 달라졌음을 말합니다. 일방적 구도에서 쌍방 혹은 다방향으로 지형과 구도가 변한 상황에 대한 통찰을 가지고 이 글을 쓴 것입니다. 2장에서는 그런 교회 일치가 가지고 있는 경계가 어디인가? 일종의 한계를 명확히 하는 것을 다룹니다.

 

1) But behind these questions of pattern there are deeper questions of substance, and these are questions which must now be faced. Why is there not more vigour in the missionary work of the Churches which share in the ecumenical movement? Why does the call to foreign missionary service not evoke a response from more of the ablest students in the universities? Let it be granted that part of the answer lies in the field of relationships, in the fact that the patterns of missionary action do not conform to the facts of the Gospel or of the world today; the question has still to be asked: 'Is there not a deeper reason? Is there not a deep uncertainty in the Churches concerning the uniqueness and finality of the Gospel itself?

선교계와 교계가 통합된 것은 관계의 영역에서 일어난 일이고 그로 인해서 분리된 채로 진행되던 선교보다는 통합 이후의 선교가 좀더 선교의 속성에 더 일치되는 방향으로 변화될 것이라고 뉴비긴은 보고 있습니 다. 예를 들어 선교지에서 선교사 중심의 선교가 진행되고 현지 교회나 현지인들은 선교의 대상으로만 여겨지다가 어떤 변화가 일어나 선교사와 현지 교회가 한 마음으로 같이 선교를 하게 되었다면 분명 이전보다 복음의 속성에 가까운 방식으로 선교가 진행되겠죠. 아마 그런 변화가 통합 이후에 관계적 측면에서 일어날 변화라고 본 것 같습니다. 그런데 뉴비긴은 우리가 물어야 할 좀 더 심오한 질문이 있지 않겠는가? 라고 반문합니다. 교회 일치 운동에 참여하는 교회들이 왜 선교 운동에 더 적극적이지 않은지, 왜 젊은이들이 이러한 선교 운동에 더 헌신하지 않는지? 단순히 관계의 영역을 너머 물어야 할 질문들이 있다는 겁니다. 50년도 더 된 옛날의 상황이 꼭 오늘의 상황을 말하는 것 처럼 느껴지는 것은 '기분' 탓일까요? 우선 뉴비긴은 이렇게 질문합니다. 복음의 독특성과 최종성 자체에 대해 교회 안에 깊은 불확실성이 있는 것은 아닌가? 저는 이렇게 해석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정말 복음을 아는가? 우리는 정말 하나님을 아는가? 우리는 정말 예수 그리스도의 의미를 아는가? 우리는 정말 성령을 바르게 알고 있는가?

 

2) For it must be frankly admitted that - whatever might be said from the pulpit about the true basis of missions in the Gospel itself - the motives with which they have been supported have been mixed. The very word 'mission' has come to suggest an operation in which one reaches down in pity and sympathy to the less fortunate, the unenlightened, the underprivileged. The picture of 'the heathen' to which Christians have responded with the devotion of their prayer and substance in the work of missions has too often been picture of the poor, the ignorant, the diseased. To the extent that this has been so, it is not surprising that now, when one has a chance to meet 'the heathen' in the persons of the highly competent and cultured participants in the life of modern international society, there is a shaking of the traditional foundations.

이 문장들 앞에서 뉴비긴은 세상, 특히 서구 기독교의 관점에서 볼 때의 세상이 얼마나 변했는지를 이야기 합니다. 기독교가 서구의 모든 가치를 지배하던 소위 기독교 제국 시절에 기독교는 다른 종교에 대해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세계의 다른 종교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서구 기독교에 영향을 미치지는 못한 것이죠. 그런데 세상이 변하고 마태오 리치 같은 가톨릭 선교사들이 중국에 가서 놀란 것처럼 굉장히 수준 높은 종교 철학이 다른 곳에서 이미 있는 것에 충격을 받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날 영적 상대주의가 기승을 부리고 이제 종교가 다르고 모든 면에서 다른 사람들이 한 자리에서 자신의 생각을 나누는 일이 일상이 되어버린 그런 세계 속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 현재의 상황에서 이전에 해 오던 선교를 뒤돌아 보면서 위의 문장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강단에서 선교에 대해 뭐라고 아름답게 말하던지 간에 상관없이 - 예를 들어 우리는 그들을 형제로 여겨야 합니다. 등등 - 실제 선교의 현장에서 '선교'라는 단어는 뭔가 우리보다 열악한 상황에 놓인 사람들에게, 뭔가 미개하고 불쌍하고 병 걸리고 어려운 상황에 있는 미전도 지역과 종족에 기도와 헌신으로 응답하는 그런 일과 연관되어 있었다고 말합니다. 오늘 우리의 상황이 이러한 진단과 멀지 않게 보이는 이유 역시 '기분' 탓일까요? 그렇게 선교를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믿지 않는 그리고 저 가난하다고 여겨지는 나라의 피부색 검은 사람들이 국제 무대에서 놀라운 모습을 보일때 '이건 뭐지'라고 놀라는 일이 놀랍지 않다는 겁니다.

 

3) We have discovered many times in these years of inter-church discussion that even those who seemed to be contradicting us had something to teach us about Christ. . . . 'Should not this process be extended further? May we not find that if we extend this kind of discussion we shall have yet more to learn, yet more enrichment of our fellowship? Is not the logical development of this whole movement something like a world fellowship of religions?'.

뉴비긴은 이렇게 변한 상황에서 교회 일치 운동을 통해 대화의 가치와 중요성을 교회들이 배우게 된 것에 대해 언급합니다. 교회 일치 운동을 통해 교회들은 이전에 서로 이상하다고 여긴 다른 교단들과 대화하면서 그 안에도 그리스도에 대해 배울 것이 있음을 깨닫게 되고 우리 교단만이 진리를 수호하고 있다는 보수적인 생각으로 부터 대화와 교제의 중요성을 배우게 된 것입니다. 그런 경험을 바탕으로 조금 더 열린 혹은 진보적인 사람들은 그런 대화의 경험이 더 확장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라고 주장하고 그런 생각은 기독교 내의 교단 간 대화를 너머 '종교간의 대화'라는 자리까지 나아가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뉴비긴은 교회일치운동의 경계라는 제목을 붙인 겁니다. 그런 자리까지 나아가야 하는가? 아니면 문을 닫고 대화를 하지 말하야 하는가? 이상하게 사람들은 이런 표면적인 것으로 논의를 해 나갑니다. 전도냐 사회참여냐, 대화냐 선포냐 등등 이런 식으로 늘 표면의 싸움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분위기에서 교회일치운동을 신봉하는 뉴비긴이 어떻게 이야기를 풀어가는지 좀더 이어가 보죠.

 

4) And now, having reached this point, we are compelled to recognize that we are confronted in a new way with one single question: the question of the uniqueness, sufficiency and finality of Jesus Christ as the one Lord and Saviour of the world.

이 지점에서 중요한 질문을 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 질문은 '세상의 주요 구세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독특성, 충분성, 최종성에 대한 질문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그는 교회일치 운동의 경험에 비추어 이 질문을 두 가지의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 두 가지란.

 

5) 

(a) When the task is placed in a fully ecumenical setting, every other question except the question about Christ is in principle excluded. Every motive for missions to which one appeals must be one which is valid (in priciple) equally for the Asian and for the European, equally for the Russian and for the American. Any open or covert suggestion, for instance, that missions are valuable as an insurance against Communism, or as an agency of technical aid to backward areas, is ruled out. By placing missions in a world-wide setting one commits oneself to the belief that the one essential question for all mankind is the question concerning Jesus Christ and that every other question which missions may raise is secondary.

누군가 그런 이야기를 했던 것 같습니다. 이 세상에 꾸밈 혹은 수식에 속한 것을 제거한다면, 마치 건물에 인테리어 한 것을 다 제거한다면 무엇이 남을까? 프랑스의 화가 폴 세잔은 자신의 집 뒤 언덕에서 주로 그림을 그렸는데 그 언덕에서 멀리 바라보면 쌩 빅투아르라고 하는 돌산이 보입니다. 그 돌산을 계속해서 그렸습니다. 내가 보는 저 산 말고 산의 본래 본질은 무엇일까 라는 질문을 하면서 말입니다. 그래서 초기 작품에는 더러 집과 나무들이 알아 볼 수 있도록 그려진 반면 점점 뒤로 갈 수록 그리고 후반부로 갈 수록 산인지도 잘 모를만큼 그림에 남는 것이 적습니다. 제 방에 그 후기에 속한 작품이 걸려 있는데 본질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만듭니다. 뉴비긴의 질문이 그것과 동일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완전한 일치의 상황에 접어 든다면, 우리가 학교를 하고 있는데 그들 스스로 학교를 할 충분한 역량이 갖춰지고 우리가 병원 사역을 하는데 그들도 그 만큼의 의료 수준이 되고 우리가 사업 선교를 하는데 그들도 그 정도는 할 수 있게 된다면 결국에 다 같아지는 혹은 서로 서로 보완하여 그것이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 그런 상황을 가정한다면 결국에 남는 그 핵심은 무엇일까? 그리고 그 핵심은 그렇게 모든 것이 같아진 상황이 온 다음에야 생각해도 되는 문제인가? 아니면 지금 그런 주변 문제에 신경쓰느라 혹은 그 주변 문제가 핵심이라고 보기 때문에 보지 못하는 그런 중요한 문제일까? 뉴비긴은 우리가 가정하는 그런 상황이 오면 이론상 혹은 원리상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질문을 제외한 다른 질문은 모두 배제된다고 핵심을 찌르고 있습니다.

(b) When the movement for unity is understood in missionary terms, then every other potential centre for human unity except Jesus Christ is ruled out. This means that we have to face the negative as well as the positive implication of the confession of Jesus as Lord. . . . The words, 'I came not to bring peace but a sword,' will have to be accepted. If he is the one appointed by God to be the king of men, then all other claims to provide a final basis for human unity will have to be denounced as disobedience.

연합이라는 말을 선교적인 관점에서 말할 때 예수 그리스도 밖에서의 연합을 수용할 여지는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대화와 일치가 가진 한계 혹은 경계가 있습니다. 대화와 일치 자체가 궁극적 가치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궁극적 가치입니다. 대화와 일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의미를 가집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모든 인류의 왕으로 지명하셨다면 그를 배제하고 다른 것에서 궁극적 연합의 기초를 찾는 일은 모두 불순종이라고 지적합니다.

We have indeed to learn to enter into real conversation with men of other religions if they are to apprehend Jesus Christ as Saviour and if we are to learn all the manifold wisdom of God which he set forth in Jesus. But the ecumenical movement remains missionary through and through because it is a movement not for any kind of unity, but for that unity which is God's creation through lifting up of Jesus Christ upon the Cross and through the continuing work of his Spirit. 

이건 뭐 별도의 설명이 필요 없을 것 같네요. 한종석 선생님의 번역을 그대로 올립니다.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가 구주시라는 것을 깨닫고 우리가 하나님께서 예수 안에 두신 온갖 지혜를 배우고자 한다면 우리는 진실로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과 진정한 대화를 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일치운동은 지속적으로 끊임없이 선교적이다. 왜냐하면 이 운동은 임의적인 일치를 위한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성령의 지속적인 사역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만드시는 일치이기 때문이다."

 

6)  One can put the same double point by making the following affirmations:

(a) The ecumenical movement remains open to all who confess Jesus Christ as God and Saviour.

(b) The ecumenical movement remains open only to those who confess Jesus, Christ as God and Saviour.

위에 설명한 두 가지 포인트를 쉽게 다음과 같이 정리합니다. 모두 (all)와 오직 (only)을 대비했습니다. 교회일치운동은 예수를 하나님이요 구세주로 고백하는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지만 그 말은 동시에 그렇게 고백하는 사람에게만 열려 있다는 말입니다.

7) The truth is that it is the very essence of this movement that the limits of its comprehensiveness are set, not by men by God, because he has provided in Jesus Christ the one who is the only king and head of the human race.

교회일치 운동의 경계는 사람이 정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유일한 왕이요 머리로 보내신 하나님에 의해 정해졌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것이 이 일치 운동의 핵심이라는 겁니다. 오늘날 에큐메니칼 운동이 이 핵심을 여전히 이해하고 있는지 아니 복음주의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이해하고 있는지? 계속 지지 거리게 됩니다.

There was a time when it was possible to support the work of missions without having seriously faced this question of religious truth. That time is past. There can be no recovery of vigour and directness in the work of missions so long as that question is not faced.

아프리카 어느 지역에 상황화 이슬람이 들어 왔다고 합니다. 이슬람은 사실 상황화라는 것이 어려운 종교입니다. 코란이라는 형식을 변개하면 안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건 600년대 시점이고 지금은 그것의 원리를 시대에 맞게 따르면 된다는 그런 상황화 이슬람 주장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아마 어려운 지역이니까 물질적인 것도 잘 지원해 주었나 봅니다. 그러자 기독교인들이 그곳으로 몰려 갔다고 합니다. 쉽게 말해서 이슬람에서 쌀 두 포대를 주니 교회에서 쌀 한 포대 받던 사람들이 떠난 겁니다. 그 때서야 비로소 교회는 알게 되었습니다. 그 동안 복음에 의해서가 아니라 쌀 한 포대로 그들을 붙잡아 두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서구적 식민지 상황에서 오로지 기독교만이 모든 권력을 가지고 있을 때는 진리에 천착하지 않고도 권력으로 문화로 사람들을 교회에 붙들어 두는 것이 가능한 시대가 있었다는 겁니다. 그러나 이제 다원주의 사회 속에서 교회보다 재미있는 일들이 많아 진 사회에서 무엇이 문제인가라고 할 때 그것은 진리의 문제라는 겁니다. 아직 그런 권력과 문화가 통하는 곳에서 선교 사역을 진행하고 있는 경우 혹 우리가 '부흥'이라고 말하는 것이 진리에 바탕을 둔 것인지 아니면 아직 거기는 다른 것으로도 통하기 때문인지 물어야 할 것입니다. 한국에서 옛날에는 교회만 가도 좋았는데 라고 꼰대같은 소리를 반복할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가 이 진리 문제에 봉착해 있다는 사실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2장에 대한 반추를 하면서 문장을 떼어 내기가 어려웠습니다. 누군가 그런 말을 했습니다. 요한복음에는 구약의 직접 인용보다 그 배경 혹은 분위기에 구약적인 것이 많이 있는데 만일 요한복음의 구약이 어디에서 왔나 찾으려면 구약 성경 전체를 갖다 놓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2장이 좀 그랬습니다. 다행한 것은 2장이 구약만큼 두껍지 않다는 겁니다전문을 여기 첨부하니 시간을 내어 읽으시기 바랍니다. 사진은 남프랑스 액상 프로방스에 있는 쌩 빅투아르 산입니다.

 

뉴비긴의 책 2장의 번역 전문을 여기에 올립니다. 번역은 한종석 선생님이 수고해 주셨습니다.

 

2장 교회일치의 경계-진리의 문제

 

IMC WCC의 통합은 관계의 영역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통합을 주장했던 사람들이 믿는 것처럼, 이 사건은 선교 활동을 새롭게 만들어 가는데 도움이 될 만한 관계들을 제공한다. 이를 통해 새롭게 형성되는 선교활동은 현재의 선교 방향보다는 지금 우리가 나누고 있는 선교적 과업의 본성의 이해와 더욱 정확히 일치하는 방향을 향한다.  그러나 이러한 방향에 대한 문제 뒤에는 더 깊은 본질에 관한 문제들이 있고 이것이 우리가 지금 직면해야 하는 문제들이다. 교회일치 운동에 참여하는 교회들의 선교 활동은 왜 더 활기차지 않을까? 왜 해외선교로의 부르심은 충분한 잠재력이 있는 대학생들의 반응을 불러 일으키지 못할까? 이에 대한 대답이 부분적으로는 관계의 영역과 지금의 선교 활동의 방향이 복음의 실제 또는 오늘날의 현상에 잘 부합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더라도 질문은 여전히 계속되어져야 한다.“더 심오한 이유는 없는가? 복음의 유일성과 최종성에 대하여 교회안에 깊은 불확실성이 있지는 않는가?

 

 

우리 시대의 영적인 분위기에 민감한 사람들의 마음에 주저함이 있을 것 같은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시대의 가장 분명한 현상 중 하나는 종교의 영역에서 영적인 상대주의의 지배이기 때문이다. 콘스탄틴 시대 이후 유럽이 기독교화되고 나서 서구인들은 지금처럼 종교적 다원주의의 세계에서 살아 본 경험을 한 적이 없다. 아시아의 위대한 종교들은 분명히 수천년 동안 존재해 왔지만, 서구인들은 그 들과 접촉하지 못한 채 오랜 기간동안 거의 완전히 고립되어 있었다. 접촉이 시작되었을 때에도 기독교의 영향에 비교하면 아시아 종교들은 서구인들의 마음에 영향을 줄 기회를 거의 얻지 못하는 문화적 상황이었다. 18세기와 그 후 엘리트 인문학자들에게 중국철학의 발견은 특별히 어마어마한 충격을 주었고 그 후 서구 사조의 전반적인 추세에 영향을 주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시대에 들어와서야 세계의 종교들을 갈라 놓았던 장벽을 일반인들을 위해서도 허물 수 있을 정도로 교통과 통신이 발전되었다. 19세기동안 선교활동을 지지하는 서구인들에게는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외딴 곳에 있는 존재이며 동정이나 호기심의 대상이었지, 서구인들의 영적인 방어막에 심각한 도전이 될 수 있을 정도로 삶에 대한 또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는 존재로 여겨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종교들은 더 이상 거리로 인해 서로 간에 고립되어 있지 않다. 세계의 모든 곳으로부터 그리고 모든 종교 공동체로부터 온 학생들이 동일한 학문들과 동일한 책들과 세계 정세에 대한 동일한 주제의 토론을 하면서 서구 대학의 캠퍼스안에서 서로 경쟁하고 있다. UN과 그에 속한 특별 기구들을 포함한 거대한 국제기구들 그리고 정부간 협의체들은 인류가 현재 직면하고 있는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 모든 종교로부터 온 인재들이 지속적으로 협력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해준다. 유네스코 안에는 인류의 삶의 공통적인 영적 기초를 찾기 위한 수단을 만드는 것이 주요 목적인 기관이 있기도 하다. 상업, 과학, 문화의 다양한 주제를 다루는 무수한 국제 회의를 통해서 전 세계에서 온 남녀들이 완전한 진리가 인간 종교 생활의 다양한 모습 중 오로지 한 곳에만 속한다고 하는 어떠한 제안도 그저 어리석게 보이는 환경에서 동등하게 만나고 있다. 마지막으로, 인구의 증가로 인해 다른 나라에서 일자리를 구해야 하는 사람들, 이주자들, 그리고 난민들과 더불어 이러한 다국적 회의에 참석할 기회를 얻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도 지구 상의 접근 가능한 구석 구석으로 계속해서 퍼져나가는 여행객의 홍수는 다른 지역에 살고 있는 평범한 사람들이 서로 얼굴을 맞대고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이러한 새로운 경험들에 직면하면서, 선교사업을 지탱하던 전통적인 버팀목 중 일부가 흔들리기 시작한다 해도 놀랄 일이 아니다. 그 이유는 복음이 말하는 선교활동의 진정한 기초에 대해서 강단에서 무엇이라고 설교 되든 간에 선교사업을 지탱하고 있던 동기에 여러가지 불순물들이 섞여 있다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선교’라는 말 자체가 동정심과 측은함을 가지고 가난하고, 못배우고, 기회를 갖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찾아가는 활동을 암시하여 왔다. 기독교인들이 선교활동에서 기도와 물질의 헌신으로 반응해왔던 이교도의 이미지는 대부분 가난하고 무지하고 불건전한 이미지였다. 그렇게 인식해 왔기 때문에 지금 누군가가 현대 국제 사회의 일상에 매우 역량 있고 세련되게 참여하는 이교도를 만난다면 그가 가지고 있던 전통적인 기반들이 흔들리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더 나아가, 인류의 영적 상황에 가장 민감한 사람들이 교회에 묻는 매우 중요한 질문이 있다. 교회는 그리스도안에 있는 하나님의 계시의 유일성과 최종성을 지속적으로 주장함으로써 인류의 분열을 치유함에 있어 적절한 역할을 할 자격이 없는 것이 아닌지 질문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러한 비판에 대해 선교적 사고는 교회일치 운동안에서조차 인류의 새로운 상황을 설명하는데 실패한 것처럼 보인다. 인간은 이제 하나된 공동체로 사는 법을 배우는 것과 소멸되는 것의 기로에 서있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지금까지의 인류역사 속에서, 인간은 거대한 문화 집단으로 나뉘어 있었고 그 집단들은 실제적으로 서로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리고 각각의 집단안에서 종교는 유대와 안정을 이루는 통합의 중요한 요인 중 하나였다. 그러나 인간은 이제 완전히 다른 상황에 처해있다. 서로 간의 거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세상의 모든 지역의 사람들은 인간의 모든 활동의 영역에서 지속적으로 서로 연결되어 지고 있다. 이 새로운 상황에서 인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전체 인류에게 일치와 안정을 제공할 수 있는 유대의 핵심을 찾는 것이다. 수많은 인간 집단들 중의 하나가 믿는 종교를 취해서 이것이 모든 인류를 위한 올바른 신앙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그 종교가 전세계에 걸친 기반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현재 인류가 처해있는 상황을 전혀 보지 못한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밖에 안된다. 이러한 주장은 인류가 그 무엇 보다 상호간의 평화를 필요로 하는 이때에 종교 내전을 야기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제기되는 질문은 교회의 외부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다. 교회 내부에도 이에 대한 반향이 있다. 그리스도인들도 세상안에서 살고 있는데 만약에 교회내부에 반향을 일으키지 않는다면 그것이 놀라운 일일 것이다. 더군다나 우리가 서로를 공격하고 정죄하는 대신에 서로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때 오는 풍성함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교회일치 운동을 통해서 배운 사람들에게 이 반향이 왜 특별히 강력해야 하는지를 말해주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다. 우리는 최근의 교회간의 대화를 통해서 우리와 다른 견해를 가진 것으로 보이는 사람들로 부터도 그리스도에 대해 배울 것이 있음을 여러 번 발견해 왔다. 우리는 두려움과 의심의 벽이 허물어지고 우리가 참여하는 더 넓은 교제를 통해서 새로운 경험의 지평이 열리는 것을 보아왔다. 따라서 이러한 질문이 제기되는 것은 이해될 만하다. “이러한 변화가 더 확장되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  우리가 이러한 종류의 토론을 더 확장시켜 나가면 더 많은 것을 배우고 더 많은 교제의 풍성함을 경험하게 되지 않을까?  이러한 움직임은 필연적으로 종교간의 세계적 공동체와 같은 형태로 발전되야 하는 것은 아닌가? 우리는 우리의 선진들과 같이 인류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공개적 시인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확신하는가?

 

명백히 우리는 핵심 질문, 즉 궁극적 진리에 대한 질문에 도달한다. 교회일치운동은 선교운동에서 자라났고, 우리가 선교 과업은 결국 모든 사람을 자신에게 이끄시기 위해 높이 올려 지신 그 분의 지속적인 일하심으로 이해하게 되는 시점에 도달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국 선교와 일치는 불가분의 관계임을 보게 된다. 그리고 이제 이 시점에서 우리는 한가지 질문을 새로운 방식으로 다루어야 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온 세상의 주와 구주로서의 예수그리스도의 유일성, 충족성, 최종성에 대한 질문이다. 이 질문은 우리의 교회일치 운동의 경험을 통해서 두가지 방향으로 제기된다. ,

 

(A) 선교과업이 완전한 교회일치의 무대에 놓이면 그리스도에 대한 질문을 제외한 모든 질문이 원칙적으로 제외된다. 누군가가 주장하는 선교활동의 각각의 동기는 아시아인, 유럽인, 러시아인 그리고 미국인에게 동일하게 원칙적으로 타당해야 한다. 그리고 어떠한 공개적이거나 숨겨진 제안, 예를 들면 선교활동이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보호수단으로 혹은 낙후한 지역을 기술적으로 도와주는 대행업으로서 가치가 있다는 등의 제안은 배제된다. 선교활동을 전 세계적인 무대에 올려 놓는 다는 것은 인류의 가장 근본적인 질문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질문이라는 그리고 선교활동이 제기하는 다른 모든 질문은 부수적이라는 신념에 헌신하는 것이다.

 

(B) 일치운동이 선교의 언어안에서 이해될 때, 예수 그리스도를 제외한 인류의 일치를 위한 다른 어떠한 잠재적 중심도 제외된다. 이것은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것의 긍정적인 영향과 더불어 부정적인 영향도 우리가 직면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에 왕과 인간의 머리가 되어 하나님의 우편에 높임을 받으신 진정한 인간의 삶을 살았던 예수만이 유일한 중심이라면 그의 지상에서의 사역에서 일어났던 일들은 교회를 통한 그의 지속적인 활동에서도 일어나야 한다. 예수의 지상에서의 사역은 하나를 만들기도 하고 동시에 분열을 일으키기도 한다.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고 검을 주러 왔다”라는 말은 받아들여져야만 한다. 만약에 예수가 인간의 왕이 되기 위해 하나님에 의해서 지명된 존재라면, 인간의 화합을 위한 최종적인 근거를 제공한다는 다른 모든 주장들은 불순종으로 비난받아야 한다. 만일 예수가 하나님의 진리의 구체적인 계시라면 그 계시를 따르지 않는 모든 것은 거짓으로 드러나야 한다. 종교간의 일치를 위한 각각의 제안들은 어떤 것이 궁극적인 진리인가에 대한 가끔은 공개적인 그러나 대부분 드러나지 않은 믿음에 기초를 두고 있다. 기독교와 다른 종교들을 포함한 일치를 위한 제안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계시 이외에 다른 실제에 대한 (공개적인 혹은 숨겨진) 믿음에 기초를 두고 있다. 교회일치운동이 우리에게 준 서로에게 귀를 기울이는 법을 배우는 경험은 기독교 제국의 경계를 넘어서도 유효하다.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가 구주시라는 것을 깨닫고 우리가 하나님께서 예수 안에 두신 온갖 지혜를 배우고자 한다면 우리는 진실로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과 진정한 대화를 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일치운동은 지속적으로 끊임없이 선교적이다. 왜냐하면 이 운동은 임의적인 일치를 위한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성령의 지속적인 사역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만드시는 일치이기 때문이다.

 

다음의 두가지 확언을 통해서 동일한 두가지 논점을 설명할 수 있다.

(A) 교회일치운동은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이요 구주로 고백하는 누구에게나 열려있다. 교회일치운동은 이 운동이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자신과 연합시키시기 위해서 선택하신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다는 믿음, 따라서 예수를 고백하는 사람들은 서로가 아무리 달라도 서로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인정하는 믿음으로 부터 시작되었다.

(B) 교회일치운동은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이요 구주로 고백하는 사람에게만 열려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를 위해서 하나님이 주신 속죄소이며 인류의 일치를 위해 제안된 그 어떤 다른 기초도 받아들여질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이요 구주로 고백하는 모든 사람을 받아들이는 교회일치운동의 개방성은 개방성으로 인해 진리의 문제가 타협되었다고 믿는 사람들로 부터 비판을 야기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사람들만 받아들이는 교회일치운동의 제한성은 제한성으로 인해 인류의 연합이 방해 받았다고 믿는 사람들로 부터 비판을 야기한다. 명백한 사실은 교회일치운동의 포괄성의 경계가 인간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정해졌다는 것이 이 운동의 진정한 본질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유일한 왕이요 인간의 머리로 주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하는 사람들을 부인해서도 안되고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사람을 인정해서도 안된다.

 

지금까지 이야기 한 것을 정리해보면, 선교운동과 그로 부터 나온 일치를 향한 운동의 발전 그리고 교회의 일치안에서의 선교에 대한 현재의 합의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의 핵심 질문을 대면하도록 한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만이 인류의 주요 구세주인가? 그리고 인류의 왕이요 머리인가? 어떤 의미로 이 질문은 전혀 새로운 질문이 아니고, 복음이 항상 제기해 온 오래된 질문이다. 그러나 이 질문이 오늘날 제기되는 방식은 서구 교회의 평범한 남녀들의 경험안에서는 새롭다. 모든 종교들이 궁극적인 진리의 소유권을 가지고 공개적으로 경쟁하는 다원주의 사회안에서 평범한 신자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최종적인 권위를 확증하고 믿을 수 있는 힘을 가져야 하는 위치에 있다. 기독교 제국이라는 상황 속에서 이 문제는 동일한 방식으로 혹은 동일한 날카로움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기독교 국가에 사는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예수의 이름은 궁극적인 종교적 진리로 우뚝 서 있었다. 이 진리가 존중되거나 무시되기도 했고 순종 되거나 불순종 되기도 했지만, 위협이 될 만한 종교적 경쟁자는 없었다.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의 최종적인 권위에 대한 확증은 종교적 진리를 주장하는 경쟁자들의 충돌 속에서 그리고 모든 진리는 상대적이고 부분적이라는 생각이 지배하는 사회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종교적 진리에 대한 이러한 질문을 심각하게 다룰 필요 없이 선교 사역을 지지하는게 가능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 시절은 이미 지나갔다. 이러한 질문에 직면하지 않는 한 선교 사역에서의 활력과 균형의 회복은 없을 것이다.

 

이 연구는 예수가 진실로 모든 인류의 주요 구주시라는 믿음안에서 기록되었다. 그리고 예수를 주로 고백하고자 하는 소망 그리고 아버지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고자 하는 소망에서 기록되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죄의 사슬과 어둠에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자기 자신의 계시인 그의 아들을 우리에게 주셨고 그 아들을 통해서 우리를 악의 권세로 부터 구원하셨기 때문이다. 이 연구는 성령 하나님이 믿음에 불을 밝히시고 어둠과 혼돈을 비추시기 위해 인간의 말을 사용하실 수 있다는 믿음 안에서 기록되었다. 그러나 이 책은 우리의 현재의 선교적 순종에 직접적으로 결실을 맺는 것 이외에 이 믿음의 의미를 확장하려고 시도하지는 않는다. 또한 경쟁자들의 주장에 맞서서 복음의 변증을 시도하는 것도 아니다. 선교운동의 추진에 주저하는 이유들을 가능하면 정직하게 마주하고 선교과업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위해 필요한 결론을 도출하기 위한 시도이다.